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에서 계속)
“진보”인가 “좌파”인가?: 샌더스, 워렌, AOC, 그리고 코빈까지
세계의 중심국이자 신자유주의의 공세가 시작된 나라인 영국과 미국 정치의 한복판에서 2010년대 중반 이후 중대한 변화가 벌어졌습니다. 1990년대에 미국에서 빌 클린턴의 민주당 그리고 영국에서 토니 블레어의 “신노동당”이 집권하면서 완전히 자리 잡았던 “중도 정치의 합의”에 심각한 균열이 벌어진 것입니다. 워낙 내용이 방대하여 다음에 자세히 다루겠습니다만, 이 합의는 시장 자본주의와 대의제 민주주의가 한 나라는 물론 지구 전체의 사회 질서를 조직하는 최고의 진리라는 “유일 사상”(피에르 부르디외)에 근거합니다. 좌파 정당과 우파 정당의 차이는 단지 그러한 “개혁”을 실현하는 방법론과 속도의 완급의 문제로 국한되며 (전자는 “사회”나 “평등”과 같은 수사학을 강조하며 후자는 “개인의 자유”와 “책임”과 같은 수사학을 구사), 이러한 합의에 참가하지 않는 정치 세력은 극좌나 극우로 낙인찍혀 주변화됩니다.
하지만 2010년대 후반에 두 나라에서 전개된 정치 상황은 바로 이 “극좌”와 “극우”의 득세라고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포퓰리즘”의 우파의 득세로 영국은 브렉시트, 미국은 트럼프 정권이라는 암초에 부딪혀 한없이 표류하고 있습니다. 한편 영국 노동당은 제러미 코빈을 당수로 선출하면서 그동안의 “제 3의 길” 노선을 폐기하고 시장 자본주의에 거세게 도전하는 좌파 정당으로서의 본색을 되찾아 가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버니 샌더스가 이끄는 “민주적 사회주의자”들이 민주당 내에서 가장 역동적인 세력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이에 최근의 하원 선거에서는 여성주의와 녹색과 사회주의를 전면에 내건 AOC라는 수퍼스타를 등장시키기에 이릅니다. 그러자 엘리자베스 워렌 등 다른 대통령 후보들 또한 10년 전만 해도 너무나 과격하여 용납되기 힘들었을 과감한 정책들을 내걸며 급진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저희는 신자유주의의 “중도 합의”라는 껍데기를 과감히 벗어던진 이 새로운 좌파 세력이 우리 모두의 위키토피아를 구상하고 건설하는 중심 동력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물어보고 넘어가야 할 불편한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이 “좌파” 세력들은 과연 “진보” 세력일까요?
최소한 지금까지의 모습으로 볼 때, 그렇게 말하기 어렵다고 보입니다. 이들이 내거는 주요 정책들이 대부분 70년대 이전, 심하게는 30년대의 정책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일 뿐, 21세기에 펼쳐질 산업사회의 미래에 대한 고민과 전망을 담아내는 것이라고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직까지 이들이 내건 정책은 대부분 기존의 전통적 “좌파”의 정책을 더욱 강화하거나 현재에 맞게 약간의 수정을 가한 것일 뿐, 그 근간은 신자유주의가 나타나기 이전인 1970년대까지의 사회민주주의 정책에 있는 것들입니다. 여기에 문제의 핵심이 있습니다. 그러한 정책들은 1930년대의 대공황으로 전면화된 시장 자본주의의 위기에 대한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며, 결국 그 위기도 또 그 대안도 모두 2차 산업혁명이라는 시대적 상황의 산물들이라는 것입니다. 새로운 산업혁명의 물결로 산업 기술 패러다임도 또 거기에 조응하는 산업사회의 모습도 모두 상전벽해의 변화를 겪고 있는 것이 21세기의 현실입니다. 그러한 산업사회의 거대한 진화 과정을 무시한 채 19세기식 자유방임 시장 자본주의라는 케케묵은 사회사상을 21세기에 들이대는 신자유주의자들도 시대착오의 퇴물들이지만, 70년대까지 나온 옛날 좌파 정책을 그냥 가져오는 행태도 더 높은 점수를 줄 수는 없습니다.
