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 운동으로 새로운 정권이 들어섰지만, 많은 사람들은 현재의 정치권의 모습을 보면서 좌절과 냉소를 느끼고 있습니다. 우선 국가를 구성하는 이들이 소득과 재산, 그리고 그에 따르는 사회적 권력에 있어서 대다수의 사람들과 유리된 최상층으로 구성된다는 점입니다. 최근의 발표에 따르면 20대 국회의원들의 3분의 2는 신고한 재산이 10억을 넘습니다. 가계순자산이 10억을 넘는 비율이 전체 가구의 5퍼센트에 불과하며 게다가 공시지가의 문제 등으로 이들의 실제 재산이 신고한 액수를 크게 웃돌 것이라는 점을 볼 때, 사실상 국회의원들의 대다수는 상위 5%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게다가 직업을 보면 대학교수, 법조인, 관료, 언론인 등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의회는 국민들을 “대표represent”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95%의 서민과 중산층은 누가 대표하나요? 1천만 명이 넘는 노동자와 농민은 누가 대표하나요? 그나마 선출직이 아닌 일반 고위 공직자로 가면 더 합니다. 최근 불거진 고위 공직자들의 진퇴를 둘러싼 논란에서 운위되는 액수는 훨씬 그 기준이 높습니다. 노후 준비로 25억 정도는 기본으로 가지는 것이 전혀 비난할 일이 아니라는 게 그들의 기준입니다.
5퍼센트가 만들어 통과시킨 법을 1퍼센트가 집행하는 정부 – 이것을 도대체 어떤 의미에서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미국을 위시한 많은 나라들에서 대의제 민주주의는 사실상 “민주주의의 요소가 가미된 과두제oligarchy”에 불과하다는 것이 현실입니다. 즉 오늘날의 대의제 민주주의란 사실상 큰 권력과 재산을 가진 거물들이 선거라는 의식을 거쳐서 합법적으로 권력을 쥐는 귀족정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지치게 하는 요소가 또 하나 있으니, 이는 의회 정치의 무능력과 비효율입니다. 정치학 교과서에서는 산업사회의 구성과 작동이 복잡하여 전문성을 가진 “엘리트”들을 대표로 선출하여 입법과 권력 감시를 맡기는 의회 민주주의야말로 현대 사회의 운명적 선택이라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막상 선출된 개개인들의 면면을 보십시오. 과연 전문성과 효율성을 갖추고 있는 이들인가요? 그리고 이들이 속해 있는 정당이라는 집단이 전문성과 효율성으로 움직이는지는 더욱 의심스럽습니다. 게다가 그 정당들이 어우러져 벌이는 의회 정치의 양상이 산업사회의 운영과 관리가 요구하는 전문성과 효율성을 담보하고 있다고 생각할 이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 반대가 사실에 가깝습니다. 개개인들이 정당의 공천을 받아 선거에 나가기 위해서는 이런저런 계파라는 패거리의 논리에 충실해야 하며, 그 계파들이 뭉친 정당이라는 것 또한 선거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선거 기획사에 불과합니다. 이 정당들로 움직이는 의회란 따라서 합리성과 효율성에 따라 시급하고 필요한 법안을 신속하게 통과시키는 장치는커녕, 오히려 그러한 법안이 나와도 그 통과를 가로막는 것을 작동 원리로 움직입니다. 그래서 의회라는 장의 주요 기능은 여당과 야당이 서로의 발목을 잡아 아무런 진전도 벌어지지 않는 교착 상태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프란시스 푸쿠야마의 표현을 빌자면, 서로가 서로에게 비토를 놓는 “비토크라시vetocracy”가 오늘날 의회 정치의 현실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갑갑한 교착 상태에서 관료들 및 거기에 유착한 기득권 세력은 무소불위에 가까운 권력을 누리게 됩니다. 교착 상태의 끝판에는 탄핵이니 위헌 제소니 하는 사법적 조치들이 난무하게 되지만, 이는 사법부에 모여 있는 지배 엘리트들의 권력만을 가중시킬 뿐입니다. 오늘날 삼권분립의 원리는 “견제와 균형”보다는 국가의 작동 자체를 결딴내어 기득권 세력의 지배를 관철시키는 그 결과 산업사회의 작동은 오만가지 부조리와 모순에 가로막히게 되며,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대다수의 근로 대중들 또한 삶의 고통이 가중됩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의 문제점 즉 부와 권력을 가진 자들의 의회 및 공직 독점의 문제 그리고 합리성과 효율성을 뒤로 제친 “비토크라시”의 문제는 동일한 원인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의회는 본래 민주주의나 산업사회와는 전혀 무관한 목적에서 생겨난 제도라는 점입니다. 18세기 미국 혁명가들과 프랑스의 계몽주의자들은 대의제를 민주주의의 유일한 가능태로 여겼지만, 20세기 중반의 요세프 슘페터와 대학의 “정치과학자들political scientists” 대다수가 산업사회의 관리에 있어서 대의제가 필연이라고 주장했지만, 이는 심히 의문스럽습니다. 