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과거가 미래를 먹어치우고 있다.(The past devours the future)”
과거가 미래를 먹어치우고 있다는 표현은 토마 피케티가 그의 베스트셀러 저서 『21세기 자본』에서 ‘세습자본주의(patrimonial capitalism)’를 비판하며 인용했던 구절이다. 정의당 심상정 의원이 지난 6월 13일 당대표 출마선언에서 세습자본주의 척결을 역설하면서 이 용어는 다시금 한국 언론지면에 등장한다. “불평등 해소를 정의당의 제1의 과제로 삼겠습니다. 불평등의 근본 뿌리인 세습자본주의를 개혁하고 경제적폐를 청산하겠습니다.” 그는 아울러 지난 2017년 대선시기에 공약했던 청년사회상속제도 거듭 확인했다.
현재의 불평등이 단지 횡단면적으로 사회구성원들 사이의 격차를 만들어냄으로써 빈곤과 상대적 박탈감을 키우고 그 때문에 사회분열과 갈등을 조장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지금세대의 소득불평등 누적은 자산불평등 격차의 확대로 귀결되고, 다시 다음세대로 확대 재생산된다. 과거에 축적된 자산이 미래세대의 운명을 사전에 결정해버리게 되면 미래세대는 동일한 출발선에서 비슷한 기회를 꿈꾸며 경쟁하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해진다. 이런 면에서 보면 현대 사회에 진짜 경쟁이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사회가 지나친 경쟁사회란 비판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 허수아비를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2. “경쟁은 패배자들을 위한 것이다?(competition is for losers)”
최근 많은 비판적 문헌들에서 공정한 경쟁이 실종되었다는 소리가 세계적으로 커지고 있다. 사회적 차원뿐 아니라 특히 경제적 차원에서 경쟁의 실종을 우려하는 목소리들이 높다. 경제에서 경쟁의 실종은 곧 독점을 의미한다. 최근 경제의 승자들이 자신들의 우월한 지위를 독점을 통해 굳혀나가면서 경쟁을 비난한단다. 비열하고 치졸한 부자들만의 얘기가 아니다. 세계적인 투자자로 칭송받는 거부 워런 버핏이나 실리콘 밸리의 대부 피터 틸 (Peter Thiel)같은 제법 개혁적일 것 같은 부자들이 앞장선다. “경쟁은 패배자들의 이야기 일뿐이라고.”
시장에서 경쟁이 점점 사라지고 독점과 과점이 세계경제를 거의 완벽하게 지배하고 있다는 얘기는 이제 확연한 것 같다. 그것은 특히 거대기술기업들로 가면 더 확연해진다. 미국에서 마이크로소프트의 뒤를 이어 애플, 구글, 아마존의 독과점적 지배가 시작된 것도 벌써 20년 가까이 된다. 페이스북의 SNS지배도 10년을 넘기고 있고, 뒤이어 우버와 에어비엔비가 7~8년째 독점력을 강화해가고 있는 중이다. 한국은 어떤가? 네이버와 다음-카카오의 독과점적 점유도 이제 꽤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시장에 진입하기 전에, 즉 청년들이 성장하여 기량을 쌓고 사회에 진입하는 과정에서도 공정한 경쟁 같은 것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세습자본주의가 평등한 기회를 갖는 입구를 차단해버렸기 때문이다. 부모가 누구인가에 따라 태어나서 성장하는 동네나 환경이 달라지고 이것이 미래의 기회에 영향을 준다. 청소년 시기의 교육은 본인의 희망이나 노력보다는 부모의 재력에 따라 확연히 갈라지게 된다. 간신히 입학했다 하더라도 대학과정은 ‘높은 등록금’ 문턱에 걸려서 역시 부모의 뒷받침이 없으면 효과적으로 전문역량을 쌓아 사회진출로 연결시키기가 쉽지 않다. 한국의 청년들이 왜 그렇게 대기업이나 공공 기관에서 하는 ‘공채시험’에 큰 관심을 보이면서 엄청난 ‘경쟁률’에도 불구하고 지원하는가? 그나마 어떤 부모 밑에서 태어났는지를 묻지 않고 자신의 역량만으로 평가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물론 이 조차도 부모의 도움으로 시험에 집중하는 청년과 알바를 병행하면서 고시준비를 하는 청년이 전혀 평등한 기회를 갖는 것은 아니지만.
3. ‘잃어버린 아인슈타인들(Lost Einsteins)’
미국에서 불평등 연구로 탁월한 업적을 남기고 있는 체티(Raj Chetty) 등이 최근 세대간 불평등이 어떻게 전이되고 있는지에 대해서 의미 있는 분석들을 다수 제시해주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잃어버린 아인슈타인들(Lost Einsteins)’에 관한 것이다. 이들은 부모의 가구소득 100분위에 따라서 자녀들이 발명가가 될 확률을 특허 데이터를 가지고 측정해보았다. 그랬더니 아래와 같이 중위소득 이하의 부모들의 자녀들은 발명가가 되는 비율은 1000명당 0.84명에 불과한 반면, 상위 1퍼센트 부모들의 자녀들은 10배에 해당하는 8.3명으로 나타났다. 부모소득과 발명가 자녀사이에는 확실한 상관관계가 존재하는 것이다.(더 상세한 자료들은 웹사이트 Opportunity Insights – https://opportunityinsights.org 에서 볼 수 있다.)
4. “불공정할 뿐 아니라 비효율적이다(It’s unfair, and it’s inefficient)”
체티 등 연구자들은 부모소득 차이에 따른 자녀들의 발명가 되기 차이뿐 아니라, 젠더와 인종에 따른 차이까지 추가로 밝혀내고 유사한 상관관계를 발견한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소득이나 젠더, 소수자등의 차이 때문에 자녀들이 발명가가 되지 못하는 요인들을 제거하고 모든 자녀들이 온전히 기회가 주어진다면, 지금의 4배 정도까지 미국에서 발명가 자녀들이 더 많이 나올 것으로 예측했다. 다른 말로 하면 자산이 다음세대로 전달되는 영향을 줄이고, 젠더격차와 인종격차 등까지 줄이면 미국사회 ‘전체’가 훨씬 더 혁신적인 사회가 될 것이라는 말이다.
정확히 부모 자산이나 소득이 자녀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자료가 우리나라는 아직 많이 부족하고 연구결과도 충분치 않다. 그러나 ‘흙수저’ 논쟁이 이미 꽤 지났던 점을 비추어볼 때 우리나라도 추세로 보아서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불평등을 세대로 확대 이전시키는 것이 단지 소득이 적은 부모의 자녀들 문제만은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잃어버린 아인슈타인들’이 저소득 가구 자녀들의 문제를 넘는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그것이 사회전체에 불공정한 게임을 조장한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사회경제발전을 위해서도 ‘비효율적’일 수 있다는 말이다. 경제학자 스티글리츠는 이런 취지에서 공정한 기회를 만드는데 정부가 실패하면 이는 단지 불공정한 결과를 만들뿐 아니라 비효율적 결과까지도 수반한다(“It’s unfair, and it’s inefficient”)고 지적한다. 요약하면, 불평등의 세대적 전이를 차단하는 것, 그것은 사회 전체를 위한 일인 것이다. 세대로 전이되는 불평등을 중간에 차단하는 가장 확실한 대책인 ‘사회적 상속’는 그래서 청년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문제다.
김병권 / 서울시 협치자문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