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인의 경제시평] 트럼프 사용 설명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목요일 수입 철강에 25%, 알루미늄에 10%의 관세를 무기한 부과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번 조처는 1962년의 무역확대법 232조(원래는 전쟁기를 염두에 둔 조항)를 적용했다. 아마도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했던 가트의 세이프 가드 조항을 이미 세탁기와 태양광 소자와 모듈 부문에 써버렸기 때문일테다.
트럼프 대통령은 적국의 철강으로 우리 무기를 만드는 상황을 상상해 보라고 선동했는데, 이는 별로 새로울 것도 없는 또 하나의 ‘가짜뉴스’다. 작년에 대미 철강 수출 1~4위를 차지한 캐나다·브라질·한국·멕시코는 누가 뭐래도 적국이 아닌 NAFTA 회원국이거나 동맹국이며 누구나 짐작하는 적국인 중국의 대미 철강 수출 비중은 5% 이하로 떨어진 지 이미 오래다.
딱히 이번 미국 대통령만 그런 건 아니었다. 1970년대 이래 미국의 역대 대통령은 누구나 미국 철강산업을 위한 보호무역조치를 발표했다. 카터나 클린턴, 그리고 오바마도 예외가 아니었다. 하지만 막무가내의 정도와 보호의 강도를 고려한다면 이번 조치에 버금가는 것으론 부시의 철강 관세가 유일할 것이다.
아들 부시 대통령은 2002년에 철강 산업을 ‘세이프 가드’ 한다는 명분으로 8~30%의 관세를 부과했다. 하지만 2005년까지 모든 경제학 논문은 이 조치가 목표로 한, 미국 철강산업의 구조조정은 지지부진했고 결국 여타 미국 산업과 소비자에게 피해를 입혔다고 결론을 내렸다. 부시의 정책을 옹호한 논문은 단 한 편도 없었다. 2002년에 비해 미국 금속산업은 더 쇠퇴했는데 단기간의 이런 보호조치가 빈사의 사양산업을 극적으로 부활시키는 기적을 일으키긴 어렵다. 이번에도 세계 유수의 언론은 일제히 비판의 칼날을 세우고 있다.
2002년 EU와 중국, 일본 등은 부시의 관세를 WTO에 제소하면서 강력한 보복 조치를 예고했다. 미국산 버번, 리바이스의 청바지, 할리 데이비슨의 오토바이는 상징적 대상이었고, 플로리다의 오렌지나 미시간의 자동차는 부시의 정치적 목표를 직접 노렸다.
1년8개월이 지난 2003년 11월11일 WTO는 미국이 즉각 관세를 철회하지 않는다면 20억달러 이상의 보복을 허용한다고 발표했다. 결국 부시 대통령은 12월4일 항복했다. 당시 미국은 테러전쟁을 선포할 만큼 유일 헤게모니를 누리고 있었고 철강산업도 지금보다는 훨씬 나았다.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든 트럼프의 이번 결정은 거의 전적으로 중간선거에서 러스트벨트의 지지를 끌어내기 위한 것으로 판명될 것이다. 트럼프는 이런 정치적 목적을 극대화하기 위해 “무역전쟁은 쉬운 게임이며 만일 상대가 약삭빠르게 움직이면 무역을 중단하면 그만”이라고 기염을 토했다.
미국 대통령은 지금 전 세계를 대상으로 ‘최대의 압박(maximum pressure)’을 실천하고 있다. EU와 중국은 2002년의 경험을 거울 삼아 되도록 빠른 WTO 결정을 요구할 것이며 동시에 미국이 관세를 철회하더라도 그때까지의 피해를 보상받으려고 할 것이다.
세계가 성공적으로 공동의 보조를 취한다면 이 게임은 중간선거 직후(트럼프의 성공 여부와 관계없이) 트럼프의 관세 철회로 끝이 날 것이다. 트럼프의 힘은 ‘저 미친 놈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차라리 먼저 달래는 게 나을 것’이라는 상대의 태도에서 비롯된다. ‘벼랑 끝 전술’의 핵심이 바로 이것이다.
실제로 트럼프는 취임과 동시에 세계 유수의 초국적기업이 연이어 대미 투자를 약속하는 데 대해 “Thank You” 트윗을 날리며 미소를 지었고, 이 전략은 동아시아 순방에서 3000억달러 이상의 경제협력을 얻어내는 정부 차원의 성과도 거뒀다. 트럼프는 세계의 어느 지도자보다도 이른바 ‘청중비용(audiance cost·자신이 한 말에 책임을 져야 하는 정치적 비용)’을 가볍게 여긴다. 이익을 이미 얻었거나, 질질 끌어 봐야 앞으로 이익을 얻을 가능성이 별로 보이지 않으면 바로 말을 뒤집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얘기다. 이는 또한 이미 얻은 이익이 그 후의 협상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통령 당선 직후 삼성이나 LG가 대대적 대미 투자를 약속했지만 트럼프 정부의 세탁기 관세는 이들 기업을 한 치도 비켜가지 않았다.
트럼프 사용설명서는 의외로 간단할지도 모른다. 첫째, 국제규범을 넘어선 위협에 대해서는 당당히 맞서야 한다. 둘째, 그의 요구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면 다른 모든 사안을 포함한 최종 결론 때 그래야 한다. 셋째, 대체로 그 전에 트럼프 패배로 결론이 날 것이다. 트럼프가 능한 ‘벼랑 끝 전술’ 게임은 결의가 큰 쪽이 이기기 마련인데 트럼프는 면전의 환호가 사라지면 겁쟁이라는 진면목을 바로 드러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다른 모든 독재자들이 그러했듯이….
2018. 03. 05
정태인 | 칼폴라니 사회경제연구소장
원문보기_경향신문 오피니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