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경제학의 법고창신을 위하여, 작은 디딤돌 하나
여기서 내가 말하려는 것은 무슨 특별시에 사는 사람들의 특별히 고상하게 잘 먹고 잘 사는 문제가 아니다. 나는 대다수 보통 사람들, 보통 시민들의 소박한 희망, 평범한 내 이웃 여남노소의 간절한 희망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다. 그들은 안정적으로 먹고살기 위해, 그리고 더 나은 삶을 살기(living well) 위해 물질적 필요가 충족되기를 원한다. 함께 같은 배를 타고 가는 시민들의 공동체라면 그무리들의 공공의 일에서 우선적 경제 문제란 구성원들이 육체적 생존은 물론 더 좋은 문화적·정치적 삶의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좋은 삶을 위한 역량을 키울 수 있도록 기본적 시민권으로서 항산(恒産), 즉 실체적 경제의 굳건한 기반을 보장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이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고 했을 때 문제의 경제란 다름 아닌 바로 이것이다.
선량한 보통 사람들이 괜찮은 생업(生業)을 갖고 안정적으로 소득을 얻고 안정적 거주처를 갖고 삶의 현재 필요와 미래 불안에 대처할 기초적 복지와 자산 기반을 보장 받는 사회, 그러면서 단지 더 많은 물질적 재화의 소유와 소비에 매달리거나 내몰리지 않는 사회, 물질적으로 다소 적게 갖는다 해도, 다소간 물질적 불평등이 존재해도 저마다 존엄한 인간과 시민적 주체로서 역량을 키울 수 있는 사회, 그들이 일과 삶의 균형(‘워라밸’)을 되찾아 이웃과, 자연과 유대감을 갖고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 시장가치로는 별 볼 일 없다 해도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갖는 가치의 소중함을 인정할 줄 알고 저마다 좋은 삶을 추구할 수 있는 사회, 이런 정의로운 사회를 갖는 것이 그렇게도 어려운 일인가? 무슨 까닭에 오늘날 우리 시대 다수 보통 사람들, 보통 시민들은 더불어 사는 실체적 경제의 기반을 잃고 이토록 거대한 불평등과 지대 수탈, 부패 비리로 얼룩진 신도금시대와 마주해 ‘프레카리아트’로서 위태로운 각자 도생의 불안의 삶을 살며 떨게 되었나? 숱한 세월 동안 경제학 그리고 경제학으로 밥을 먹고 살아온 사람들, 경제정책가들은 무슨 일을 했나? 자기 조정 시장의 환상을 유포해 온 지배적 경제학은 너무 많은 죄를 지었다. 그러나 책임은 그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시장처럼 보기, 국가처럼 보기 이 두 가지 거대한 미망에서 벗어나 새로운 창조적 다원주의 길을 개척해야 한다.
나는 묻는다. 소박하면서도 얼마든지 다채롭고 풍요로울 수 있는 우리들의 살림살이는 왜 불가능한가. 어떻게 무너진 경제를 다시 일으켜 세워 그것이 있어야 할 제자리에 가져다 놓을 것인가? 경제학이라는 말의 본 뜻, 즉 ‘오이코노미아'(oikonomia, οικονομία) 또는 ‘경세제민'(經世濟民)이라는 말의 참뜻은 보통 사람들의 안정된 살림살이 방도에 대해 절실하게 묻고 그 해답을 찾고자 했던 것이 아니던가? 유능한 경세제민책과 억강부양책으로 특권층의 고삐 풀린 기득권과 무책임 지배 체제를 견제하고 지혜롭게 조율하는 방도를 찾는 것, 보통 사람들이 튼튼한 항산의 기반을 갖게 하고 항산이 있어 항심(恒心)의 덕을 키우며 인근으로서, 시민으로서 좋은 삶을 위한 역량을 키울 수 있는 살림살이와 제도적 조정 방도에 대해, 나아가 민생주의와 민주주의가 공진하며 선순환하는 길에 대해 묻고 답하는 것이 경제학의 본령이 아니었던가.
이전 사람이 한 말이라 해서 이미 지나간 말이라 생각한다면 이는 큰 착각이다. 연암 박지원은 우리에게 “옛것을 본받으며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法古創新)라는 말을 남겼다. 그는 잘 알려진 대로 조선을 망친 독단적 소중화주의와 북벌 도그마와 대결하여 당대 ‘빨갱이’ 사상이라 할 북학의 깃발을 높이 올린 사람이다. 그렇지만 그는 또한 아무리 좋다 해도 옛것, 중국 것을 모방하는 데 급급하지 말라, ‘오랑캐’면 오랑캐답게 “지금 조선의 시를 쓰라”라는 말도 했다. 연암의 깨어 있는 법고창신의 정신은 단지 문예만이 아니라 경제학도 겨냥하고 있다. 오늘날 살림살이 경제학의 새 길은 이 같은 이전 사람의 가르침을 저버리고 달리 열리지는 않을 것이다.
