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산율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③
“여성의 자유”의 문제
출산율 제고의 문제와 관련하여 이번에는 또 다른 판단 양식, 즉 “그것이 마땅히 해야 할 당위인가”라는 측면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 지점에서 너무나 중요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심하게 묵살하고 있는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여성의 자유”라는 문제입니다. 저는 이 문제에 대한 논의의 장에서 이 중차대한 문제를 암묵적으로 뭉개 버리고 넘어가는 경우를 너무나 많이 보았으며, 비록 남성이지만 같은 사람의 입장에서 소름이 끼칠 정도로 경악한 적도 많았습니다.
풍요와 다산은 이미 구석기 시대부터 장구한 시간 동안 인류가 높게 숭상해 온 가치였습니다. 구석기 시대에나 신석기 혁명 이후에나 최근까지도 어느 집단에 속한 성원들의 머릿수는 그 집단의 부와 권력과 (특히 전쟁 능력과) 직결되는 문제였다는 점을 볼 때 이는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가부장제 질서가 확립된 경우에는 이 풍요 다산이라는 것이 가치의 차원을 넘어서 한 국가와 집단의 절대적 지상명령이 되어 버리며, 여성은 이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의 위치로 전락하는 일들이 광범위하게 벌어졌습니다. 가임 여성들의 자궁을 놀려두는 일이 없이 계속 가동시키기 위한 장치로서 일부다처제나 축첩제가 허용되었고, 여성의 피임이나 유산 및 낙태는 이미 중죄로 여겨졌고 아시리아 제국 같은 경우에는 끔찍한 방식으로 여성을 처형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오래된 가부장제의 전통, 즉 많은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을 여성이 마땅히 감내해야 할 “하늘의 도리” 쯤으로 여기는 사고방식은 오늘날에도 곳곳에서 보입니다. 저는 출산율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여성의 자유”라는 문제를 제쳐두는 행태들이 바로 그러한 경우라고 믿습니다. 어느 국책 연구 기관의 박사급 연구자가 출산율 제고의 대책으로 여성들의 학력을 낮추고 노동 시장에서 불이익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이나 자녀를 많이 낳는 것이 바로 여성의 행복이라는 투의 홍보물 등이 모두 결코 우발적으로 생겨난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몇 년 전에 UN 산하 연구 기관에서 전 세계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출산율 감소 경향의 원인을 분석하여 내놓은 보고서를 본 적이 있었습니다. 출산율 감소는 이른바 선진 산업국가에서만 나타나는 일이 아니라 원래 무척 출산율이 높았던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에서도 나타나는 일이라는 점을 해명하고자 하는 보고서였습니다. 그전의 일반적인 통념은 선진 산업국가에서는 출산율 감소가 벌어지지만 개발도상국에서는 인구가 늘어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개발 국가들에서 경제 성장이 벌어지면서 물질적 생활 수준이 올라감에 따라 더 많은 아이를 낳으려고 하면서 출산율이 올라갈 뿐만 아니라 의료 보건 서비스가 개선되면서 유아 사망률이 크게 떨어지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늘어나는 인구가 잠재 성장률을 올리고 풍부한 노동 공급을 가져오면서 성장의 기폭제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90년대를 전후하여 이른바 “지구화”의 물결 속에서는 새롭게 산업화의 대열에 동참하게 된 나라들에서도 오히려 출산율이 감소하는 경향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에 인구학자들은 경제성장 그리고 사회 경제적 생활 수준의 변화와 출산율의 상관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고자 많은 연구를 행하였지만 만족스런 설명을 내오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특히 당혹스러운 현상은, 아직 본격적인 산업화와 경제성장이 시작되지 않아 기존의 저개발 상태를 크게 벗어나지 못한 나라들에서도 이 출산율 감소의 경향은 마찬가지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하여 이 UN 보고서에서는 사회 경제적 차원이 아닌 문화적 차원에서의 변화가 이러한 새로운 경향을 가져온 중요한 원인일 수 있다고 주목하고 있습니다. 다름 아닌 TV의 보급 등을 포함한 서구 미디어의 전 세계적 확산입니다. TV가 출산율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일까요? 바로 전 세계 모든 지역의 여성들이 선진 산업국가에 살고 있는 여성들의 생활 방식과 가치관을 접하게 된 사건입니다. 수많은 아이들을 낳아 업고 이고 젖먹이고 끌고 다니면서 온갖 가사 노동과 밭일 심지어 막대기 하나 휘두르면서 사자들까지 쫓아야 하는 나이지리아의 여성이 어느 날 TV에서 [앨리 맥빌]이나 [섹스 앤드 더 시티]에 나오는 미국 도시 여성들의 삶의 모습을 보고 미드의 세계로 빠져들었다고 합시다. 과연 아이를 더 많이 낳고 싶은 생각이 들까요? 되려 이미 너무 많이 낳은 게 아닐까라고 후회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러한 어머니 아래에서 자라난 딸들은 과연 어머니가 낳은 아이들 숫자만큼이라도 낳으려고 할까요?
