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권의 GCC 아이디어는 위키토피아의 새 코너입니다. GCC는 Green Commons&Community의 약자로, 앞으로공유적 가치와 공동체에 관한 글이 연재됩니다.
-편집자 주
청년에게 사회적 상속을 1: ‘태어난 배경’ 때문에 인생이 결정되는 사회
한동안 잠잠했던 청년 이슈가 급격히 사회적으로 다시 관심을 모으고 있다. 그 일차적 진원지는 이번에도 청년 자신들은 아니었다. 이번에는 정치권이었다. 2018년 하반기에 20대 청년들의 정부 지지율이 심각하게 낮다는 사실이 회자되면서 정치권이 긴장하기 시작했다. 사실 그 이전까지는 정부가 청년들을 자주 호명하기는 했으나 정책으로 보면 오직 ‘일자리 정책’뿐이었다. 심지어 20대 인구가 2021년 이후 줄어들면 청년실업 문제는 완화될 것이므로 그때까지 재정투입으로 임시직 일자리를 늘리면 된다는 지극히 안이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는 종합적 사회정책으로 진화된 서울시 정책에도 후퇴한 버전이었고, 국회는 그나마 합의에 문제가 없는데도 ‘청년기본법’을 통과시킬 성의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한 마디로 청년의 삶에 대해 진지한 태도가 없었다.
20대는 정치적으로 보수적이었던 때가 있었나?
그러던 것이 정부 여당의 지지율이 하락하는 가운데 그 주요 요소의 하나가 20대(그것도 20대 남성)이라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오자 정치권이 당황하면서 청년이슈를 꺼내고, 언론은 20대의 반란 원인이 무엇인지 갖가지 피상적인 진단을 쏟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보니 오직 화두는 ’20대 남성의 정치적 보수화’로 귀결되었다. 정치적 스탠스로 모든 것이 귀결된 것이고, 당연히 정치권은 이들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한 갖가지 ‘응급 수습책’을 고민하기 시작한 것이다. 일자리 임시대책이라는 안이함으로 일관하다가 정치적인 지지율 회복을 위한 응급 수습책으로 갈아탄 것이다. 어디에도 근본적인 고민의 흔적은 없었다.
20대 남성들이 언제부터 ‘반페미니스트’들이 되었나?
이 와중에 한술 더 떠서 사태를 혼란스럽게 만든 것은 이른바 ’20대 남성들의 ‘반 페미니스트 성향’이라는 ‘여론조사 결과’였다. 이 대목에서도 여론을 오도하는 함정들이 가득하다. 우선 외국의 조사 등에 따라 보더라도, 많은 남성들이 양성평등=페미니즘으로 등치시켜서 인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남녀 임금차별 철폐 등 양성평등에 찬성을 하는 것과 페미니즘을 찬성하는 것과 상당히 다르게 답변한다는 것이다. 이는 남성뿐 아니라 여성도 꽤 그러하다. ‘페미니즘’이라는 단어가 내포한 고정관념이 상당하다는 얘기다. 이를 두고 20대 남성이 페미니즘을 반대한다는 의사표시를 했다고 해서 이를 곧바로 여성차별에 찬성한다고 해석하면 안 된다.
더 나아가면 원칙적으로 양성평등을 찬성한다고 해서 ‘현 정부의 양성평등 정책을 찬성’하는 것은 전혀 아니라는 점이다. 최근 여론조사에 따르면 20대 남성은 특별하게 정부의 양성평등 정책을 “매우 잘못하고 있다”라고 응답한 비율이 54.2%로 단연 높은데, 이를 곧바로 잘못 해석하여 20대 남성은 양성평등에 부정적이라고 해석하면 안 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를 멋대로 해석하여 20대 남성들이 ‘정치적으로 보수’이고, ‘양성평등에도 반대’하는 것으로 ‘낙인’을 찍으면서, 20대 남성들에게 호의적이든 적대적이든 온갖 원인해석과 처방을 내놓는다고 사회적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가운데 20대 청년 문제를 발생시켰던 원초적인 문제, 이른바 ‘흙수저’와 ‘헬조선’ 얘기는 온데 없이 사라지고 청년 논란의 중심이 온통 정치적 해석과 페미니즘 해석만 난무하게 된 것이다. 이제 청년과 연관된 사회적 쟁점은 ⓵ 정치적 관점에서 청년은 보수적인가 진보적인가?⓶ 문화적 관점에서 청년은 양성평등에 호의적인가 적대적인가? ⓷ 경제적 관점에서 청년은 자산과 소득(또는 일자리)의 분배에서 어떤 공정성을 원하는가? 라는 복합적 차원으로 번져간 듯하다.
태어난 배경 때문에 운명이 결정된 ‘신종 신분사회’에 도전하기 위해
정치, 문화 경제적 차원에서 복합된 청년이슈를 다시 한 번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당초에 이야기가 시작된 경제이슈부터 그 토대를 재확인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미 10년도 넘은 이야기인 ‘88만원 세대’가 21세기 청년이슈를 만들어낸 발원지이도 하고, 경제적 분배구조가 정치 사회문화적 행동의 근저가 될 개연성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비슷한 사례로 최근 미국의 트럼프 집권과 종교 문화적 근본주의/배타주의를 발생시킨 근저에 러스트 밸트 지역을 중심으로 경제적으로 추락한 40대 백인남성이 자리하고 있다는 분석이 있다.
특히 청년의 경제 이슈를 다룰 때, 많은 정책담당자들이 하는 것처럼 ‘절대적인 일자리 양의 확보’라는 문제에서 벗어나고 싶다. 그보다는 ‘흙수저’라는 유행어를 탄생시킨 뿌리, 즉 좋은 집안에서 태어난 청년은 지금 조차도 여전히 아무 문제없이 글로벌 차원으로 확장된 세계에서 더 많은 선택의 기회와 풍요를 누릴 자격을 갖게 되었지만, 흙수저 가정에서 태어난 청년들은 개인의 능력과 별개로 알바와 비정규직을 전전하게 되는 ‘반쯤은 정해진 운명’에 도전하자는 것이다. 즉 태어난 배경 때문에 운명이 결정되는 ‘신종 신분사회’에 맞서, 사회가 태어난 신분을 ‘최소한 희석’해 줄 수 있는 제도, 사회적 상속을 해주자는 것이다.
김병권 / 서울시 협치자문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