의회의 기원과 역사적 진화 과정을 볼 때, 그리고 21세기의 오늘날 각국에서 펼쳐지고 있는 대의제 정치의 현실을 볼 때, 이러한 믿음은 근본적으로 재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의회의 기원은 중세 유럽에 있습니다. 군주가 정사를 펼침에 있어서 정신들 및 귀족들의 자문과 합의를 얻어내는 것이거나 (알프레드 대왕 시대의 Witan, 신성 로마 제국의 Diet), 전쟁과 조세 혹은 주요 법령의 포고에 있어서 피치자들의 이해와 동의를 구하는 신분제 의회 (노르만 정복 이후 영국의 Parliament, 프랑스의 삼부회의 등)가 그 틀이었습니다. 이들의 대표성이란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것이었을 뿐, 중요한 것은 이합집산과 권모술수와 등치고 배 만지는 각종 협잡을 동원하여 거기 모인 구체적 개인들을 구워삶아 어떻게든 원만한 복종을 끌어내는 것이었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이런 것들은 어디까지나 봉건제 지배 질서의 순조로운 작동을 위해 마련된 제도들이었습니다. “인민의 일반의지”로 국가를 구성하고 통치하기 위한 제도도 아니었으며, 산업사회는커녕 철저하게 농업사회 기껏해야 반농반상半農半商 사회에서나 작동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어쩌다가 이 의회라는 제도가 민주주의의 담지자요 산업사회의 관리자가 되었던 것일까요?
옛날 사회학에서 많이 논의되었던 “가용성의 법칙 law of availability”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씹는다”는 것입니다. 잇몸은 음식을 씹으라고 생겨난 기관이 아니지만 이가 다 빠진 상태에서는 어쩔 수 없이 잇몸이 이빨의 구실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회 제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사회에 있어서 외적으로 새로운 상황과 조건이 (전쟁, 기후변화, 기근 등) 나타날 수도 있고 내적으로 새로운 이상과 목표가 (종교개혁, 정치 이념 변화와 혁명, 계급투쟁 등) 나타날 수도 있으며, 이 때 그 사회는 그러한 새로운 조건에 따라 새롭게 형성된 사회 목표를 실현해 줄 도구를 찾게 됩니다. 그런데 마땅히 그 도구 역할을 할 제도가 없다면 그 사회는 기존에 있는 제도 중에서 제일 가까운 것으로 그 도구 역할을 수행하도록 만듭니다. 신석기 시대에 집단 간 전쟁이 빈번해지자 수렵 활동을 지도하던 이가 군사 활동을 이끄는 장군이 되는 경우, 빈민은 늘어나건만 그것을 관리할 제도가 미비할 때 종교 자선 기관들이 공공부조의 역할을 떠맡는 경우 등이 그 예라고 하겠습니다.
17세기 영국에서 시작되어 1917년 러시아 2월 혁명까지 300년 가까이 계속된 시민혁명의 기간 동안 민주주의의 주적은 전제 군주였으며, 여기에 맞서서 시민들이 자신들의 주권을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제도는 기존의 의회였습니다. 물론 의회 또한 이 과정에서 변형을 겪습니다. 시민들은 기존의 신분제 의회의 형태를 거부하고 선거로 구성되는 의회를 요구했습니다. 또한 이 의회는 군주마저 구속할 수 있는 헌법을 제정할 권력 나아가 그 헌법의 틀 안에서 여러 법령을 만들어 관철시킬 권력까지 요구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시민혁명에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왕 vs 의회”의 구도가 나타나게 되며, 민주주의의 최우선 선결과제인 전제권력의 철폐라는 단계에서는 의회 정치가 민주주의와 동일시되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하지만 이는 결코 논리적 필연은 아닙니다. 러시아의 경우처럼 전제정이 워낙 오래되어 의회의 역사가 박약한 경우 (러시아의 의회인 “두마”는 1905년 혁명으로 그것도 대단히 제한된 형태로 겨우 나타납니다), 1917년 2월 혁명에 참여한 군중들은 그와 동시에 출현한 평의회 즉 “소비에트”를 시민혁명의 도구로 삼기도 했고, 이에 케렌스키 임시정부와 소비에트의 이른바 “2중 권력” 상태가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시민혁명의 과제를 굳이 부르주아 의회가 아닌 대중들의 소비에트가 얼마든지 수행해도 된다는 것을 깨달은 데에 레닌과 트로츠키의 혜안이 있으며, 그 경우 시민혁명이 자연스럽게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이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착안한 데에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이 나옵니다.)
