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인의 경제시평]‘소득주도 혁신성장’의 길

 

[정태인의 경제시평] ‘소득주도 혁신성장’의 길

 

l_20180109010009309000758212012년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은 <리셋 코리아>를 펴냈고, 2017년 칼폴라니정치경제연구소는 <자본주의를 다시 생각한다>를 출간했다. 둘 다 대선을 앞두고 차기 대통령을 위한 정책을 제언할 요량이었다. <리셋 코리아>는 ILO 등의 임금주도 성장전략을 처음으로 한국에 적용하여 구체적인 정책꾸러미를 제시했고, 3~4년이 흘러 현 정부의 정책기조가 되었다. 소득주도 전략의 가장 큰 문제는 혁신 투자가 간접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고(수요 확대에 따른 투자 확대, 이른바 ‘버둔 효과’), 중하층 소득의 증대도 가계부채와 임대료 부담 등으로 직접 소비확대로 이어지기 어렵다는 데 있다. 당장의 경기침체를 막기 위해서는 대규모 투자가 필요한데 여느 정부처럼 건설경기에 의존할 수는 없다. 해서 찾아낸 것이 마추카토의 녹색 혁신투자였는데 대선 일정이 앞당겨진 탓에 부랴부랴 번역을 할 수밖에 없었다.

현존하는 ‘3대 혁신 이론가’로 꼽히는 마추카토는 정부가 시장실패를 보완할 뿐 아니라, 기술혁신이 관련된 경우 새로운 시장을 창출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예컨대 현재 전 세계의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내고 있는 인터넷은 미국 국방부가 주도한 ‘알파넷’을 공개한 결과이다. 4차 혁명이라는 여러 기술들의 발전 방향 하나쯤은 국가가 주도할 필요가 있는데 도로, 주택, 전력, 에너지망 등 모든 인프라를 포괄하고 있는 생태혁신은 모든 면에서 가장 확실한 길이다. 생태 쪽은 시장 실패가 가장 두드러진 분야이긴 하지만 인류 운명을 좌우할 기술이어서 도덕적이기도 하다. 녹색투자 중 아주 간단한 정책에 속할, 건물의 에너지 효율을 진단하고 개선하는 일만 해도 돈도 벌 수 있고 보람도 있다. 하지만 현재 정부의 혁신성장 전략은 온통 규제완화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각 기업들의 절실한 호소와, 아무 제도도 없어야 최고의 효율성이 달성될 거라는 경제학 미신이 결합한 주장이다. 그러나 규제완화 일반과 혁신의 관계에 관한 실증연구는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지난 20년간의 한국 경제사가 실상을 웅변하고 있지 않은가. 특히 지난 9년여간 대통령이 맨 앞에서 소매를 걷어붙이고 줄기차게 전봇대를 뽑고, 대못을 제거했는데 과연 어떤 ‘미래 먹거리’가 생겨났는가? 어쩌면 지난 20년간 정부는 기술혁신이 아니라 ‘지대혁신’만 조장했는지도 모른다.

홍장표 전 청와대 경제수석이 한발 물러나면서 곤경에 빠진(듯한) 소득주도성장 전략을 돌이켜 보자. 작년 최저임금위원회의 결정(16.4% 인상)은 지난 7개월 동안 550여만명의 월급 10만원(연간 총 7조원)을 끌어 올렸다. 재계와 언론, 그리고 일부 학계는 이 정도로 세계 12위, 경상 GDP 1700여조원의 경제가 위기에 빠질 거라고 아우성치며 짐짓 영세 자영업자와 중소기업을 걱정하기 바쁘다. 실증적 근거가 전혀 없지만 이런 난리라면 정책 혼선을 빚은 건 부정할 수 없다. 과연 누구의 잘못일까? 딱 1년 전 “경제 패러다임의 전환”을 선언한 “새 정부 정책 방향”을 들여다보자. 소득주도성장의 첫번째 정책, “가계의 실질 가처분 소득 증대”의 1번 항목에 최저임금이 나온다. 바로 다음 줄에는 “영세 상공인 부담 완화를 위한 일자리안정자금 지원, 카드수수료 인하, 공정질서 확립”이 필요하다고 써 있다.

지난 1년 동안 금융위원회는 카드 수수료를 인하했는가? 공정위는 편의점의 수익 비율을 높이고 하청단가를 조정했는가? 나아가 노동자를 위해 임대료를 규제하고(국토부) 주거급여를 확대(복지부)했는가? 이들 정책으로 종업원 1인당 월 10만원의 부담만 덜어줬어도 현재의 비난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정책실장과 부총리가 대통령이 최종 승인한 정책의 순서와 속도만 조절했어도 소득주도성장 전략의 첫 단추는 제대로 끼워졌을 것이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대통령이 주재하는 ‘소득주도성장특위’에 장관들이 참석해서 자기 부처 정책의 위치와 속도를 확인해야 한다. 정책실장과 부총리는 정책 실행을 점검하고 수석은 차관 수준에서 현실의 정책 혼선을 조정하면 된다. 혁신성장도 마찬가지다. 일단 지난 20년간의 규제완화 정책의 효과부터 검토할 일이다. 상습적인 이데올로기적 비난을 피하려면 마추카토 등 네오슘페터리안들의 정책과 OECD의 “녹색 인프라 투자” 정책에서 확실히 겹치는 부분만 선택해도 된다.

일찍이 올슨이 논증하고 훗날 애스모글루가 실증했듯이 기득권 세력이 협소한 자기 이익을 추구하게 되면, 즉 구조가 딱딱해지면(경화) 그 나라는 결국 망하기 마련이다. 기득권 세력이 ‘개혁’과 ‘패러다임 전환’을 주도한다는 건 나무에서 물고기를 잡으려는 격이다. 이들은 흔히 ‘시장’을 사칭하지만 자본주의 전 역사가 증명하듯이 시장 자체는 스스로 시스템(패러다임)을 전환하지 못한다.

 
 

2018. 7. 23.

정태인 | 독립연구자 · 칼폴라니사회경제연구소

 

원문보기_경향신문 오피니언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