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하게 어림잡아 50%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우리의 교육시스템에서 소외된 학생의 비율 말이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 신조어와 함께 창의력이니 인공지능과의 경쟁이니 하는 말들이 돌고 있고 이 때문에 대대적 근본적 교육 혁신이 필요하다는 소리가 높지만, 정작 절실한 개혁은 그 하위 50% 이상의 학생들이 소외나 방기되지 않는 교육을 지향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직설로 하자면, 현존의 교육 시스템이 기실 ‘좋은 대학’에 갈 상위 일부 학생을 가려내기 위한 시스템임을 부인할 이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나머지’ 학생들은 왜 교실에 앉아있는 것일까. 그들은 중학교만 들어가도 안다. 이 시스템은 자기와 별 혹은 아무 상관이 없고 자신은 그 상위 몇 %의 들러리일 뿐이라는 점을. 노력을 안 해본 것은 아니지만, 몇십년간 발전하여 튼튼히 굳어진 우리의 대학 입시 교육 시스템의 철통같은 위계구조는 웬만한 개인의 ‘노오력’ 따위로는 어떻게 해볼 수 있는 게 아님을 깨닫고 이내 주저앉는다.
2차 산업혁명은 개념과 수행의 분리라는 테일러주의의 원리를 지향했다. 그래서 소수의 엘리트와 다수 대중의 분리가 요구되었고 전자에게는 과학적 훈련에 기반을 둔 지도력이, 후자에게는 순응성이 당연한 덕목으로 요구되었다. 또 이러한 두 가지 인간형을 길러내는 것이 2차 산업혁명기의 교육시스템이었다. 중간 관리자 화이트칼라는 대학 교육을 받고, 특급 엘리트는 특급 대학을 나와 고시나 유학을 거친다. 나머지 대다수는 블루칼라가 되어 엘리트들의 지시에 따라 노동을 수행한다. 요컨대 일할 사람과 일 시킬 사람을 나누는 것이 2차 산업혁명기의 교육시스템의 중요한 기능이었다. 특히 고도의 압축성장을 거친 한국 사회에서는 이러한 논리가 노골적으로 관철되었고, 그 결과 나타난 것이 현재의 야수적인 입시 경쟁의 교육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도 이렇게 할 것인가? 지금 덮쳐오고 있는 새로운 산업화 물결의 성격을 많은 이들이 ‘초연결성’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정확한 규정은 어렵고 또 무의미한 말이지만, 인간과 사물과 사회와 자연이 이전에 상상하기 힘든 전면적 방식으로 연결을 맺는다는 뜻을 담고 있다. 혁신과 가치창출의 원천은 그 연결망을 어떻게 확장하고 더 빽빽하게 유기화시키느냐에 있다. 중심도 주변도 주연도 조연도 없다. 모두가 모두의 능력과 욕구와 지식을 서로 이용하고 십분 의존해야 한다.
50% 이상의 학생을 수동적 존재로 사실상 방기하는 교육시스템으로는 이러한 산업의 미래를 준비할 수 없다. 핀란드 사람들이 1등을 뽑는 교육이 아니라 뒤처지는 학생이 없는 교육으로 방향을 전환한 중요한 이유이다. 알량한 몇 문제로 경쟁력이니 변별력이니 운운하면서 내 새끼만 살아남으면 된다는 생각을 버리고, 우리의 아이들이 모두 참여하는 지적 공동체를 형성해야 한다.
교육정책을 입안하고 논의하는 이들은 거의 예외 없이 우등생 출신이다. 그러니 이 하위 몇십 %의 학생들이 현재의 학교 교육에서 받게 되는 절망과 모욕감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듯하다. 영어 포기, 수학 포기 나아가 여러 과목을 포기한 학생에게 하루에 여덟 시간을, 그것도 매일같이 의자에 묶어놓고 하나도 이해 못할 내용을 일방적으로 퍼붓는 것이 과연 교육인가. 나는 이것이 체계적, 조직적인 모욕의 훈육이라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군소리 말고 조용히들 엎드려 있어라”라는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살고자 하는 힘이 강한 학생들의 경우 반항과 일탈과 교사 및 학우들에 대한 증오심과 폭력을 드러내는 것이 어찌보면 너무나 자연스러운 방어기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