이들은 모두 균형재정과 긴축austerity이라는 신자유주의적 교리를 떨쳐버리고 과감한 확대 재정을 시행할 것을 강조합니다. 이를 통해 사회적인 고통을 덜어낼 뿐만 아니라 시장 경제 또한 호황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는 케인스 경제학의 입장에 서 있습니다. 재정 운영에 대해 신자유주의의 미신이 걸어놓은 주문을 떨쳐버린다는 것은 대환영이지만 과연 이런 정책이 1930년대의 여러 나라에서와 같이 호황을 불러오는 기적을 일으킬 수 있을까요? 이 또한 다음 기회에 보다 자세히 논하겠지만, 2차 산업혁명이 완숙으로 치달으면서 과잉설비/중복투자 그리고 과소소비가 문제가 되던 당시와 3차 혹은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해 산업의 성격 자체가 변화하고 있는 오늘날에는 실업과 불황이 발생하는 원인이 같을 수 없습니다. 케인스 경제학에서는 정부가 돈을 푸는 액수 자체가 중요하지만 (이른바 성장을 촉발시키는 “G”라는 단추), 지금은 그 액수 자체보다도 어디에 어떤 용도로 어떤 경로로 지출하여 어떤 변화를 일으킬 것인가 등 사회 혁신의 청사진과 결합된 보다 자세한 계획이 필요합니다. 다행히 AOC는 최근에 이러한 21세기의 변화된 현실에 보다 부합하기 위한 목적에서 “녹색 뉴딜”이라는 과감한 계획을 내놓았습니다. 내용에 있어서 빈 구멍이 많다고 비판을 받고는 있지만, 바로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한 시도로서 다함께 더욱 발전시켜야 할 위키토피아의 옳은 방향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그를 위해서라도 단순한 “재정 팽창 만능주의”를 과감히 떨쳐버려야 할 것입니다.
“책임 자본주의”라는 워렌 의원의 구상도 그러합니다. 터무니없는 기업 독점은 물론 월스트리트의 논리와 결합된 그 지배구조의 파행 또한 분명히 손보아야 할 문제일 것입니다. 하지만 대기업의 이사진에 노동자가 40퍼센트 이상 참여하면 과연 그녀가 이상으로 삼는 “1950년대와 60년대의 자본주의”가 되돌아올까요? 대공장 시스템을 근간으로 삼던 옛날 2차 산업혁명 당시와는 기업이라는 존재의 성격도 또 노동자의 위치와 의미도 모두 변해버린 오늘날입니다. 30년대 스웨덴 살트셰바덴 협약을 맺던, 그리고 70년대에 임노동자 기금 구상을 밀어붙이던 집단으로서의 “노동계급”이란 오늘날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들이 과연 소비자, 하청업체, 비정규직 불안정 노동자, 인근 주민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보편적인 존재로 행동할까요? 대기업 노동자들이 경영에 참여해봐야 자신들의 고용 안정과 소득 향상을 위해 투자자들 이상으로 지독하게 이윤 추구의 행태를 보인다는 사례는 이미 무수히 나타난 바 있습니다.
