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 핏빛 제주, 누가 마을 공동체를 망가뜨렸나

 

핏빛 제주, 누가 마을 공동체를 망가뜨렸나

[기고] 제주 4.3의 생환과 마을의 운명

 

| 이병천 칼폴라니사회경제연구소 이사장

 

오늘날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제주는 무엇일까.

보통 한국인에게 비치는 제주는 아마 ‘관광의 섬’이 아닐까. 큰 마음 먹어야 가던 제주는 1년에 1600만 명 이상이 방문하는 유수의 관광 및 휴양지역으로 변했다. 제주행 관광객이 많아졌다는 것은 나쁜 소식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 중 얼마나 많은 이들이 제주의 주요 관광명소(여기에는 제주국제공항도 포함된다)가 4.3 집단학살지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관광지에 배어 있는 4.3의 상처와 슬픔에 대해 얼마나 깊이 이해하고 공감하고 있을까.

또한 ‘관광의 섬’ 제주라고 하는 것이 김대중 정부 시기 본격적으로 추진된 제주개발계획으로서 국제자유도시 건설 사업의 산물이었음을, 대대적인 규제 완화 및 공유지의 사유화와 토지 수용, 토지 투기를 동반하며 진행되었음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나아가 2000년 4.3 특별법 제정을 거쳐 2005년 제주가 ‘세계평화의 섬’으로 지정되었음에도 평화의 섬으로서의 제주의 실상이 투기적 개발주의와 해군 군사기지화의 정치경제에 의해 포섭되었음을 읽고 있는 깨어있는 시민이 얼마나 될까.

5.18이 오래동안 광주에 갇혀 고통받았듯이, 4.3 또한 그래왔다. 4.3은 제주를 넘어 전국화되고 세계화되어야 한다.

4.3은 슬픔이다. 4.3의 슬픔은 대한민국의 슬픔이다.

4.3은 평화다. 4.3의 평화는 대한민국의 평화다.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이 파묻힌 진실을 밝혀내고 4.3의 슬픔을 치유하고 평화로 나아가는 발걸음에 힘을 모아야 한다.영원히 잊지말고 평화와 인권의 가치, 화해와 상생의 정신을 함께 공유해야 한다. 이를 위해 4.3특별법 개정안이 조속히 처리되어야 한다.

대한민국은 학살의 무덤 위에서 탄생했다. 제주4.3의 비극은 곧 학살의 비극이다. 이승만 정권과 미국의 ‘합작’이 저지른 무고한 양민의 대량학살의 비극이다. 그러나 이 비극은 동시에 마을공동체 붕괴의 비극이기도 하다.둘은 동전의 양면이다. 이승만 정권의 초토화 작전이 수행된 4개월 동안, 제주도 중산간 마을(해안지역과 산악지역 중간에 있는 목장초원지대)주민에 대해 참혹한 대량학살이 자행되고 대부분의 마을이 불에 타고 소개(疏開)되었으며 이로써 마을공동체가 완전히 붕괴되었다.

6.25전쟁 기간에도 예비검속된 4.3 구속자나 귀순자에 대한 학살이 이어졌다. 피의 학살과 극우반공주의의 광기는 1954년 9월 한라산 금족령이 해제되기까지 무려 7년여에 걸쳐 지속됐다. 서사시 ‘한라산’을 쓴 이산하 시인은 “공동체를 잃었던 제주의 존재 자체가 기적”이라고, 그렇게 무너졌던 제주가 4.3 이후 지금까지 존재하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고 말한 바 있다. 정녕 맞는 말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 말을 조금 비틀어 이렇게 물음을 던지고 싶다.어떻게 피로 물든 채 처참하게 무너진 제주가 다시 일어 났을까? 4.3 이후 다시 일어선 오늘의 제주는 어떤 제주이며 어떤 새로운 과제를 우리에게 주는가?

잃어버린 핏빛 마을의 재생의 역사는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다시 일어난 마을의 모양새도 이전과 달랐을 뿐더러 마을마다 다양했다. 나는 여기서 4.3 이후 마을의 역사 중 세가지 중요 장면에 대해서 간단히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박정희 시대에 일어난 일이다. 박정희 정권은 지방자치에 관한 임시조치법등을 시행함으로써 신민법(1958)이 보장한 마을재산권을 짓밟고 마을재산을 시군으로 이전시켰다. 이로써 마을주민들은 그들의 총유에 속하는 마을재산권을 박탈당했다. 새마을운동은 이렇게 전통적 마을재산권의 박탈 위에서 진행되었다(☞관련 기사 : “마을재산권 복원기본법 제정을 촉구한다”). 이런 사정은 제주의 경우도 다를 바 없었다. 제주의 경우, 소유권이 박탈된 마을재산은 당시까지 마을공동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던 재산에 한정해도 제주도 전체 공(公)유재산의 약 18%로 추정된다. 상상 이상의 규모다.

둘째, 박탈당한 마을재산권의 환원은 민주화 시대 정부가 해결해야 할 기본과제였음에도 그 의무는 방기되었고 마을 주민들은 개개별별 민사소송으로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해야만 했다. 그런 와중에 필자가 확인한 바로는 놀랍게도 제주만이 도 차원에서 “시군 귀속 리동유재산 환원 처리 지침”(1994년 8월)을 마련해 귀속마을재산 환원조치를 단행했다.

어떻게 중앙정부가, 국회가, 전국의 여타 지자체들이 모두 방기한 일을 제주도만이 할 수 있었을까? 이것은 당시에 4.3 진상규명과 추모 움직임이 진행되고 있었던 사실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역설적으로 4.3비극의 역사가 낳은 강한 공동체적 의식이 이런 일을 가능케 한 것 같다. 유채꽃 축제로 잘 알려진 가시리 마을의 재생도 이 아픈 역사를 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셋째, 1997년 이후 제주 마을공동체는 또 한번 심대한 격변의 시기를 맞는다. 한편으로 4.3 특별법 제정, 정부의 진상보고서 확정, 대통령의 공식사과, 세계평화의 섬 지정, 국가추념일지정 등이 이루어지면서도, 다른 한편 제주국제자유도시 지정, 제주특별자치도 출범, 부동산투자 이민제도 실시 등으로 대대적으로 규제완화와 강제수용, 공동자산의 사유화와 공동목장의 해체, 개발과 부동산투기의 바람이 일어났으며 많은 토지가 중국자본 수중으로 넘어갔다. 더구나 2007년에는 강정마을이 해군기지 건설기지로 확정되고 건설작업이 강행되었다. 이로써 평화의 섬으로서 제주의 상징은 군사기지화 기획과 개발주의에 의해 빛을 잃게 되었다.

4.3은 오랜 세월끝에 대한민국의 역사로 생환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제주가 평화롭지 못하며 주민의 삶의 터전이 불안하게 흔들리는 역설을 보고 있다. 제주의 슬픔은 계속되고 있다. “오늘의 4.3은 강정이다”라는 말이 큰 울림을 준다. 4.3은 끝나지 않았다.

 
 

2018. 04.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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