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인의 경제시평]소득주도성장, 올바른 토론의 시작
정태인 | 칼폴라니 사회경제연구소장
제14회 칼폴라니 국제학회를 지난 12일에서 14일까지 치렀다. 근 30년 만에(2년에 한 번씩 열리므로) 아시아에서 최초로 개최됐다. 우리는 “더 젊게” “더 구체적인 의제를” “아시아인들의 주도로” “학자들뿐 아니라 실천가들과 시민들이 참여하는” 학회를 바랐다. 많은 이들이 “기대 이상으로 훌륭하다”고 평가했고 우리는 애초에 기대수준이 낮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반성했다.
‘소득주도성장’ ‘기본소득’ ‘촛불과 이중운동’ ‘아시아의 사회적경제’가 주요 의제였고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문재인 정부가 경제정책기조로 삼은 소득주도성장은 초미의 관심사였다. 슈탁하머 킹스턴대 교수, 오나란 그리니치대 교수, 이상헌 ILO 사무차장 보좌관 등 국제노동기구(ILO)의 임금주도성장론(wage-led growth)을 정립한 학자들은 한국에서 빚어진 오해를 불식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이상헌 박사가 ILO의 잘 정리된 통계를 애써 외면하고 국제통화기금(IMF) 등의 통계와 연구를 인용한 것도 그런 의도였을 테다.
이 박사는 이론과 정책 간의 관계(나는 종종 이론과 정책 사이에는 만리장성이 있다고 표현한다)를 해명하는 데 많은 시간을 쏟아부었다. 경제학의 전통적 성장이론과 국민계정 통계 때문에 자본소득과 노동소득 간의 관계가 부각될 뿐, 실은 지대추구가 만연한 노동소득 내의 불평등, 자본 간의 불평등도 똑같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정책 역시 노동시장(노동조합 조직률 및 적용률 제고)뿐 아니라 생산물시장(공정경제), 금융시장(금융규제) 모두를 포괄해야 한다.
이어서 그는 소득주도성장이 케인스주의적 단기 정책일 뿐이라는 비판 또는 오해에 대해 이 이론은 성장의 구조적 한계를 다루는 장기 정책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장기에도 수요가 중요하다는 것은 포스트케인스주의의 핵심 명제이다. 세계적으로는 1970년대 중반 이래, 한국에서는 1990년대 중반 이래 불평등이 심화하면서 동시에 성장률도 지속적으로 떨어졌다는 사실은 바로 그 구조적 한계의 명명백백한 증거이다.
다음으로 소득주도성장이 공급측면을 무시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이 이론 역시 물리적, 인적 자원에 영향을 미치는 혁신과 연구·개발 투자를 중시한다고 반박했고, 투자를 무시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불평등이 심화하는 모든 나라에서 높은 이윤이 투자로 연결되지 않는 이유를 물었다.
여기에는 또 다른 발표자인 조복현 교수의 모델이 제시했듯이 금융화가 핵심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다. 기업에 돈이 쌓여도 금융화에 따른 자산투자에 골몰한다면 성장률은 떨어질 것이다. 수출에 대한 악영향 문제에 관해서 이 박사는 수출경쟁력의 내용을 문제 삼았다. 즉 임금 몫의 상승에 적절한 정책을 결합하면 생산성 향상으로 이어져서 수출도 증가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오나란 교수는 이러한 이론적 추론을 치밀한 계량분석으로 뒷받침했다. 한국에서 임금 몫이 1% 떨어질 때 국내총생산(GDP)은 0.1% 감소한다(외환위기 이래 임금 몫이 10% 줄어든 것이 성장률 1%를 갉아먹었다는 이야기다). 그는 임금 몫의 증대가 공공투자와 결합할 때 최선의 결과를 낳는다는 점을 특히 강조했다. 이 공공투자는 사회적 인프라, 즉 복지 인프라뿐 아니라 녹색전환 등 기술혁신에 대한 투자를 포함한다. 또한 임금 몫의 상승이 수출에 약간의 악영향을 미칠 수는 있지만 내수 증가의 이익이 이를 능가한다는 결과도 제시했다.
우니 교수(교토대)의 발표는 나에게 가장 흥미로웠다. 그는 아베노믹스의 경험을 통해 수출주도경제가 소득주도경제로 전환할 때 겪을 어려움을 제시했다. 그는 동아시아의 수출주도 경제가 자국 통화의 절하 경쟁, 임금 상승 억제, 비교역재 부문의 낮은 생산성을 전제로 성과를 거뒀는데 이제 세 요소 모두 한계에 다다랐다고 진단했다. 대안은 동아시아 나라들 공동의 환율 관리, 임금 상승을 위한 비정규직 노동조합의 조직, 그리고 비정규직의 노동시간 단축과 임금 인상에 의한 생산성 향상이 관건이라고 주장했다. 모두 만만치 않은 과제다. 특히 뒤의 두 과제는 노동계의 결의와 실천 없이는 달성할 수 없다. 소득주도성장의 성패는 민주노총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IMF와 같은 보수적 국제기구도 불평등이 성장을 저해한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하지만 피케티가 보여주었듯이 역사적으로 이런 불평등을 시정하는 데 성공한 전후 황금기는 세계전쟁과 대공황의 결과였다. 과연 이러한 파국 없이 부드럽게 전환할 수는 없는 걸까? 만일 어떤 나라가 사회적 합의와 정부 정책을 통해 이 일을 해낼 수 있다면 두말할 나위 없이 전 세계의 모범이 될 것이다. 모든 발표자들이 대한민국에 희망을 걸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2017. 10. 17
원문보기_경향신문 오피니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