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리단길’ 부동산 가치는 원래 누구 몫일까?
[‘커먼스’ 시대가 온다] 홍기빈, 박형준 ‘지식공유지대 이커먼스’ 준비위원 대담
“소유는 춤춘다.”
홍기빈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장이 11년 전에 낸 책 제목이다. 아울러 그가 요즘 벌인 일과도 통하는 문장이다.
“이건 내 것, 저건 네 것.” 아이가 세상에 눈을 뜨자마자, ‘소유’ 개념을 배운다. 그래서 다들 익숙하지만, 그뿐이다. 내가 무엇인가를 소유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곱씹어본 이들이 얼마나 될까. 실제로 우리에게 익숙한 ‘소유’ 개념은, 옛 사람들에겐 아주 낯설었다. 요컨대 ‘소유’ 개념은 역사 속에서 이런저런 변화를 겪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다시 왼쪽으로, 마치 춤을 추듯.
그리고 흔히 4차 산업혁명이라고 불리는 흐름 속에서 지난 세기의 ‘소유’ 개념은 새로운 춤을 추고 있다. 소유물과 소유자를 ‘일 대 일’로 연결하고, 소유자에게 배타적인 권리를 주는 방식과는 다른 관계가 나타난다. 온라인으로 공유하는 지식과 정보가 대표적이다. ‘남은 접근할 수 없는 오직 나만의 것’이라는 개념은 설 자리가 좁아지고 있다. 오히려 적극적인 공유를 통해 가치가 불어난 사례가 늘어난다. 사람과 사람의 연결망은 무한대에 가깝게 확대되고, 갈수록 많은 지식과 정보가 그 속에서 공유된다. 연결과 공유가 없었다면, 생겨나지 않았을 가치도 많다. 요컨대 연결하고 공유했으므로 탄생한 가치다.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이 택하는 ‘오픈 소스’ 개념이 좋은 예다. 컴퓨터 소프트웨어의 소스 코드를 공개하고 공유했으므로, 새로운 부가가치가 생겨났다.
“21세기의 오늘을 휩쓸고 있는 새로운 산업혁명의 물결 속에서 우리는 그러한 사적 소유의 너머에 혹은 아래에 공유지(commons)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고, 사적 소유도 또 그 위에 세워진 자본주의 경제도 이 공유지가 없이는 존속할 수도 작동할 수도 없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기 시작하였습니다. 많은 이들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새로운 산업혁명의 물결의 가장 핵심적인 특징을 초연결성(hyperconnectivity)이라는 단어로 집약하여 이야기합니다.”
홍 소장과 박형준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연구원이 지난해 ‘지식공유지대 e-Commons(이커먼스)’를 창립하며 발표한 글 가운데 일부다. ‘지식공유지대e-Commons’란, “e-commerce(이커머스)의 시대에서 e-commons(이커먼스)의 시대로”라는 구호를 내걸고 지식과 정보를 무료로 공유하는 플랫폼이다. 홍 소장과 박 연구원이 낸 책들이 무료로 공개돼 있다. 누구나 pdf 파일을 내려 받아서 전자책 리더로 읽을 수 있다.
그들은 ‘지식공유지대 이커먼스’ 준비위원으로 자신을 소개한다. 신자유주의를 비판하고, 자유무역협정(FTA)의 그림자를 지적하며, 복지국가를 연구했던 그들은 앞으로 ‘지식공유지대 이커먼스’ 활동에 전념할 계획이다. ‘커먼스(commons)’, 그러니까 ‘공유지’의 가치를 일깨우는 활동이다. 먼저 지식과 정보처럼 손으로 만질 수 없는 영역을 공유하는 활동으로 시작한다. 지적재산권에 반대하는 카피레프트 활동과도 통한다. 하지만 그보다 폭이 넓다. 예컨대 부동산 가치 역시 ‘커먼스’ 운동의 영역이 될 수 있다. 한국에선 조금 낯설지만, 외국에선 이미 뿌리가 박힌 활동이다. 미셸 바우엔스(Michel Bauwens), 데이비드 볼리에(David Bollier) 등이 주도한 ‘P2P 커먼스 재단'(P2P Commons Foundation)이 대표적이다. ‘P2P'(peer to peer)란, 개인과 개인의 직접 연결을 뜻한다. ‘중개자’ 역할을 하는 플랫폼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뜻. 따라서 ‘P2P 커먼스’ 운동이란, 중개자를 거치지 않는 공유 운동이다.