국가가 운영하는 투자은행을 설립하여 미래형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는 첨단 산업을 일으킨다는 것이 제러미 코빈 쪽의 구상입니다. 이 또한 이탈리아 파시즘의 국가지주회사(IRI)를 비롯해서 1930년대에 다양한 형태로 시도되었던 생각을 그냥 답습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첫째, 지금 민간 투자가 부족해서 일자리가 부족한가요? 첨단 산업 쪽에서는 오히려 투자 과잉에 가깝지 않은가요? 둘째, 투자은행의 자본을 국가가 마련한다고 해도 산업 구조가 훨씬 더 복잡해지고 자본 가치의 계산도 종잡을 수 없게 된 오늘날 그 운영은 결국 다시 금융 시장의 투자은행가들에게 위탁될 수밖에 없습니다. “민주적 합의”로 투자은행을 운영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셋째, 옛날의 국책 은행들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중장기적 시간 지평으로 국가적 차원의 경제 계획과 맞물려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의 산업 기술 패러다임에서 10년 후 20년 후를 내다볼 수 있는 국가적 경제 계획은 무엇인가요? AOC가 말하는 “녹색 뉴딜” 이상의 계획을 위해서는 생태와 사회와 산업 전반에 걸친 포괄적인 개조 계획이 있어야만 합니다.
샌더스가 강조하는 “무료 대학”은 어떤가요? 2차 산업혁명으로 인해 화이트칼라 일자리가 폭발하던 20세기 중반에는 대학 졸업장이라는 게 좋은 일자리를 얻을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었습니다. 따라서 대학 문턱을 낮추는 것은 모든 국민에게 기회 균등을 제공하는 가장 중요한 장치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그러한가요? 지금 노동 시장에서 장기 실업과 불안정으로 신음하는 청년들이 대학 교육을 받지 못해서 고통을 받고 있나요? 대학을 나오면 좋은 일자리가 주어지는 게 21세기의 산업 사회의 현실인가요? 잔뜩 걸머진 학비 대출금을 탕감해주는 것은 필요한 일이겠지만, “공짜 대학”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이는 곧 모두에게 대학을 가라고 장려하는 셈인데, 21세기의 산업 사회에서도 이것이 곧 좋은 일자리로 이어진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요?
나는 이들의 선의와 정열을 의심하지 않으며, 이들이야말로 우리의 위키토피아를 만들어 가는 데에 가장 큰 힘이 되어 줄 이들이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주장이 기존의 “좌파”의 그것을 답습하는 것을 넘어서서 현재의 “산업사회”의 현실에 대한 과학적 파악에 기초한 21세기 미래 사회의 전망을 담고 있는 것이라고는 아직 생각되지 않습니다. AOC의 “녹색 뉴딜”은 그래서 고무적이고 중요한 의미가 있지만, 그만큼이나 아직 “진보”로의 갈 길이 멀다는 한계도 똑같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앤드류 양의 경우
민주당 예비 대선후보 중 중국계 이민 2세인 앤드류 양Andrew Yang은 이력으로 보나 정책과 사상으로 보나 전통적인 의미의 “좌파”와는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브라운 대학을 나와 컬럼비아 로스쿨을 거쳐 대기업 변호사 생활을 하다가 2000년 이후로 벤처 기업 창업과 지원으로 명성을 얻은 혁신 기업가이며, 뉴욕과 실리콘 밸리의 환경에 깊숙이 묻어 들어가 있는 유력 인사의 한 명입니다. 그런 그가 현재 미국이 처한 최대의 위협은 로봇과 인공지능이 가져오는 자동화로 인한 대량 실업이라고 강조하면서 이에 대한 해법으로 보편적 기본소득을 내걸고 대선 경쟁에 뛰어든 것입니다. (그의 주장을 담은 저서 『보통 사람들의 전쟁The War on Normal People』은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일독을 권합니다.)