문제는 여성들 스스로가 생각하는 “좋은 삶”의 상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경제학 교과서에서는 인간이 매분 매초 단위로 자신의 효용 극대화를 계산하여 최적의 선택을 하는 존재인 듯 (베블런의 비유에 따르면 자극이 올 때마다 “피뢰침처럼 반응”) 그리고 있지만, 현실에 존재하는 인간은 이런 찰나의 시간 지평으로 삶을 살아가지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고 자라나서 성인이 되고 늙고 죽기까지의 인생 주기 전체라는 훨씬 더 긴 시간 지평을 놓고 자신의 삶을 계획하며, 이번 주 이번 달이라는 단기적인 시간 계획 또한 그 큰 그림 안에서 뽑아내는 존재입니다. 여성들은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몸을 가지고 태어났으므로, 그녀들의 인생 계획 그리고 그 속에서의 “좋은 삶”의 구상에 있어서 출산과 육아라는 문제는 어떤 형태로든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반드시 넘어야 하는 큰 산입니다. 여성에게 억압적인 유형의 전통 사회에서는 그렇기 때문에 아예 여성들에게 “애 많이 놓고 잘 기르는 것만이 여자의 운명이자 행복”이라는 교조를 강제로 주입시키곤 했습니다. 하지만 “지구촌” 전체가 문화적으로 통합되어 나가는 오늘날의 세계에서 선진 산업국가 여성들이 가지고 있는 “좋은 삶”의 상은 전 세계로 확산되었고, 이는 개발도상국이나 미개발 지역의 여성들의 인생관에 있어서도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가져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산업사회가 도래하고 형식적 평등이 보편화된 오늘날의 사회에서 이러한 무지막지한 해결책은 전혀 통할 수가 없습니다. 교육 과정과 생산 활동에 있어서 남녀의 차이는 크게 사라졌으며, 산업혁명 이전의 전통 사회와 같은 생활 양식 또한 거의 사라졌습니다. 여성들은 이제 경제적으로나 정치 사회적으로나 동등하게 평등한 독립적 주체로서 자신의 “좋은 삶”을 능동적으로 계획하고 실현해 나갈 능력과 역량을 크게 신장한 상태입니다. “자유”라는 것은 워낙 크고 깊은 개념이라 일의적으로 정의하기가 쉽지 않지만, “개인과 집단이 스스로의 ‘좋은 삶’을 결정하고 또 그것을 스스로 추구해 나가는 상태”라고 규정하는 것에 크게 반대할 이는 없을 것입니다. 오늘날 여성들의 자유란 바로 이 복잡다단한 21세기의 산업사회에서 자기 개인과 여성들 전체의 “좋은 삶”을 스스로 찾아내고 스스로 실현하는 문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성의 신체에 운명처럼 결부되어 있는 출산이라는 문제는 그 “여성의 자유”, 달리 말해서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여성의 자기 결정권의 문제에 딸려 있는 하부 문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출산율 제고라는 목표와 여성의 자유의 확장이라는 목표 중 어느 것이 우선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단연코 두 번째라고 믿으며,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믿습니다. 후자를 희생하거나 뒷전으로 돌리면서 전자를 추구한다는 것은 곧 18세기 프로이센으로 아니 3 천 년 전 아시리아 제국으로 퇴행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 두 가지를 양자택일의 문제로 삼을 것이 아니라 최대한 조화시켜 나가면 되지 않느냐고. 다시 말해서 아이를 많이 낳아 기르는 것을 여성들 스스로가 “좋은 삶”으로 여겨 선택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 출산과 육아를 둘러싼 복지 시설 및 재정의 확장, 남성들의 육아 의무화, 각종 사회적 문화적 합리화 등을 제시합니다. 