홍기빈, 박형준 준비위원 역시 ‘P2P 커먼스 재단’과 연계했다. 그들은 미셸 바우엔스, 데이비드 볼리에 등의 저술을 번역해서 소개하는 한편, 독자적인 연구와 활동도 할 계획이다. 그들의 저술 및 연구 결과는 <프레시안>을 통해서도 발표된다.
홍기빈, 박형준 준비위원을 최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그들은 왜 ‘P2P 커먼스’ 운동을 하게 됐나. 그 운동은 한국 사회를 어떻게 바꿀 수 있나. 이런 이야기를 간단히 정리했다.
‘주식회사 모델’에 기반한 정치 구도, 이젠 낡았다
홍기빈 : 20세기의 정치 모델은 지금 현실과 맞지 않는다고 봤다. 아울러 그 대안에 대해서도 오래 생각했다.
요즘 새로운 산업혁명에 대해 말이 많다. (홍기빈 준비위원은 ‘4차 산업혁명’이라는 표현에 동의하지 않는다.) 여기서 잠시, 지난 산업혁명을 돌아보자. 증기기관이 나오면서, 1차 산업혁명이 있었다. 내연기관과 전기가 사용되면서 2차 산업혁명이 있었다.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주식회사’ 모델은 2차 산업혁명이 시작되면서 널리 자리 잡았다. 그 전에는 합자회사가 일반적이었다. ‘주식회사’가 확산되면서, 거대한 자본을 모아서 투자하는 길이 열렸다. 국가가 소유한 기업이 등장한 것도 이 시기다. 그 결과, 1차 산업혁명 시기엔 볼 수 없었던 대규모 공장이 곳곳에 생겨났다.
이는 다시 정치와 의회의 변화로 이어졌다. 이른바 총자본과 총노동의 구도다. 산업자본은 은행 등 금융자본과 연계했다. 수만 명이 한 공장에서 일하면서,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그리고 산업 전체를 아우르는 산업별 노동조합(산별노조)가 등장했다. 이렇게 형성된 총자본과 총노동은 각각 자신들의 정치적 대표를 의회에 보냈다. 20세기의 정치 모델은 다양했지만, 기본적으론 이런 틀로 설명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런 구도가 지금도 타당한가. 아니라고 본다. 총자본과 총노동 구도에 기반 한 정당 정치로는 담아낼 수 없는 영역이 넓어졌다. 해적당, 포데모스(PODEMOS, 2014년 창당한 스페인의 풀뿌리 진보정당) 등 새로운 정당이 생기는 것도 그 방증이다.
21세기 현실에 어울리는 정치 모델은 무엇일까. 기존 정당 구도가 담지 못했던 공론 장을 어떻게 활성화할 수 있을까. 새로운 현실에선 어떻게 법과 정책을 만들어야 할까. 이를테면 에너지 전환과 전기요금 인상 문제는 공론 영역에서 어떻게 토론해야 할까. 이런 고민을 하면서, 정책 플랫폼을 구상했다. 지식과 정보를 공유하면서 정책을 토론하는 플랫폼이다. 그 뒤, 2016~2017년 촛불 집회를 겪었다.
외국에선 거대한 사회운동을 거치면서 새로운 정당이 생기곤 한다. 반면, 한국은 촛불 집회의 열기가 더불어민주당으로 수렴됐다. 박근혜가 대표하는 수구 세력은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다는 게 촛불 시민의 요구였다. 수구 세력을 반대하는 걸 넘어서는 목소리는 잘 나오지 않았다.
그걸 보면서, 정책 플랫폼보다 ‘P2P 커먼스’ 운동으로 관심을 틀었다. 지금 우리 현실을 보자. 우리 삶에 꼭 필요한 것들인데, 기업과 국가는 도저히 제공하지 못하는 게 참 많다. 예컨대 ‘좋은 교육’, ‘믿을 수 있는 노후’ 같은 걸, 기업이 상품으로 내놓을 수 있나. 정부가 복지를 통해 제공할 수 있나. 아니다. 잘 살펴보면, 우리 삶에서 이런 영역이 아주 넓다. 시장과 국가가 아닌 ‘커먼스’ 영역이 확대돼야 한다.
신자유주의 나쁘니까, 다시 국가?
박형준 : 우리가 오랫동안 신자유주의를 비판했다. 그런데 신자유주의가 나쁘니까, 다시 국가 중심으로 돌아가자는 식도 잘못이다. 시장의 폭력성에 대한 대안이 국가 소유 옹호일 수는 없다. 국가 소유와 개인 소유를 넘어서는 대안, 바로 ‘커먼스’에 주목해야 한다.
