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 적정수준 오르면 생산성도 향상된다”
[한겨레경제사회연 ‘소득주도 성장’ 좌담]
‘임금주도 성장론’ 원 저작자
슈토크하머·오나란 교수 초청 좌담
분배악화로 구조적 수요부진 타개책
단기 부양책과 거리가 멀어
임금 상승시 생산성 개선도 기대
한국은 기술집약형 수출 구조
임금 상승, 실보다 득이 더 커
최저임금 인상·노조 교섭력 강화
사회투자 확대 등 정책 과제 제시
가계의 처분가능소득을 키워 성장을 도모하는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 성장’ 정책을 놓고 정치권을 넘어 학계에서도 논쟁이 뜨겁다. 이 주제로 진보성향의 사회경제학회가 심포지엄을 하는 데 이어 국내 최대 경제학자들의 모임인 ‘한국경제학회’도 세미나를 열었다. ‘소득주도 성장론’은 가계의 처분가능소득을 키워 성장을 도모하는 전략이다. 대기업 감세나 규제 완화를 위주로 한 성장 전략을 취해온 역대 정부의 경제정책과는 접근 방식이 확연히 다르다. 이를 두고 주류 경제학계에선 “단기 부양책에 불과하다”거나 “개방 경제인 한국에서 수출 기업의 국제 경쟁력을 훼손한다”는 우려를 쏟아낸다.
<한겨레>는 지난 11일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초청 좌담회에 참석한 엥겔베르트 슈토크하머 영국 킹스턴대 교수와 외즐렘 오나란 영국 그리니치대 교수, 이상헌 국제노동기구(ILO) 사무차장 정책특보 등으로부터 소득주도 성장에 대한 견해를 들어봤다. 이들은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 성장론이 나오는 데 지대한 영향을 준 ‘임금주도 성장론’을 강조해온 경제학자들이다. 이날 좌담은 최영준 연세대 교수와 정혜주 고려대 교수가 진행을, 주상영 건국대 교수와 김연명 중앙대 교수가 토론에 나섰다.
■ ‘단기 부양책’에 불과? 소득주도 성장에 대한 비판 가운데 핵심에는 소비진작으로 단기 부양은 할 수 있을지라도 중장기적 성장 잠재력을 확충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우려가 있다. 이런 시각은 중장기 성장은 노동공급(인구)과 자본축적, 생산성이 결정한다는 정통 경제성장론에 기초한 것이다. 여성의 노동시장 참가 확대 유도(노동)나 노동시장 유연화 등 구조개혁(생산성) 등을 핵심 처방으로 제시한다.
오나란 교수는 이에 대해 “‘임금을 올려 소비가 진작되고 투자가 늘어나 경제가 성장한다’는 식으로만 좁게 임금주도 성장론을 이해하면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며 “우리 성장론은 임금 상승이 (정통 경제학에서 말하는 성장 요소인) 생산성 개선으로 이어질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그는 “임금이 적정 수준으로 오르면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고 창조적으로 일하려는 동기가 부여된다. 소득 증가가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마술 열쇠’는 아니지만 주요 수단이 된다”고 덧붙였다. 슈토크하머 교수는 “한국은 서비스업 생산성이 주요 선진국의 절반도 되지 않을 정도로 매우 낮다. 임금을 적정 수준으로 끌어올리면 서비스업에서 생산성이 크게 향상될 수 있다”고 거들었다.
이상헌 정책특보는 1990년대 중반 이후 추세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노동소득분배율(국민소득에서 노동이 가져가는 몫의 비율) 하락이나 생산성 개선을 크게 밑도는 임금 상승 속도를 언급했다. 이 특보는 “노동소득분배율의 추세적 하락은 한 경제 내에 유효수요가 구조적으로 부족한 상황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조적 유효수요 부족’을 개선하기 위해 제안된 임금주도 성장론은 경기가 좋지 않을 때 재정과 통화를 푸는 단기 경기 대응형 정책과는 똑같지 않다”고 강조했다.
■ 수출기업 경쟁력 훼손? 미국처럼 내수시장이 큰 나라와 달리 수출 비중이 큰 한국에선 임금주도 성장의 효과가 약하거나 수출 기업의 국제 경쟁력을 훼손시킬 수 있다는 지적도 단골로 등장한다. 임금주도 성장론은 다른 나라에는 맞을 수 있지만 한국에는 맞지 않는 옷이라는 비판이다. 사실 1960~80년대 고도성장기에 수출 증대를 위해 노동을 강하게 통제했던 것도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한다.
이런 지적에 대해, 오나란 교수는 “한국은 수출 중심 경제인 것은 사실이나 주요 수출품목은 주로 반도체나 자동차 같은 기술집약적 제품들이다. 값싼 노동력에 기대 노동집약적 상품을 수출하는 중국이나 인도, 멕시코, 터키와는 양상이 다르다”며 “한국은 임금이 올라도 수출에 미치는 파급은 크지 않다. 그보다 소득 증가에 따라 기대할 수 있는 소비 확대라는 긍정적인 부분이 더 크다는 게 나의 연구 결과”라고 말했다. 슈토크하머 교수도 의견을 여기에 보탰다. “한국은 경상수지 흑자가 꾸준히 쌓이고 있는 나라다. 우린 소득 향상이 수출에 큰 영향을 주지 않을 것으로 보지만, 설령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한국은 (임금 상승으로 수출이 부진해져) 경상수지가 적자로 전환해 금융시장이 불안정해질 가능성은 낮다.”