실제로 북유럽이나 프랑스 등 출산율 감소와 노령화의 문제에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대처한 나라들이 그 사례로 거론되기도 합니다. 물론 이는 사회를 합리적으로 개선하고 실질적인 평등과 기회를 확장하는 일 – 보편적 복지 국가의 실현 – 이므로 출산율 문제를 떠나서 마땅히 해나가야 할 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따뜻하고 합리적으로 보이는 대책 또한 “여성의 자유”라는 관점에서 보면 불편한 얼굴 하나를 숨기고 있는 게 보입니다. 바로 “사회 정책과 사회 공학을 통한 고도의 개인 통제”라는 것입니다.
여러 번 말했지만 여성의 자유란 출산 문제에 있어서 또한 모두가 자기 결정권을 가질 수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아무리 인간적이고 진보적으로 보인다고 해도, 이렇게 출산율 제고를 유도하는 사회 정책은 “넛지Nudge” 정도가 아니라 누구의 표현대로 “뻔히 보이는 손” (“보이지 않는 손”의 반대말의 의미)임이 분명합니다. 사실 스웨덴 등의 북유럽 나라들의 그 환상적으로 보이는 사회 정책들이 기실 모든 국민들을 남김없이 노동 시장에 적극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장치이기도 하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고, 거기에서 이탈하는 이들이 여러 유무형의 압력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출산 친화적인 사회 정책을 편다고 했을 때에도 이것이 여성들로 하여금 아이를 적게 낳거나 아예 낳지 않기로 결정하는 것을 꺼리게 만드는 유무형의 압력이 될 가능성이 분명히 있습니다. 사회 복지 정책이 사회 공학의 일부로서 갖게 되는 피하기 힘든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한번 상상의 날개를 펴서 “여성 기본소득” 같은 것을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10년간 출산율 정책 예산으로 100조가 쓰였다고 합니다만, 그 돈이 어디에 쓰인 것인지는 저로서는 참으로 짐작이 가지 않습니다. 초음파 검사 지원 카드가 나오지만 검사 많이 한다고 아이가 건강해지는 것도 아니고 사실 산부인과 보조금 정책이 아니냐는 불만이 나오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 돈을 매년 여성의 날을 기하여 모든 성인 여성 개개인들에게 똑같이 나누어 주는 것은 어떨까요? 물론 1년에 몇 만 원 밖에 되지 않는 액수이겠습니다만, 이는 여성들의 존재에 대한 사회 전체의 인정과 존중의 표현이라는 효과는 분명히 가져올 것입니다. (사실 여성들이 운명처럼 짊어지는 달거리의 부담과 고통에 대한 사회의 보상 차원에서라도 이는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는 여성들에게 아이를 (많이) 낳아야 한다는 어떤 유무형의 압력도 주지 않으면서 여성들의 지위를 최소한 명목적으로나마 개선하는 효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여성들은 보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출산 문제에 관한 자신들의 자기 결정을 행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상상일 뿐 실제로 여성 기본소득이라는 정책이 행해지려면 현실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이 한 둘이 아닐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상상은 만인에게 실질적 자유와 선택의 여지를 보장하는 목표와 사회 전체의 필요를 최대한 조화시키는 방법에 대해 여러 혜안을 주는 것은 분명합니다.
(다음 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