홍기빈 : 역사적으로 보면, 국가 소유와 개인 소유가 오히려 특이한 일이다. 인류 역사에선 ‘커먼스’가 더 보편적이었다.
예컨대 우리는 땅을 소유하는 개념에 익숙하다. 네덜란드 사람들이 17세기에 미국 맨해튼 섬을 원주민인 인디언으로부터 사들였다. 원주민들은 그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땅은 누가 떼어가서 주머니에 담아둘 수 없지 않는가. 그런데 네덜란드 사람들은 맨해튼 섬을 산 뒤 그 주변에 울타리를 쳤다. 원주민들에겐 ‘배타적 소유’ 개념이 없었던 게다.
15세기까지만 해도, 영국 농민들에겐 ‘이 땅이 누구 것이냐’라는 질문이 무의미했다. 그런데 15세기 말이 되면서, ‘울타리 치기'(인클로저)가 벌어졌다. 영주들이 농민을 몰아내고 땅에 울타리를 쳤다. 그리고 땅과 자기 자신을 ‘일 대 일’로 대응시켰다. 이후 등기제도가 생기면서, 모든 땅에는 주인이 있다는 생각이 확산됐다.
이런 통념은 점점 강화됐다. 그러니까, 무리가 생긴다. 예전에 ‘나가사키 짬뽕’이 삼양에서 출시됐다. 그런데 일본 나가사키 현 의회에서 삼양 측에 항의했다. ‘나가사키’라는 브랜드를 함부로 썼다는 게다. 얼마나 황당한 모습인가. ‘나가사키 짬뽕’의 브랜드 가치를 누가 소유할 수 있나. 나가사키 현에서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만 갖고 있는 건가. 아니다. 그 지역 조상부터, 그걸 열심히 먹고 홍보한 이들까지 두루 ‘나가사키 짬뽕’의 브랜드 가치를 키우는데 기여했다.
‘브랜드 가치’에 무리하게 ‘울타리 치기’를 하다 보니, 생겨난 일이다.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들인데, ‘울타리 치기’를 너무 세게 하면 얻을 수 없는 게 참 많다. 예컨대 ‘육아’ 서비스가 그렇다. 아이 키워본 사람들은 다들 안다. 갑작스런 일이 생겨서, 딱 한 시간만 아이를 맡겼으면 싶은데 도무지 방법이 없었던 경험. 이런 서비스를 기업이나 정부가 제공할 수 있을까. 아주 어렵다. 반면, 건강한 공동체가 있다면 쉽게 해결할 수 있다.
이런 예는 어떤가. 요즘 반려동물 키우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추운 날이면, 동물 때문에 난방을 한 채로 나가야 한다. 그래서 난방비 부담이 크다. 만약 반려동물을 믿고 맡길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어떨까. ‘일 대 일’의 소유관계에만 갇힌 상상력으론, 이런 문제를 풀 수 없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는 대부분 ‘일 대 일’ 소유관계로 묶기 어렵다. ‘다 대 다’의 네트워크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결국 ‘커먼스’를 확대해야 한다.
블록체인, 커먼스 운동에게 기회다
박형준 : ‘커먼스’란, 크게 세 가지로 돼 있다. 첫 번째는 인류 공동의 자산이다. 대표적으로 자연을 꼽을 수 있다. 인류가 집단적으로 만든 지식과 관습, 지혜 등도 포함된다. 두 번째는 다양한 공동체다. 세 번째는 거버넌스 시스템이다. 일종의 협치 구조다. 이런 세 가지가 모여서 ‘커먼스’를 이룬다.
‘커먼스’는 원래 있었다. 예컨대 마을 공동체를 떠올려 보라. 그런데 국가와 시장이 각각 침식했다. 왕이 사유화하고, 공화정 국가가 소유하며, 다시 민영화를 통해 개인 사유물이 됐다. 이런 흐름에 맞서는 게 ‘P2P 커먼스’ 운동이다.
이른바 민영화를 통해 국가 자산을 개인에게 돌리는 흐름이 있었다. 신자유주의 기조 속에서 벌어진 일이다. 많은 이들이 비판했는데, 대안은 모호했다. ‘P2P 커먼스’ 운동이 잠재적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본다. 국가의 역할을 부정하는 게 아니다. ‘P2P 커먼스’ 운동의 관점에서 국가는 파트너다. 새로운 사회에서 국가는 ‘파트너 스테이트(동반자 국가)’가 돼야 한다고 본다.
