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인의 경제시평]“좋은 세상 올 줄 알았는데”
정태인 | 칼폴라니 사회경제연구소장
원래는 문재인 대통령의 ‘시운’을 축복하며 한두 가지의 ‘기우’만 덧붙이려고 했다. 촛불시민이 6개월 이상 앞당겨 취임하게 만든 대통령을 기다린 것은 발 디딜 곳이 별로 없는 지뢰밭이었다. 지난 9년 동안 한껏 취약해진 경제는 트럼프 대통령의 보호무역주의에 시달려야 했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위기까지 불렀으니 앞날이 깜깜했다. 2003년 5월, 노무현 전 대통령은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선언했다. 경제성장률이 5% 이하로 떨어지자 재벌들에게 투자를 호소한 것이다. 개혁 역시 시운이 따라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의 운명도 그리 달라 보이지 않았다. 아니, 더 나빠 보였다.
그런데 금년 3분기의 경제성장률이 1.4%(작년 동기대비 3.6%)로 급등했다. 지난 1분기부터 반도체, 석유화학을 중심으로 수출이 증가하고 대규모 반도체 설비투자가 잇따랐기 때문이다. 반도체 경기는 무어의 법칙에 따라 1년 내에 사그라들겠지만 선진국 경제가 상당한 회복세를 보이고 있어서 앞으로 1~2년 경제는 꽤 괜찮을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사드였다. 후보 시기에는 사드 배치를 재고할 것이라고 공언했지만 북한의 도발과 트럼프의 강공으로 대통령은 조기 배치를 선택했다. 한국은행은 이 때문에 금년에 0.4% 정도 GDP가 줄어들 것이라고 예측했다. 중국 정부까지 보복에 나선다면 내년엔 1% 넘는 영향을 미칠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야말로 기적적으로 한·중이 관계 정상화에 합의했다. 한국 정부는 더 이상 사드를 배치하지 않고, 미국의 아시아 미사일방어(MD)체계에 들어가지 않으며 한·미·일 군사동맹을 맺지 않는다고 약속했다. 두 번째 약속이 문제다. 사드는 미군의 전략자산이며 미국이 운용하는데 우리가 어떻게 MD에서 빼내겠는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역사의 시험을 견뎌낼 수 있는 정책 결정을 해야 한다”고 한 것도 이 때문이다.
즉, 내 보기엔 일종의 “집행유예” 상태지만 상황을 봐서 어떻게든 사드 철회에 준하는 조치를 취할 수 있다면 남북관계까지 풀어내는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다.
이제 남은 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개정협상’이다. 한·미 FTA 폐기의 권한을 가지고 있는 미국 대통령은 미국 협상팀에 “미치광이” 전략을 쓰라고 지시했다. 전속력으로 두 차가 마주 달려서 핸들을 트는 쪽이 지는 치킨게임의 승자는 언제나 ‘미치광이’다. 나도 끝까지 직진한다면? 그건 파국이고, 이 협상에서는 한·미 FTA 폐기다.
다른 한편 한·미 FTA 폐기는 국민에게 재앙일까? 상품 및 서비스 거래의 규모가 일정하게 위축될 테지만 GDP에 산입되는 경상흑자의 규모가 기준이라면 그건 단정할 수 없다. 반면 투자자 국가 중재제, 네거티브 리스트 방식의 서비스시장 개방 등 국내의 정책에 악영향을 미치는 독소조항들은 사라질 것이다. 이건 축복이다.
최근 발표된 한 여론조사는 “미국이 무리한 요구를 하면 한·미 FTA를 폐기하는 편이 낫다”는 쪽이 더 많다고 밝혔다. 부처님 말씀처럼 “무소의 뿔처럼” 당당해야 한다. 하지만 지난 9일의 한·미 FTA 개정 공청회는 이런 기대에 찬물을 끼얹었다. 서두를 필요가 전혀 없는 우리 정부가 갑자기 10월에 2차 공동위원회 특별회기를 요구하더니 8일 한·미 정상회담 후 청와대와 백악관은 “양 정상은 통상담당 관리들에게 조속히 개선된 협정을 체결하도록 지시했다”고 밝혔다.
이를 충실히 따른 것일까? 인터넷을 통해 단 9일 동안 의견을 접수한 뒤 개최한 공청회는 말 그대로 졸속이었다. ‘한·미 FTA 개정의 경제적 타당성 검토’라는 10쪽짜리 PPT 발표자료에는 기초 통계를 이리저리 조합한 것만 있을 뿐 실제로 개정협상의 영향을 분석한 것은 딱 표 하나였다. 토론은 진행조차 하지 못했는데도 정부는 통상절차법 7조를 이행했다고 선언했다.
이 자리에서 터져 나온 “정권 바뀌어 좋은 세상 올 줄 알았는데…”라는 농민의 푸념은 당연하다. 현재의 태도를 보나, 통상장관의 이력을 보나 이 협상은 미국 요구의 신속한 이행으로 끝날 것으로 보인다. 불행하게도 이건 그저 기우가 아니다.
2017. 11. 13
원문보기_경향신문 오피니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