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자금 대출 빚 몽땅 갚아주겠다.”
지난 5월 19일 미국의 한 졸업식장이 주요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그 이유는 졸업식 축사를 해주던 한 억만 장자가 그 학교의 모든 졸업생 전원의 학자금 융자액을 몽땅 갚아주겠다고 약속했던 탓이다. 졸업생들의 빚을 대신 갚겠다고 나선 억만장자는 유명투자회사 CEO인 로버트 F 스미스였고, 로또를 맞은 학생들은 흑인들이 주로 다니던 애틀랜타에 있는 사립대학 모어하우스 칼리지였다. 스미스는 한 졸업생과 악수하면서 “빚 걱정 말고 세상에 나가서 일하라”고 격려했다고 한다. 도대체 졸업생들은 등록금 때문에 얼마나 많은 빚을 지고 있었던 것일까? 언론보도에 의하면 1인당 평균 3만 5,000~4만 달러(우리 돈으로 대략 4천만 원 이상)였다고 하고, 졸업생이 400명을 넘었으니 모두 합하면 적은 금액은 아니었을 것이다.
미국 대학의 등록금이 세계 최고수준이고 이 때문에 학자금 융자 부채가 신용카드 부채 규모를 넘어 미국의 가계와 경제 전체에 가장 큰 부담을 주고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대략 미국 대학생 약 4,500만 명이 1.5조 달러의 빚을 지고 있다고 한다. 심지어 60세가 넘어서 까지 학자금 대출을 갚아야 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라니 위에 언급한 억만장자의 선행이 언론 조명을 받을 만도 하다. 그런데 사실 문제는 대학 졸업식이 아니라 대학 입학부터 시작된다.
일단 대학 진학부터 태어난 가정환경에 따라 결정된다.
통상 기회의 평등이라고 할 때 그것은 “당사자가 열심히 노력하면 어떤 것도 달성할 수 있다”는 의미나, 혹은 “태어난 가정의 경제적 환경에 관계없이 모두가 비슷한 성공 가능성을 갖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하지만 부모가 누구인가는 사실 생애의 특정 시기만이 아니라 모든 중요한 고비마다 점점 더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리브스와 사휠(Richard Reeves, Isabel Sawhill)의 연구(Social Mobility)에 따르면 태어난 환경이 아동의 삶에 영향을 주고, 다시 초등학생의 삶에, 그리고 10대의 삶에, 다시 20대 청년의 삶에 영향을 주며, 인생의 전성기인 30~40대의 인생을 결정하는데 큰 영향을 준다고 한다. 그 결과 아래 그림과 같은 사회적 이동 단계가 만들어진다.
그런데 각 단계 가운데에서도 특히 대학 입시를 준비하기 위한 10대 청소년 시기를 어떻게 보내게 되는지는 부모의 재산과 소득, 교육 정도가 큰 영향을 주고 그 결과 어떤 대학에 진학하는지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에서는 1980~82년생 대학생 집단을 조사한 결과, 하버드 대학생 가운데 부모 소득 하위 20% 자녀는 겨우 3%에 불과했다고 한다. 반면 학생들의 70%는 부모소득이 상위 20%였고, 심지어 학생들 상위 15.4%는 부모의 소득이 상위 1%였다는 것이다. 이는 미국 아이비리그로 확대해도 비슷한데, 유력한 대학은 부자를 부모로 둔 자녀들의 전유물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Raj Chetty et al. 2017. Mobility Report Cards: The Role of Colleges in Intergenerational Mobility)
우리라고 다를까? 그렇지 않다. 김해영 의원이 2018년 10월 19일 한국장학재단으로부터 제출받은 ‘2018년 전국 대학교 의학계열 학생 소득분위 현황’에 따르면 부모 소득이 상위 10%에 속하는 학생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다.(김해영 의원실 보도자료) 더욱이 이는 장학재단에 장학금을 신청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분석한 것이라서 부모소득이 아주 높은 학생들은 신청 자체를 하지 않을 개연성이 커서 이 조차도 과소추정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장학재단은 부모소득 상위 20%에 대해서는 국가장학금을 지급하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부모의 재력은 한국사회에서도 이미 대학 진학 자체부터 큰 영향을 주는 것이다.