2000년대 이후 다양하게 진행된 정치 및 사회운동은 대부분 국가와 시장에 속하지 않는 영역에서 진행됐다. 앞서 거론한 해적당, 포데모스, 그리고 그리스의 시리자(SYRIZA, 급진좌파연합) 등도 마찬가지다. 이들 풀뿌리 운동은 ‘P2P 커먼스’ 운동과 맞닿는 면이 넓다.
기술 혁명 역시 마찬가지다. 지식을 공유하는 위키피디아를 보라. 깃허브(GitHub, 소프트웨어 소스 코드를 공유하는 플랫폼)도 좋은 예다. 소스 코드를 무료로 개방한 리눅스 운영체제는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소스 코드를 공유하면서 상업적 이용을 허용하는 모델도 입증됐다. 그러니까 소스 코드를 개방한 생태계에서도 기여에 따른 수익을 낼 수 있다. 소프트웨어 개발에 기여한 이에게 단지 명예만이 아니라 수익으로도 보상한다. 공유경제에서도 경제적 인센티브가 작동할 수 있다. 공유 자산을 활용해서 부가가치를 만들어낸 데 대한 보상이다.
‘메이커 스페이스’ 운동도 마찬가지다. ‘3D모델 파일’을 온라인에서 내려 받으면, 누구나 ‘3D프린터’로 원하는 물건을 만들 수 있다. 역시 ‘P2P 커먼스’ 운동과 맞닿아 있다.
최근 주목받는 ‘블록체인’ 기술 역시 관계가 있다. 블록체인은 모든 이용자에게 거래 내역을 보여주고, 거래 때마다 이를 대조하게끔 한다. 누구나 열람할 수 있고, 함부로 위조할 수 없는 거래 장부인 셈이다. 이는 ‘P2P 커먼스’ 운동을 위한 인프라가 될 수 있다. 공유 자산을 관리하고, 활용해서 부가가치를 만들어내는 과정에 누가 어떻게 기여했는지를 투명하게 파악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분배해야 하는지도 논의하기 쉽다. 블록체인 기술은 속도가 늦고, 비용이 비싸다는 한계 때문에 시장에서 마땅한 쓸모를 찾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P2P 커먼스’의 관점에선 새로운 기회다.
부동산 가치 상승, 왜 건물주와 가게 주인이 독점하나?
홍기빈 : ‘커먼스’ 이야기를 주로 했는데, 이번엔 왜 ‘P2P’인지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앞서 이야기했듯, ‘P2P 커먼스’란 개인이나 집단의 필요를 기업 혹은 정부가 아닌 사회적 관계 속에서 조달하자는 운동이다. 그런데 이런 사회적 관계가 과거와 달라졌다. 지난 산업혁명의 산물, 그러니까 석유, 전신 및 전화 등은 중앙집권적인 구조였다. 에너지, 미디어가 모두 그런 식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산업혁명은 에너지와 미디어 체계를 모두 분권 형으로 이끈다. 그러니까 ‘P2P’ 방식이다.
박형준 : 지식도 마찬가지다. 고대 사회에선 제사장이 권력 핵심이었다. 근대 이후엔 지식을 가진 전문가, 시험으로 뽑힌 관료가 권력 핵심이다. 그런데 인터넷에서 ‘P2P’ 방식으로 지식을 주고받는 지금은 전문가 권력이 깨지고 있다. 전문가, 교수가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방식은 이제 안 통한다. 교수가 틀린 이야기를 하면, 학생들이 그 자리에서 위키피디아를 검색한다. 그리고 바로 “선생님, 그건 아닌데요”라고 한다.
홍기빈 : ‘P2P 커먼스’의 눈으로 보면, 다르게 비치는 게 많다. 예컨대 부동산 문제도 그렇다. 가게 주인끼리 주고받는 권리금을 보자. 권리금은 정체가 뭘까. 시간적인 누적과 공간적인 연결의 결과라고 본다. 그게 꼭 가게 주인의 몫이어야 할까. 아니라고 본다. 가게 주변의 도시계획, 손님들의 입소문 등 다양한 요소가 작용했다.
