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유럽 중도 좌파의 몰락과 새 경제학
사회민주당이나 노동당 등의 이름이 붙은 유럽의 중도 좌파 정당들이 10년째 내리막을 걷고 있다. 얼마 전 선거에서 독일 사회민주당의 득표율은 20%에도 미치지 못하여 150년 역사에서 최악의 결과를 냈다. 이탈리아의 민주당도 최근 선거에서 19%의 득표율로 군소 정당과 비슷한 처지로 점점 밀려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거의 전 유럽적인 차원일 뿐만 아니라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추세적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언론에서 주로 ‘좌우 포퓰리즘 세력의 득세’라는 식으로 제목을 뽑고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주목을 끌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포퓰리즘의 발호는 하나의 증후에 더 가까우며, 우리 시대가 닥치고 있는 진정한 위기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같은 동전의 다른 면인 중도 좌파의 몰락이라는 문제 설정으로 바라보는 것이 더 유리하다. 20세기 중반 이후 경제학과 경제 정책에는 새로운 삼위일체가 나타난다. 경제 성장-자본 축적-완전 고용이라는 세 가지가 그것이다. 그 전까지는 세계 경제에서 자유무역과 금본위제만 준수된다면 경제란 자기조정 메커니즘에 의해 계속적인 균형 상태를 스스로 찾아가는 것이라고 여겨졌지만, 1930년대 대공황을 겪은 이후 그러한 19세기의 신앙은 근본적으로 무너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회는 노자(勞資) 갈등에 휘말리면서 대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사람들은 당시의 위기를 자본의 요구인 끊임없는 자본 축적과 노동자들의 최대 관심사인 일자리의 공급 즉 완전 고용이라는 두 가지의 목표가 정면으로 충돌하는 데에 원인이 있다고 보았다. 보수파는 자본 축적을 위하여 높은 실업을 감내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극좌파는 자본이라는 것 자체를 쓸어버려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양측의 충돌은 한없는 사회의 분열과 혼란을 가져왔다. 자본 축적과 완전 고용을 모두 충족시키는 방법은 없을까? 처음에 시도되었던 것은 전쟁과 제국주의 팽창이었지만 이 방법 또한 2차 대전이라는 참극만 낳고 말았다.
20세기 후반의 중도 좌파는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서 출현한다. 자본 축적과 완전 고용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모두 달성하여 노동과 자본의 역사적 타협을 가능케 하는 유일한 방법은 경제 성장이었다. 두 가지가 서로 배타적인 계급투쟁으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돕는 호순환의 상승 작용 관계로 연결시켜 경제 성장을 낳는다는 것이었다. 이 삼위일체를 통하여 번영과 평화와 사회의 통합과 민주주의를 모두 추구한다는 것이 중도 합의의 가장 중요한 내용이었다. 그 역점을 시장의 역동성과 기업의 자유에 두느냐 평등한 분배를 통한 사회의 강화에 두느냐에 따라 중도 좌파/우파의 차이가 있었지만, 어느 쪽이든 그 삼위일체가 산업사회를 관리하는 유일의 매뉴얼이라는 믿음을 갖는 데에는 차이가 없었다.
21세기에도 이러한 삼위일체는 작동하고 있는가? ‘고용 없는 성장’이라는 말은 어느 나라에서나 하나의 ‘뉴노멀’이 되어 버렸다. 경제 전체의 침체에도 아랑곳없이 주식시장과 각종 자산 시장이 펄펄 끓어오르는 ‘자본 축적’ 또한 2010년대를 전후하여 너무나도 익숙한 현상이 되었다. ‘완전 고용’은 여전히 정책 목표로서 공언되고 있기는 하지만 그 내용은 옛날과는 완전히 바뀌었다. 1960년대의 완전 고용은 남성 한명이 일하여 온 가족을 먹여 살리는 ‘가족 임금’과 평생 고용 및 각종 복지 및 수당을 의미했지만, 지금은 아무런 수당도 복지도 없이 언제 잘릴지 모르는 월급 150만원짜리 일자리만 늘어나고 있다.
그래서 그 삼위일체의 경제학 위에 성립한 중도 좌파가 오늘날 겪고 있는 위기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대단히 근본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 혁신에 필요한 것은 경제 성장과 자본 축적과 완전 고용이라는 것을 종래의 틀과 전혀 다르게 이해할 수 있는 근본적으로 새로운 경제학의 수립이다. 경제 성장, 자본 축적, 완전 고용이라는 이 세 개의 항들을 각각 그 밑바닥부터 철저히 다시 연구하여 지금의 현실을 정확히 반영하도록 재구성하는 경제학이 필요한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이러한 삼위일체의 해체와 재구성이야말로 1930년대의 케인스와 칼레츠키 등의 대안적 경제학을 마련한 이들이 했던 작업의 핵심인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지극히 이단적이고 지극히 파격적인 새로운 경제학적 사유에 눈과 귀를 여는 것, 그래서 새로운 산업사회의 청사진을 밑바닥부터 마련하는 것이 중도 좌파의 유일한 회생의 길이다.
2018.03.09
홍기빈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장
원문보기_경향신문 오피니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