부모의 재력은 대학생활을 다르게 만든다.
그러면 간신히 턱걸이해서 어려운 가정 경제 환경에도 불구하고 상위권 대학에 진입하면 그 때부터 동일한 기회의 창이 열릴까? 결코 그렇지 않은데, 그 주된 이유는 바로 고액의 대학 등록금 때문이다. 앞서 미국 대학생들이 졸업할 때까지 누적된 학자금 부채를 언급했지만, 문제는 한국 대학과 대학생들도 결코 작지 않다. 현재 사립대학 기준으로 한해 평균 등록금은 740만원이고 의대의 경우는 960만원이 넘는다. 전액을 부모지원에 의지할 수 없는 학생들은 학교생활 기간 중 시간을 내거나 휴학을 하면서 각종 알바 등으로 등록금을 마련하거나 아니면 대출을 받아야 한다. 그렇게 해서 누적된 학자금 대출 채무자는 2018년 기준 14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오마이뉴스 2019-03-20) 대학에 진학해서도 성적관리나 스펙쌓기 등 치열한 경쟁이 계속 이어지는 것을 감안하면 등록금 마련을 위한 차별적 여건은 ‘기회의 평등’을 잠식하는 또 다른 요소다.
이는 또한 졸업 후 사회에 진입할 시점에서 다시 한 번 ‘기울어진 운동장’을 만드는 요인이 된다. 미국의 천문학적인 등록금 부채를 앞서 확인했지만 우리나라도 만만치 않다. 신한은행 설문조사 결과 2~30대 사회초년생(입사 3년 이내)의 부채 잔액은 2017년 2,959만 원에서 2018년 3,391만 원으로 14.6% 증가했다고 한다.(동아일보 2019-05-09) 끔찍한 규모다. 이 가운데 적지 않은 비중은 학생시절부터 누적된 것이고 학생시기의 부채는 대체로 등록금과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조사에 의하면 대학생의 대출 가운데 ‘학자금 대출’이 전체의 80%를 차지했고 20%가 소액 대출이나 신용 대출 등 주로 학비 이외의 생활비를 위해 대출한 것이라고 한다.(파이낸셜뉴스 2019-01-17) 이처럼 대학 등록금 부담은 저소득 층 학생들로 하여금, 대학생활 내내 알바 등으로 공부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고, 사회진입하기도 전에 부채 부담을 지게 되는 큰 요인이기도 하다.
함께 타고 갈 버스에 약간의 연료를 넣어주기 위해
이처럼 부모의 재력은 태어날 때부터 영향을 주기 시작해서 인생의 가장 중요한 전환점인 대학진학 시점에서, 그리고 대학생활 자체에서, 나아가 졸업시점에 영향을 점점 더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방향으로 사회가 변해가고 있는 중이다. 청년출발 자본은 이렇게 부모의 재력이 영향을 주는 인생의 변곡점 가운데 가장 중요한 시점인 20대 성인이 되는 시기에 부모의 재력과의 연결고리를 약화시키고 동등한 기회를 갖게 할 지렛대를 만들어주자는 것이다. 학자금 대출을 몽땅 갚아 줄 테니 세상에 나가 성공을 위해 도전하라고 격려한 우연한 억만장자 대신에, 국가와 정부가 모든 청년들에게 그 억만장자의 역할을 하자는 것이다. 청년출발 자본은 그런 취지에서 대학에 진학하는 청년들에게 대학 등록금이 될 수도 있고, 사회진입하기 위한 창업자금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스미스는 졸업 연설을 하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했다고 한다. “성공의 길로 가는 버스에 있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그 버스를 소유하고 직접 운전하며, 가는 길에 함께할 가능한 많은 이들을 태울 수 있어야 한다. 나는 당신들이 탄 버스에 약간이 연료를 넣어준 것뿐이다.” 우연한 억만장자의 출연을 기다리기보다는 국가가 청년들이 탄 버스에 약간의 연료를 넣어주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래서 서로 치열한 생존 경쟁이 아니라 성공의 길로 가는 버스에 함께 가면서 함께 원하는 방향으로 직접 운전해서 갈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하는 것이 아닐까?
김병권 / 서울시 협치자문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