요즘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개발과 임대료 상승 때문에 원래 살던 이들이 내몰리는 현상) 논란이 뜨겁다. 마찬가지다. 예컨대 ‘망리단길’이 인기를 끌면서, 서울 망원동의 부동산 가치가 올랐다. 그게 꼭 건물주의 몫이 돼야 하나. 역시 아니다. 그 거리의 예쁜 카페 사진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린 이들도 한몫했다. 가게 주인, 손님, 지역의 다른 수많은 사람들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준 결과다. 아울러 지방자치단체의 정책 등 정치적 요소도 있다.
이처럼 어떤 이익의 소유자를 ‘일 대 일’로 연결 짓기가 힘든 현상이 도처에 있다. 학술 논문 플랫폼인 디비피아가 이용 요금을 올리면서, 최근 논란이 됐다. 대학들이 논문 구독을 끊어버린 게다. 그런데 논문을 디비피아라는 상업적 플랫폼으로 발표해야 하나. 많은 논문이 정부의 연구비 지원을 통해 만들어진다. 게다가 논문에 담긴 지식은 인류 공동 자산에 빚지고 있다. 선행 연구 없이 새로운 연구가 가능할 리 없다. 그렇다면 논문으로 생겨난 이익은 누구 몫이라고 봐야 하나. ‘일 대 일’ 대응 논리에 따른 소유 개념으로 접근할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우리는 지식과 정보를 ‘P2P 커먼스’ 관점으로 접근하려고 한다. 일단 우리가 쓴 책과 글들을 무료로 공유하기로 했다. 전자책 공유 플랫폼을 만든 건 그래서다.
- 다음은 지식공유지대 이커먼스 설립 취지문이다. ‘P2P 커먼스’ 운동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다음은 지식공유지대 이커먼스 설립 취지문이다. ‘P2P 커먼스’ 운동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자본주의의 기초가 되는 사적 소유는 소유자 개인에 의한 소유 대상의 배타적 전유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인간 세상의 만사만물을 조각조각 쪼개어 모두 소유자를 정해놓고 가격표를 붙인 뒤, 그 액수만큼의 화폐를 주고받는 가운데에 생산과 분배와 소비가 조직되도록 하는 것이 자본주의 경제의 원리입니다. 이러한 자본주의 경제는 산업혁명을 낳아 인류 역사상 미증유의 생산력 증대와 물질적 풍요를 가져왔으며, 20세기 중반 절정에 달했던 2차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이러한 자본주의 경제의 원리는 산업 사회를 조직할 수 있는 최상의 아니 유일한 절대적 원리로서 널리 받아들여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21세기의 오늘을 휩쓸고 있는 새로운 산업혁명의 물결 속에서 우리는 그러한 사적 소유의 너머에 혹은 아래에 공유지(commons, 커먼스)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고, 사적 소유도 또 그 위에 세워진 자본주의 경제도 이 공유지가 없이는 존속할 수도 작동할 수도 없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기 시작하였습니다. 많은 이들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새로운 산업혁명의 물결의 가장 핵심적인 특징을 초연결성(hyperconnectivity)이라는 단어로 집약하여 이야기합니다. 인간과 물질과 사회와 자연이 연속적으로 전방위적으로 새로운 연결을 형성하는 가운데에서 새로운 가치와 새로운 혁신을 계속 창출해내는 것을 새로운 기술-사회 패러다임의 본질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그래서 울타리를 치고 자물쇠를 달아 ‘누구의 것’이라고 명토박을 수 있는 것만으로 이러한 유기적이고 전면적인 연결을 만들어 낼 수는 없습니다. 눈에 잘 보이지는 않지만, 인간과 사물과 사회와 자연이 함께 어우러져 함께 만들어내는 유형 무형의 세계가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리고 사적 소유도 또 온갖 영리 활동도 모두 이 보이지 않는 세계를 바탕으로 하여 비로소 존재하고 번성할 수 있는 것이라는 깨달음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 ‘보이지 않는 세계’를 부르는 이름이 바로 공유지입니다. 누구도 독점할 수 없고 독점해서도 안 되는 것들. 함께 공유할수록 더 많이 나눌수록 더욱 커지고 더욱 풍성해지는 것들. 그리고 이러한 세계에 오롯이 속하는 전형적인 물건이 바로 지식입니다. 현대 사회와 경제에 있어서 지식과 정보가 핵심적인 열쇠를 쥐고 있다는 이야기는 오래 전부터 있어왔습니다만, 그러한 의미와 중요성에 걸맞는 지식과 정보의 새로운 존재 양식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와 혁신의 시도는 많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 답이 바로 공유지에 있다고 믿습니다. 