주상영 교수도 “노동소득분배율 개선이 수출과 소비, 투자 등 거시 지표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해보니, 그 결과도 오나란 교수의 연구 결과와 엇비슷했다. 분배율이 개선되면 소비 증가 효과가 수출에 미치는 부정적 효과를 크게 넘어섰다. 다만 투자에는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는 것으로 나왔다”고 거들었다.
■ 구체 정책 수단이 부족? 당장 소득주도 성장 철학을 구현해야 하는 관료들 사이에선 ‘마땅한 정책이 없다’는 얘기도 흘러나온다. 최저임금 인상과 재정 지출 확대 외에 손에 잡히는 정책 과제가 떠오르지 않는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임금을 올리면 성장을 한다’는 주장을 받아들이더라도 ‘어떻게 임금을 올릴지’가 뚜렷하지 않다는 것이다.
오나란 교수는 생활임금 수준의 충분한 최저임금 인상을 임금주도 성장을 구현하는 정책으로 첫손가락에 꼽으면서도 동시에 임금 결정 과정에서 노동자의 교섭력을 강화시킬 수 있는 제도 구축을 강조했다. 예를 들어 10% 수준인 노조조직률을 끌어올릴 수 있는 법적·제도적 대책이나 임금 협상에 절대적 열위에 있거나 부당노동행위에 노출돼 있는 다수의 비정규직 노동자 보호를 위한 근로감독 강화도 소득주도 성장의 주요 정책 과제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이 특보는 공정한 경쟁 구조를 만들기 위한 정책도 소득주도 성장 정책의 중요한 부분이라고 강조했다. 정부는 소득주도 성장과 공정경제를 구분해 분류하고 있다. 이 특보는 “노동과 자본 간의 분배뿐만 아니라 자본 내부의 격차, 노동 내부의 격차를 줄이는 것은 소득주도 성장에서 핵심 정책 과제”라며 “한국은 기업 규모에 따라 기업의 실적에 큰 차이가 있고, 근로 형태에 따라 노동 내부에서도 거대한 차이가 존재한다. 이런 차이를 줄이기 위한 공정한 경제 구조를 만드는 정책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 “공공투자 확대와 결합이 중요” 오나란 교수와 슈토크하머 교수는 임금주도 성장이 효과를 더 내기 위해선 정부의 공공투자 확대와 결합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한국 정부도 내년 예산을 과거보다 확대하고 돈의 쓰임도 복지 확충에 집중하는 재정 전략을 펴고 있다. 그런데 두 교수가 강조하는 공공투자 확대는 소비성향(소비를 소득으로 나눈 비율)이 큰 저소득층에 소득을 몰아줘 소비를 진작시키려는 목적으로 재정을 확대하려는 정부와는 주안점이 다소 달랐다.
오나란 교수의 강조점은 이렇다. “공공투자 확대는 임금 협상에서 노동 쪽의 교섭력을 높이는 데 도움을 준다. 보건이나 교육, 주거 부문 등 사회안전망을 확대하는 데 재정 지출을 늘리면, 노동자들은 삶의 불안이 줄어들게 된다. 일자리를 잃으면 곧 생존이 어려워지는 환경에선 노동조합에 힘이 실리기 어렵고 그에 따라 교섭력이 약해진다. 사회안전망 확대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고 중요하지만, 동시에 노동자들의 임금 교섭력을 강화시켜 임금을 끌어올리는 데도 기여한다.”
이 특보는 한발 더 나아가 “재정 정책은 재분배 이상의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가령 조세 제도를 좀더 누진적으로 가져가게 되면 최상위층이 정치를 포획하는 정도나 경향을 줄일 수 있다”며 “임금 성장이 더딘 배경에는 기술 발전이나 세계화 등 다양한 요인들이 있지만, 그중에는 정치적인 환경에 바탕한 힘의 관계도 존재한다. 임금 결정 과정에서 기업들은 이런 힘을 바탕으로 과도한 몫을 가져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조세제도를 누진적으로 좀더 가져가거나 사회투자를 확대하는 방향의 재정 정책은 사회 전체적으로 경제 주체별 협상력의 균형을 맞춘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덧붙였다.
주 교수는 “임금주도 성장은 근본적으로 수요주도 성장”이라고 말했다. 그는 “수요 진작이란 측면에서 임금을 올리는 것만으로는 그 효과를 충분히 기대하기 어렵다. 케인스적인 재정확장 정책과 함께 가야 상승작용이 일어난다는 데는 이견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연명 교수는 “한국은 주요 선진국에 견줘 복지 수준이 매우 낮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복지 예산을 확대할 필요가 크다”고 밝혔다.
2017. 10. 12
김경락 기자 sp9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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