하지만 막상 전제군주정이 철폐되고 헌법에 입각한 의회제가 확립되자 의회는 곧 귀족들과 상층 부르주아들이 결탁하여 새로운 기득권 체제를 옹호하는 철옹성이 되고 맙니다. 의회는 이제 상위 1퍼센트가 상위 10퍼센트의 동의를 얻어 마음대로 나머지 90퍼센트를 지배하는 법령과 통치를 행하는 장이 되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일정한 재산이 있는 중산층 이상만이 투표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의회가 제정하고 스스로 엄수하는 헌법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유산계급과 여러 기성 권력을 옹호하도록 짜여 있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의회는 전제군주와의 대립이라는 역사적 국면이 끝나자 상층 지배계급의 결탁의 장이라는 본래의 기능으로 되돌아갔던 것입니다.
1880년대부터 1차 대전까지 사회주의 정당들이 이 “부르주아 의회”에 들어가야 하느냐를 놓고 격론을 벌였던 것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오히려 산업사회의 민주주의는 의회가 아닌 노동조합을 도구로 하든가 (생디컬리즘) 다른 생산자 및 소비자 조직 등을 도구로 하든가 (길드 사회주의) 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좌파 진영에 팽배했습니다. 우파 쪽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920년대의 이탈리아와 1930년대의 독일에서 대공장을 운영하던 산업 자본가들은 이렇게 대량생산/대량소비의 산업사회를 건설하는 데에 있어서 기존의 낡은 기득권 세력들이 똬리 틀어 앉은 의회 권력이라는 것을 다른 종류의 권력 체제로 대체할 필요를 느꼈고, 이에 파시즘 체제가 나타납니다. 정도와 논리는 다르지만 이는 온건한 민주주의였던 미국의 뉴딜 체제에서도 비슷하게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요컨대, 전제군주정이 사라진 이후의 의회 민주주의는 그 자체가 기득권 수호의 철옹성이 되어 민주주의에도 맞지 않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산업사회의 합리적 효율적 운영이라는 목표에는 더더욱 낡은 것이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의회 민주주의가 다시 산업사회를 관리하는 권력 제도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은 또 한 번 그 “가용성의 법칙” 때문이었습니다. 2차 산업혁명의 대공장 체제에서 사회는 자본과 노동이라는 양대 세력으로 갈라져 있었고, 이 두 세력의 합의와 협조에 산업사회 전체의 명운이 달려있는 상태였습니다. 이 때 “대화의 장”으로서의 의회가 (parliament는 어원상 “대화의 장”이라는 뜻으로, 그것을 만든 노르만인들의 게르만어로는 sprakka였습니다) 다시 떠오르게 된 것입니다. 물론 이 때도 의회 제도는 그전과 다르게 큰 변형을 겪습니다. 일단 기존의 19세기 부르주아 헌법 대신 자본과 노동의 협약이라는 것을 우선시하여 여기에 동의하는 중도우파 중도좌파 정당의 양당 체제를 만들어 내며,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는 정당들은 극우 극좌로 주변화시킵니다. 그리고 산업사회를 효율적 합리적으로 관리하는 데에 꼭 필요한 조치이지만 공식적 법령을 넘어서는 사회 규제의 권력은 그 상당 부분을 노사정 합의라는 체제로 (“코포라티즘”) 체제로 이양합니다. 이렇게 본래 모습에서 크게 수정을 거친 뒤에야 의회 민주주의는 산업사회의 정치 제도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21세기의 오늘날입니다. 산업사회는 이제 60년대 이전의 대공장 체제가 아닙니다. 옛날 의미에서의 (유형적) 자본과 (고전적) 노동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거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 세력이 아닙니다. 산업사회도 자본주의도 믿을 수 없을 만큼 복잡하게 세분화되었고 그 진전의 방향 또한 누구도 가늠하기 힘들게 되어 있습니다. 사용자 단체도 전국적 노조도 더 이상 사회를 대표하는 세력이라 할 수 없게 되었으며, 의회의 정당들은 또한 각종 이권 세력의 로비 이외에는 사회와 이렇다할만한 조직적 관계를 갖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200년 전 프랑스의 사상가 생-시몽Comte-Henri de Saint-Simon이 걱정했던 바가 그대로 현실화되었습니다. 산업사회를 의회가 지배했다가는 대재앙이 벌어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산업사회는 합리성과 효율성 그리고 인간의 도덕과 자유라는 명시적인 원칙으로 조직되며 또 조직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의회라는 장은 권력자들 그리고 그들에게 줄을 댈 수 있을 만큼 여유와 시간과 재산이 있는 유력 인사들이 모여서 각자의 권력을 확장하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는 권력 싸움의 장입니다. 따라서 생-시몽은 산업사회가 제대로 운영되기 위해서는 의회가 독점하고 있는 권력을 빼앗아서 사회 전반에 분산시켜야만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지 않을 경우 산업사회는 작동을 멈추며, 대다수의 사람들 특히 “가장 숫자가 많고 가난한 계급”에게는 지극한 궁핍과 비참함이 운명으로 주어질 것이라는 게 그의 예언이었습니다.