더 많은 이들이 더 많은 지식을 공유하지 않는다면 개개인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조차 가치를 가질 수 없습니다. 시의 운율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사회에서 김소월이나 엠시투팍이 다시 나온들 무슨 소용일까요? 드론과 3D 프린터를 쓸 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세상에서 기술 벤처 산업이 얼마나 번성할 수 있을까요? 현행 헌법의 구조와 문제점을 이해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사회에서 누군가 혁신적인 개헌안을 마련한다 한들 무슨 가치가 있을까요? 15세기 구텐베르크의 인쇄 혁명은 인류 문명사에서 이러한 지식의 공유를 촉발시켰던 거대한 사건이었습니다. 그전까지 지식과 정보는 전파 수단이 필사와 목판 인쇄에 국한되어 있었기에 운 좋게 그 원본 혹은 복제본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극히 소수의 사람들 사이에서만 유통되었고, 그 결과 폐쇄적인 소집단 속에 갇혀 신비화되었으며 검증이 불가능하여 진보가 정체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대량으로 제작된 책들을 독서 대중들(reading public)이 저렴하게 구해볼 수 있게 되면서, 유럽 전체의 지식인들은 하나의 지식 공유지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이 서적의 대량 유통을 기초로 한 지식 공유지의 형성이야말로 르네상스 이후 과학 혁명과 계몽주의로 이어지는 서양 문명사의 가장 중요한 추동력의 하나임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이 대량 인쇄술은 지식과 정보가 생산되고 유통되는 새로운 형태와 장르들까지 만들어 냈습니다. 이미 17세기에 마드리드의 시민들은 세르반테스의 소설을 읽으며 걸어다녔고, 18세기의 영국인들은 다니엘 디포우라는 걸출한 저널리스트를 알게 되었으며, 몇십 년 후 미국인들의 머릿속에서는 토머스 페인이 쓴 팸플릿들이 폭탄처럼 작렬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디지털 혁명과 클라우드의 출현으로 15세기의 구텐베르크로 시작된 지식 공유의 혁신이 새로운 기술적 단계로 들어섰다고 믿습니다. 매체의 생산은 그야말로 한계 비용 제로의 단계로 들어섰고, 유통의 공간적 장벽들은 완전히 사라졌으며, 월드와이드웹이라는 결코 마르지 않을 거대한 지식 생산의 원천까지 나타났습니다. 이에 전통적인 종이 매체의 틀에 의존하던 미디어 쪽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거대한 혁명적 파괴와 창조가 진행되어 왔습니다. 배타적인 사적 소유와 유료화에 기반한 전통적인 비즈니스 모델에 집착하는 미디어는 이제 거의 없습니다. 지식과 정보라는 것이 아무 장벽없이 더 많은 이들이 더 많이 나눌수록 더 풍요해지고 가치가 높아지는, ‘공유지’에 속한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제 그러한 공유지의 확장과 혁신이 도서 출판 분야에서 일어나야 할 때라고 믿습니다. 종이책의 독자적 가치를 부정하는 것도 아니며, 종이책이 소멸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저자의 ‘저작물’이 오롯이 종이책이라는 물리적 형태에 담겨 그 생산 비용을 지불한 개인에게 1대1로 전달이 되어 그 개인의 책장에 배타적으로 소유되는 이 15세기에 발명된 유통의 형태로는, 21세기의 산업 사회와 민주주의가 요구하는 종류의 지식을 모두 담아내기에 턱없이 부족하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기왕에 나와있는 저작물들을 공유지로 옮겨올 뿐만 아니라 이러한 지식 공유의 정신에 공감하고 동참하는 이들과 함께 새로운 책들을 만들어 낼 것이며, 완전히 자유롭게 모두와 공유하고자 합니다. 지식의 공유는 우리 모두를 함께 깨어나게 합니다. 몇 천 년 간 사람들의 이성과 영혼을 미혹하고 억누르던 주술과 몽매가 불과 몇 백 년 아니 몇 십 년 만에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우리는 무수히 보았습니다. 21세기의 산업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여러 도전들은 서적과 자료를 다룰 줄 아는 ‘전문가’와 그렇지 않은 ‘일반인’의 구별을 넘어서 모두가 함께 생각하고 모두가 함께 깨닫고 모두가 함께 움직일 때에만 극복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이커머스(e-commerce)를 넘어서 이커먼스(e-commons)로 지식의 공유지를 마련하고자 하는 저희들의 노력에 힘을 합쳐 주십시오. |
2018.02.28
성현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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