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병 천 KPIA 이사장
지난 세월 지구시민의 삶을 지배했던 시장근본주의 광풍의 기세는 크게 꺾이고 새로운 전환의 시대가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구체제가 물려준 상처는 여전히 깊게 남아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위기를 극복한다는 정책 자체가 새로운 위기를 조장하기도 했습니다. 빚으로 쌓아올린 거대한 거품이 붕괴한 후에도 가진 자들, 강자들의 독식잔치는 결코 끝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먹고 살며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 더불어 좋은 삶을 꾸려갈 수 있는 인간의 경제, 새 민주적, 생태적 사회의 전망은 멀기만 합니다.
우리는 세계적 규모에서 거대한 불평등 상황, 지대수탈에 기생하는 파렴치한 축적방식, 강부자들의 사회적 책임을 면책시켜주는 규제완화의 흐름이 지속되고 있음을 보고 있습니다. 인간의 살림살이 터전의 주춧돌에 해당하는 노동, 토지, 화폐금융, 생산조직의 ‘허구적‘ 상품화 흐름이 지속되고 있으며, 삶의 터전에서 뿌리 뽑힌 대중들은 흩어져 각자도생의 불안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저성장과 불평등의 악순환이 인간의 살림살이와 나라경제의 운행을 극심한 고통 속에 몰아넣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뉴 노멀’이라는 말을 듣곤 하지만 오늘과 같은 저성장과 불평등, 삶의 불안의 악순환은 결코 정상적인 상황이 아닙니다.
한편에서 인간과 자연, 사회와 세계의 허구적 상품화, 다른 한편 이에 대한 보호적 대응들로 나타나는 우리시대 ‘이중운동‘은 새로운 양상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럽 전역과 미국에서 고삐풀린 시장과 손잡은 중도성향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하고 극우 성향 포퓰리즘이 득세하고 있습니다. 이 사조는 최근 복지국가의 모국이라 할 스웨덴에 까지 상륙했습니다. 미중 무역전쟁에서 보듯이, 패권국 미국이 스스로 보호무역주의와 반(反)세계화 애국주의의 선봉에 섬으로써 그간의 초(超)세계화 체제는 길을 잃고 무법적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렇지만 시대변화는 ‘좋았던 호시절’로 돌아가는 것이 미래대안이 될 수 없다는 것도 알려 주고 있습니다.이를 감지하고 제도의 안과 밖에서 보다 나은 인간의 살림살이와 자치, 연대의 삶을 추구하는 창조적 움직임들도 힘차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지역, 나라, 지구촌 등 다중 스케일에서 인간의 경제를 재창조하고 더불어 좋은 삶을 찾아 나가야 할 거대한 전환의 과제와 마주하고 있습니다. 특히 평화의 길에서 어려운 난관을 헤쳐 나가고 있으면서도 사회경제개혁 기획에서 구태를 벗지 못하고 있는 한국의 경우, 폴라니를 사상의 거처로 삼아 그 법고창신(法古創新)을 도모하려는 이들의 어깨는 무겁습니다. 누구보다도 이제 창립기를 지나 새롭게 발돋움하려는 칼폴라니사회경제연구소에서 실로 할 일이 많습니다. 다시 신발 끈을 고쳐 매고 새 걸음을 내딛어야 할 때입니다. 이 연구소의 문은 언제나 활짝 열려 있습니다. 깨어있는 많은 시민들의 아낌없는 비판과 응원, 참여를 기대해 마지 않습니다. 길은 처음부터 있지 않았습니다. 희망을 갖고 함께 손잡고 나아갈 때 새 길이 열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