이렇게 보편적 기본소득과 같은 파격적인 공약을 내걸고 정치계로 뛰어들어 화제를 불러일으킨 이른바 “괴짜 자본가maverick capitalist”들의 사례가 그 전에도 미국이나 유럽에서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앞에서 살펴본 “진보”의 아버지 생-시몽의 사례를 참고해 볼 때 앤드류 양을 좀 더 진지하게 주목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저희들은 미국 시민도 아니며, 앤드류 양의 지지자는 더욱 아닙니다. 심지어 그가 내건 중심적 공약인 보편적 기본소득과 “타임뱅크”조차도 많은 의문과 약점을 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단지 실리콘 밸리에 넘쳐나는 미래 예측 매니아라는 이유로 “진보”라고 보는 것도 아닙니다. 앤드류 양이라는 인물의 이력과 고민과 실천의 행보가 생-시몽이 생각했던 미래 사회의 “진보”의 정치와 여러 면에서 부합하는 바가 많다고 보기 때문이며, 그러한 정치가 어떤 것인지를 상상할 수 있게 하는 인물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첫째, 그는 “산업사회”의 구조적인 변모라는 아주 근원적이고 추상적인 문제를 전면적으로 제기합니다. 생-시몽이 말하는 봉건적인 “권력 정치”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현실 정치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정치 세력들은 우리 사회의 진단과 미래의 해법을 말하기 보다는 적대 세력을 공격하여 그에 대한 증오와 반감을 동원하는 정치에 몰두합니다. 그래서 실제의 선거 구호는 항상 온갖 적대적이고 선정적인 구호와 단어들이 난무할 뿐, 사회 전체의 구조적 변화와 그에 대한 근본적 해법과 같은 이야기를 중심적인 정치 의제로 내거는 후보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역설적인 일이지만, 앤드류 양의 선거 운동이 많은 젊은이들 그리고 인종과 성별과 연령 심지어 계층을 초월하여 다양한 이들에게 호소력을 갖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합니다. 그의 선거운동에 나타나는 손팻말 중에는 “산수math”라는 구호가 있습니다. 그는 지금 자동화가 얼마나 심하게 진행되어 있고 그 결과 미국인들의 일자리와 일상생활이 얼마나 근본적으로 위협을 당하고 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끝없이 숫자와 숫자와 숫자를 늘어놓습니다. 보통의 정치인들이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이러한 방식이 오히려 그를 진정성과 설득력을 가진 후보로 부각시키고, 절망과 불안과 고독에 지친 평범한 미국인들에게 크게 다가오게 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그의 상황 파악은 그의 다각적인 연구 조사뿐만 아니라 20년간 벤처 사업의 최전선에서 활동하며 작금의 기술 혁신의 성격과 방향에 직접 경험하고 파악한 바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현재 사회의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여러 갈등과 혼란과 변화가 있지만 그 가장 밑바닥에는 로봇과 인공지능과 플랫폼의 초연결성 등이 있으며, 이 때문에 “산업사회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위치”가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다는 사실을 본질적인 문제로 부각시키는 것입니다. 트럼프라는 “공공의 적”이 어떻게 대통령 자리를 꿰어찼는가에 대해서 그는 인종주의니 파시즘이니 자본가들의 반란이니 하는 기존의 수사학보다는 그를 지지한 백인 하층 남성들의 좌절이 대규모 자동화로 인한 만성적 실업과 노동 시장 조건 악화에서 왔음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트럼프주의를 극복하고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과제 또한 이러한 산업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여 새로운 산업사회를 건설하는 것으로만 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권력 정치에 고유한 비판과 공격과 싸움의 레토릭에 절어있는 기존 정치 세력들에게서 찾아보기 힘든 내러티브입니다. 생-시몽이 강조했던 대로, 산업사회의 현실에 대한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포착에 기반해 사회를 어떻게 재구성해야 하는가라는 건설적이고 창조적인 성격의 담론인 것입니다.