오해하지 말자. 법고(法古)는 결코 고루한 훈고(訓告)가 아니다. 죽은 훈고가 아니라 제대로 살아 있는 법고를 해야 한다. 법고 없는 창신은 위태롭다. 그러나 창신 없는 법고는 어둡다. 법고와 창신은 위태롭다. 그러나 창신 없는 법고는 어둡다. 법고와 창신은 두 바퀴로 공진한다. 법고와 창신의 두 바퀴로 가는 살림살이 경제학은 자페적 독단주의를 단호히 배격한다. 두 바퀴 경제학은 다원적·다중심적 사고가 여는 창조적 혁신의 가능성과 민주적 실험주의를 주창한다. 또한 이 다중심적 실험주의 경제학은 경제의 시공간적 착근성, 국민적·지역적 다양성의 경제학이다. 오늘날 법고창신의 경제학을 도모하는 자는 ‘민족지식인’으로서 새롭게 ‘조선의 경제학’을 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은 편자의 강원대학교 정년을 기념하는 의미로 만들어진 두 권의 책 중 제1권(경제사상과 전환시대 자본주의)에 해당한다. 편자의 청탁 취지는 간단했다. 한국의 지난 경제학 연구 경과와 오늘의 상황을 되돌아보고 타성을 벗어나 한 마디라도 소신껏 법고창신형 발언을 해주기 바란다는 것이었다. 오직 그것일 뿐 나머지는 자유롭게 쓰라는 것이었다. 1부, 2부로 나눈 것은 흐릿한 윤곽이 있었을 뿐 처음부터 계획한 것은 아니었고 입고된 원고의 내용을 보고 정돈한 결과이다. 글쓰기의 자유도가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책의 모양새가 갖추어진 것 같아 다행이라 생각한다.
경제학은 원래 윤리학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그리고 여기에 인류학이 동참해 트리오로 갈 때 경세제민 또는 오이코노미아로서 살림살이 경제학이 비로소 있어야 할 온전한 제자리를 찾을 수 있다. 제1부에서 이야수, 박지웅은 각각 아마티야 센의 역량 중심적 정의론과 사회적 선택론(불가능성 정리)을 가지고, 최정규는 호모 이코노미쿠스를 넘어서는 이타적 협력론을 가지고, 그리고 이병천은 경제문명사의 대륙으로 나아가는 폴라니의 실체적 경제학을 가지고 경제, 윤리, 제도, 문명을 둘러싼 문제들을 논하고 있다. 이어 책의 제2부에서는 현대 자본주의의 전환이 제기하는 여러 도전적 문제군, 그리고 이에 대해 정치경제학의 다기한 대응 양태 및 해법을 보여 주는 글들을 담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의 위기, 자본주의의 공간 생산과 수탈에 의한 축적, 금융 불안정성과 완전고용, 소유와 지배의 분리, 4차 산업혁명과 가치론, 인지자본주의와 기본소득, 세계화의 균열과 트럼프 현상 등의 주제가 2부를 수놓고 있다. 그리고 등장 인물로는 스위지, 하비, 네그리와 하트 등 마르크스적 계열, 포스트케인시언인 민스키, 제도경제학의 선구자인 베블런과 벌리·민즈, 정보경제학과 불평등 연구의 대가인 스티글리츠 등이 위 주제들을 감당하는 주인공 역할을 떠맡고 있다.
이 책에 실려 있는 글들은 우리 경제학의 쇄신과 전환시대 자본주의의 해명을 위해 사이좋게 서로 보완재 역할을 해주면서도, 적지 않은 견해의 차이, 나아가 어쩌지 못하는 대립도 내포하고 있다. 법고창신의 길에 어찌 진통이 없을 것인가. 나는 이렇게 여러 분면에서 보완과 경합을 거치면서 법고창신의 살림살이 경제학의 길이 열리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위태로운 전환의 시대 막막한 길 위에서 아리아리.
《경제사상과 전환시대 자본주의》(이병천 편저), “서장 우리경제학의 법고창신을 위하여, 작은 디딤돌 하나”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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