생-시몽을 무덤에서 깨워 일으켜 오늘날의 한국을 유람시켜 드린다면 무어라고 하실까요? 다양한 권력 게임에 능하다는 것 말고 다른 전문성과 능력이 있는지 의심스러운 이들이 의회는 물론 여러 공직 자리를 꿰어 차고 그 자리를 자신들의 “집안 세간patrimony”으로 삼고 있습니다. 산업사회가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그것이 어떤 가능성과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지 그래서 그것을 어느 방향으로 이끌고 가야만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목표를 달성하여 최상층에서 최하층까지 고르게 혜택을 입고 인간적인 삶을 보장받을 수 있는지를 노심초사하고 살피는 이는 도무지 눈에 띄지 않습니다. 개인을 떠나 정당으로 가면 더합니다. 그저 언론에 산뜻한 카피로 실릴 수 있는 쌈빡한 정책 이름 (소득 주도 성장, 포용적 국가, 도시 재생 등등)만 있을 뿐, 그것을 정말로 구현할 수 있는 구체적인 계획과 시간표 등은 전혀 준비할 생각이 없습니다. 이런 정당들과 인물들이 의회에서 만나봐야 합의할 수 있는 것도 수행할 수 있는 것도 없습니다. 그 “대화의 장”에서 벌어지는 일은 서로의 법안을 가로막고, 각자 우위를 점하기 위해 10년 전 50년 전 100년 전 아니 심지어 몇 백 년 전의 역사 문제를 끌고 나와 서로를 매도하는 공허한 이야기뿐입니다.
이러한 의회가 통치는커녕 통치를 불구화시켜 국가 기관과 그 주변에 자리 잡은 그리고 의회 구성원들과도 친밀한 기득권 세력에게 권력을 넘겨주는 장치가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입니다. 그 때문에 의회가 일하는 곳이 아니라 “비토크라시”의 장이 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리고 이 자리를 채울 이들이라는 것은 산업사회라는 거대한 수레바퀴를 굴려가는 현장에서 매일매일 땀 흘리고 기를 쓰다가 지쳐가는 우리 개미들과는 무관한, 잔뜩 곡식을 쌓아 놓고서 한가롭게 여가를 즐기는 상위 5퍼센트와 1퍼센트의 상류층으로 독점되는 것 또한 필연적인 일입니다. 21세기가 되었지만, 의회는 이제 까마득한 옛날 중세 유럽의 의회의 본모습을 찾아 퇴행해 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파와 좌파의 급진주의자들은 이미 1920년대에 이 따위 의회는 당장 때려 부수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최근 몇 년간의 세계 각국의 정치 상황을 볼 때 이러한 상태가 다시 나타나고 있다는 경고가 있으며 상당한 설득력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의회를 당장 무너뜨리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생각합니다. 심장 근처에 화살이 박힌 병사를 살리겠다고 화살을 당장 뽑아버렸다가는 심한 출혈로 그 병사의 목숨이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대의제 민주주의는 이미 대부분의 나라에서 한 세기 최소한 반세기 이상 현실의 정치 체제로 확고하게 자리잡아온 존재입니다. 합리적 효율적으로 작동한다는 것이 확실하게 검증된 다른 제도가 준비되기 전에 의회를 무력화시키고 기존의 정치 체제 틀을 거부한다는 것은 대안은커녕 혼란과 고통만 더욱 가중시킬 뿐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 유럽에서 생겨난 이 의회라는 제도에 무한정 우리 산업사회의 미래를 맡길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저희는 지식 커먼스와 정책 플랫폼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급격하게 변화하는 오늘날의 산업사회에서 우리 95퍼센트의 사람들은 무수히 많은 문제와 고통에 맞부닥뜨리게 되지만, 현존하는 대의제 민주주의는 그 유력 인사들의 득표와 출세에 직접 연결되지 않는 한 그 어떤 문제에도 관심을 갖는 법이 없습니다. 기성 언론은 우리 누구도 관심 없는 여야 간의 이런저런 정쟁만을 이야기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이 격변하는 산업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가 부닥친 문제가 무엇인지, 그 해법은 무엇인지, 그것을 가능케 하기 위해 어떤 제도적 정책적 조치가 필요한지, 그러한 조치를 실현하기 위해서 어떤 행동 전략이 필요한지, 그러한 제도와 정책을 합리적 효율적으로 운영해 나갈 방책이 무엇이며 어떤 이들이 그것을 맡아야 할지의 구체적인 논의는 이 사회 어디에서도 이루어지는 곳이 없습니다.