둘째, 그의 관점은 생-시몽과 마찬가지로 “가장 숫자가 많은 이들의 안녕과 행복”에 최우선의 방점을 두고 있으며, 이것이 그의 저서의 제목인 “보통 사람들에 대한 전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점에서 유발 하라리 등의 이른바 “인간초월주의transhumanism”의 담론과 큰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미래 담론은 넘쳐나며, 그 중에는 아주 온건하고 상식적인 것으로부터 특이점과 호모 데우스 등을 언급하면서 인간 존재의 완전한 비약을 이야기하는 것까지 대단히 다양합니다. 하지만 하나같이 미래의 사회가 목이 부러질 정도의 속도로 변화하게 될 것이며 여기에서 개인이나 집단이나 사회 전체나 모두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존재로 변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습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질문이 하나 빠져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요? 우리들 중 창의적이고 혁신적일 수 있는 사람의 비중은 과연 15%를 넘을까요? 그렇다면 미래는 그 15%만의 것인가요? 큰 재주나 능력은 없어도 그저 게으름 피우지 않고 남 해치지 않고 평범하게 일하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자리가 주어지는 것인가요? 이는 다시 그 15%의 (실제로는 훨씬 더 적을 것입니다만) 안녕에 영향을 미칩니다. 85%의 사람들이 잉여가 되고 주변적 존재로 밀려나는 사회에서 그 15%는 얼마나 언제까지 연부역강할 수 있을까요?
앤드류 양은 미래를 거부하거나 저주하지도 않지만, 일방적인 찬양을 내놓지도 않습니다. 대신 그가 보여주는 것은 보통 사람들, 즉 별로 많이 배우지도 못하고 특별한 재주나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자기 주어진 환경과 조건에서 열심히 일하여 삶을 꾸려가고자 하는 사람들의 안녕과 행복에 대한 심대한 염려와 공감입니다. 유튜브 등에서 확인할 수 있지만, 이 문제를 터놓고 이야기하는 그의 태도는 진정성으로 가득합니다. 마이크를 잡고서 전혀 흔들림 없이 평정을 유지하며 논리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놓지만, 그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차 흘러내리는 이상한 의미에서의 “악어의 눈물”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유세장에 모인 군중들을 보면 진정 연령, 인종, 성별에 있어서 보기 드문 다양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가장 많은 이들의 마음속에 도사린 가장 큰 불안과 공포를 드러내고 공감하고 함께 해결하려는 그의 진정성이 실제 선거 과정에서 큰 폭발력을 보일 것이라고 예측하는 이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셋째, 어떠한 이념이나 원리에도 매이지 않는 과감한 프라그마티즘pragmatism입니다. 실용주의라는 그릇된 어휘로 번역되고 있지만, “보편적인 가치의 척도를 실제 행동과 실천 속에서 함께 발견하고 구성해 낸다”라는 이 프라그마티즘이야말로 미국인들이 산업사회에 선물한 소중한 정신적 유산이며 기풍이라고 할 것입니다. 앤드류 양은 벤처 사업가로 선두를 달려온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이 자동화의 공격 앞에서 위기에 처한 보통 사람들의 문제에 접근하는 데에 있어서는 시장주의와 능력본위주의라는 원칙을 완전히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그의 선거 구호인 “인류가 먼저다Humanity First”의 의미입니다. 모든 개개인들이 자기 이익을 추구하면 사회 전체에도 자동적으로 진보와 번영과 균형이 찾아올 것이라는 시장주의 그리고 그 속에서 모두는 각자의 능력에 따라 분배와 지위가 결정될 것이라는 능력본위주의meritocracy는 현재의 산업사회의 발전 국면에서 전혀 해결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한 보통 사람들에게 이는 그냥 알아서 썩어 문드러지라는 일방적 폭력이 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무조건적으로 모든 개인에게 1백만 원 정도씩을 지급하는 보편적 기본소득이라는 파격적인 아이디어를 전면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넷째, 그는 여기에서 그 “보통 사람들”을 단순히 국가가 기본소득으로 먹여 살려야 하는 수동적인 존재로 파악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기본소득은 오히려 이들에게 잠재된 능동성과 적응 능력을 끌어내기 위한 마중물의 역할을 할 뿐, 이를 계기로 그들이 스스로를 개인적으로 집단적으로 강화하고 조직하여 자주적인 생산 활동을 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장치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여러 예 중에서 특히 괄목할만한 것은 “타임뱅크”를 적극적으로 장려하도록 안배하자는 정책이 있습니다. 만성적 실업으로 노동 시장에서 아예 빠져나오는 이들이 양산될 경우, 사회 전체에 유휴 노동력이 생겨나며 사람들은 시간이 남아돌게 됩니다. 이 때 이 사람들 스스로가 각자 서로가 필요로 하는 돌봄 등의 여러 서비스를 제공하여 (이를 “동료 생산peer to peer: P2P”이라고 합니다) 이를 시간 크레딧으로 기록하여 두면 여러 사람들이 자기들의 노동력을 합쳐 모아서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P2P 생산에 기반한 노동력의 커먼스를 만들자는 제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가며: 2030년의 우리는?
