박근혜 대통령은 배신을 그 무엇보다 싫어한다. 자신의 뜻을 거스를 기미가 설핏 어른거리면 칼날은 어김없이 날아온다. 채동욱 전 검찰총장은 청와대의 사생활 폭로로 쫓겨났다. 유승민 새누리당 의원은 항명죄로 원내대표직을 잃었다. 전자는 국정원의 대선개입 수사 때문이었고 후자는 세월호특별법 시행령이 화근이었다. 이제 국정원의 해킹쯤이야 어떤 내부 잡음도 없이 무난히 처리될 것이다.
다행히 20일이 넘도록 새로운 메르스 환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2년 반의 우여곡절을 겪고 난 후, 바야흐로 뜻을 펼 때가 된 것일까? 이제 경제만 살리면 되는 대통령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는 21일 국무회의에서 “노동개혁은 생존을 위한 필수전략”이며 “우리 경제의 재도약과 세대간 상생을 위한 시대적 과제”라고 강조했다. 특히 젊은이들을 절망에 빠뜨리는 과도한 연금제도와 노동시장의 이중구조를 깨뜨려야 한다.
구조개혁의 바탕 위에는 희망의 씨앗을 뿌려야 한다. 바로 창조경제다. 온 국민이 메르스 공포에 떨 때도 오불관언, 전국 창조경제혁신센터 방문을 거르지 않은 대통령이다. 24일 청와대에서 열린 대기업 총수 17명과의 간담회가 정점을 찍었고, 곧이어 사면 발표가 대미를 장식할 것이다. 재벌들의 도움으로 재현될 ‘대박 신화’는 젊은이들에게 다시 한번 창업의 희망을 심어줄 것이다.
대통령은 야당과 노동세력을 고립시키고 청년들을 끌어안으려 한다. 재벌은 이 회심의 전략을 실천할 든든한 동맹군이다. 해서 임기의 절반이 지나도록 대통령은 국가혁신=구조개혁=규제완화에 매진했다. 학교 옆 관광호텔, 병원 안 관광호텔로부터 수박꼭지(농산물 표준규격 개정)까지 규제완화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지만 그중의 압권은 아예 전국을 알프스로 만들겠다는 산지 규제 완화다.
이렇듯 “암덩어리”를 샅샅이 제거했는데도 안타깝게 건강은 악화일로다. 규제만 풀면 불같이 일어나리라던 투자(총고정자본형성)는 2013년 1%포인트, 2014년 0.9%포인트 성장에 기여했을 뿐, 올해는 이보다 더 떨어질 전망이다. 이런 상황에서 기업이 해고의 자유까지 누리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실업이 늘어나고 임금이 급격히 떨어질 테니 내수마저 마이너스로 돌아설 것이다. 애써 끌어올린 집값도 위태로울 것이고, 설상가상 온 국토에 들어선 테마파크는 개장휴업이 뻔하다.
정말 정규직 노동자들이 ‘세대간 상생’을 가로막고 있는 것일까? 대학 진학률이 80%를 넘나드는데 일자리의 85% 이상을 중소기업이 제공하는 현실에서 이들 기업의 임금과 노동조건이 개선되지 않는다면 상생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하청단가 후려치기와 골목상권 위협을 일삼는 재벌들이 바로 그 원흉이 아닌가?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은 연방 최저임금을 40% 인상해야 한다고 의회에서 역설하는데 한국의 대통령은 겨우 8% 인상하고선, 이미 세계 1위인 노동시장 유연성을 더 높여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창조경제도 마찬가지다. 청년들이 오로지 전문직과 공무원, 심지어 부동산임대업자가 되려 하는 것은 이들 직업이 안정적이고 상대적으로 높은 보수를 누리기 때문이다. 모두에게 공평한 기회를 주지 않는 사회에서는 혁신도 창조도 불가능하다.
요컨대 투자활성화든 창조경제든 먼저 불평등을 없애야 한다. 임기를 마칠 즈음 대통령은 또 한번 배신에 치를 떨 것이다. 대기업에 대한 사랑은 흔하디흔한 배신의 드라마로 끝날 텐데, 응징의 칼날은 이미 무뎌진 지 오래일 테니 말이다. 대통령이 안락한 여생을 누리려면 경제민주화와 복지라는 선거공약을 지켜야 한다. 모름지기 국민을 배신하지 않아야 성공한 대통령이 될 수 있다.
정태인 칼폴라니사회경제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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