이 논의는 우선 지식과 정보를 필요로 합니다. 앵무새처럼 똑같은 이야기를 서로 베껴대는 각종 매체들의 알량한 정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외국 대학 어디에서 교육받은 이야기를 또 소처럼 되새김질 해놓는 대학의 지식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에 살면서 이야기하고 고민하고 책 읽고 주워듣거나 직접 보고 들은 지식과 정보를 털어놓고 함께 공유하고 함께 대책을 이야기하는 장이 필요합니다. 나이는 마흔을 넘었지만 여전히 수입은 월 2백을 넘지 못하는 나는 노후를 어떻게 해야 하나요? 나이 여든인데 가족도 없고 통장 잔고가 0이 되어버린 나는 “안락사”만이 답인가요? 취업 전망은 1도 주지 않는 대학에 들어간 나는 4년 동안 계속 돈을 뜯기며 붙들려 있어야 하나요? 좋은 대학에 가지 못하는 70퍼센트의 고등학생들에게 우리의 교육 시스템은 무엇을 제공할 수 있나요? 비정규직을 벗어나기 힘들 것 같은 나는 과연 가정을 이룰 수 있을까요? 병원이 하나도 없는 산간벽지에 사는 임산부는 도대체 위급한 상황에 어디로 가야 하나요? 돈 없는 집에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기죽어 자라는 아이들에게 우리는 무엇을 해줄 수 있나요? 1인 가구로 살고 있지만 고독사는 너무 두려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 너무나 많은 질문이 밀려들어 옵니다.
우리의 현실적인 선택은 현존하는 대의제 민주주의를 때려 부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렇다고 현재 상태를 계속 참아서도 안 됩니다. 트란실베니아의 드라큘라 백작보다 더 늙고 추레한 이 의회라는 제도에 갇히지 말고, 21세기의 오늘을 사는 우리끼리 우리의 문제를 공유합시다. 그리고 그것에 도움이 될 만한 지식과 정보를 함께 공유합시다. 거기에서 우러나오는 생각과 지혜를 토론으로 함께 공유합시다. 그리고 그를 통해 어떤 제도와 정책이 필요한지 당장 실현가능한 것과 중장기적으로 준비해야 할 게 어떤 것인지를 함께 논의합시다. 그리고 가장 훌륭한 대책을 내는 이들에게 관심을 몰아주고 그들이 그러한 미래를 열어나갈 수 있도록 힘을 몰아줍시다. 그래서 우리는 온갖 가지의 지식과 정보로 우리의 머리를 깨우고, 나아가 제도와 정책에 대한 논의까지 함께 담아낼 수 있는 지식 커먼스와 정책 플랫폼을 준비하고자 합니다.
중세 유럽의 자율적 시민들은 비록 처음에는 영주의 성벽에 붙어서 움막을 치고 사는 불쌍한 존재들이었지만 (burg-buerger, bourgoeisie), 이후 그들의 시장터가 커지면서 오히려 영주의 권력을 포위하는 장으로 자라났습니다. 1848년 프리드리히 4세에게 밀리던 프로이센 의회는 의회를 둘러싼 군중들의 힘으로 다시 반격을 가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의 의회 정치에 환멸을 느낀 이들은 성 밖으로 오십시오. 어설픈 반란이나 봉기를 꾀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천막을 치고 호롱불을 밝히고 장국을 끓이고 소주를 퍼 나르며, 모닥불 옆에 모여 각자 듣고 보아서 알고 있는 것들 그리고 책과 공부로 알고 있는 것들까지 다 털어놓아 봅시다. 그 천막에서 우리가 함께 만들어갈 유토피아인 위키토피아가 영글어 갈 것이라고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