우리의 위키토피아의 노력에 있어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좌파”가 곧 “진보”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보가 되기 위해서는 산업사회의 현실을 과학적으로 경험적으로 파악해야 하며, 모든 이념적 형이상학적 선입견을 버리고 그 구체적인 대책을 찾아내야 하며,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사회의 비전을 만들어 내고 그에 따라 사회를 건설해 내야 합니다. 여기에서 “모든 이들이 형제와 자매”가 될 것이며 “가장 숫자가 많고 가장 가난한 이들의 안녕과 행복”을 최우선의 과제로 삼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진보” 정치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한국 사회에서 가장 절절히 아프도록 결핍된 것이기도 합니다.
이미 한국 사회는 새로운 산업혁명의 소용돌이로 진입한지 오래입니다. 로봇의 대체율은 아시아에서 가장 높으며 이것이 제조업을 위시한 여러 분야에서의 일자리 감소를 낳고 있습니다. 온라인 상거래의 폭발적 팽창은 최저임금이나 건물주 횡포보다 더욱 깊은 차원에서 자영업 전체의 침체를 낳고 있습니다. 좋은 일자리는 사라져가고 소득과 직업은 급격히 양극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산업 기반의 변동은 사회와 문화 전반에 걸쳐 극심한 갈등과 혼란과 마찰을 낳고 있습니다.
상황이 이러하지만 새로운 산업사회, 생산의 효율성과 인간적 생태적 가치의 실현이 함께 이루어질 새로운 사회의 비전을 제시하고 건설하려는 세력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국회는 “동물 국회”로 전락하여 있으며, 모든 정당들은 이러한 혼란의 국면을 다가오는 선거에서 자기에게 유리하게 이용하려는 책략으로 바쁠 뿐입니다. 산업사회와 “4차 산업혁명”에 대한 담론은 찬양 일변도이거나 지금 당장 모두가 혁신과 창의성으로 무장해야 한다는 새로운 “조국 근대화” 담론으로 사용되고 있을 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 보통 사람들이 느끼고 있는 불안과 절망과 고독이 무엇인지, 그 아픈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호흡을 맞추고 손을 내미는 움직임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씹습니다. 그러한 세력이 없다면 우리 모두가 함께 힘을 합쳐서 그러한 세력이 되면 됩니다. 우리는 미국 시민도 아니며, 버니 샌더스이든 엘리자베스 워렌이든 앤드류 양이든 남의 나라 선거에 공연한 오지랖을 펼칠 이유도 없습니다. 하지만 앤드류 양은 현재 국면에서 “진보” 정치가 어떠한 문제들을 어떠한 방식으로 직시하고 용감하게 맞붙어야 하는지를 일깨워주는 소중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존의 “좌파”들에게 무엇이 빠져있고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저희는 낙관주의자입니다. 그들 모두에게 편재해 있는 모든 장점들과 좋은 요소들이 조만간 합쳐져서 진짜로 우리의 미래를 열어갈 수 있는 새로운 진보 정치가 탄생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의 위키토피아도 그 흐름에 조그만 기여를 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