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권의 GCC 아이디어> ‘세대 전쟁’이 정말 시작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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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는 2019년 7월 3일자의 서평 기사에서 아주 자극적인 제목을 단 기사를 실어 주목을 받았다. “세대간 전쟁: 누가 밀레니얼 세대의 미래를 도둑질해갔는가?(Intergenerational warfare: Who stole the millennials’ future?)” 이쯤 되면 거의 한국사회에서 386권력에 대한 집중적 비난 분위기에 버금할 만하다. 한국사회도 50대 정년연장이냐 20대 취업기회 확대냐를 둘러싼 논쟁이나, 국민연금 고갈시점 단축과 부담증액을 놓고 벌어지는 논쟁, 그리고 정치권력 자원의 386독식에 대한 논쟁 등 세대 간 자원배분 형평성 문제제기가 비록 분절적이지만 꽤 있기는 하다.

그런데 파이낸셜 타임스 기사는 우선 최근 정치적 투표성향이 계급이나 젠더, 인종에 따라 갈라지기 보다는 연령대에 따라 점점 확연히 갈라지는 경향에 주목한다. 예를 들어, 1974년이라면 영국인 노동자들은 보수당보다 노동당에 투표할 확률이 세 배가 더 높았단다. 그런데 현재 영국에서 계급별 투표 분포는 정당별로 비슷한 정도로 나눠져 있는 반면, 새로운 격차는 계급별이 아니라 연령별로 두드러진단다. 즉, 1970년대에는 모든 연령대에서 노동당에 40퍼센트의 지지율을 보여주는 등 연령대와 정치적 성향은 상관성을 보이지 않았지만, 최근에는 30대가 70대보다 노동당에 투표할 확률이 두 배 이상 높다고 한다. 당연히 보수당에서는 반대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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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미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지난 2016년 미국 대선국면에서 급격하게 부상했던 버니 샌더스 지지자들이 대부분 20대 청년들이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한국은 어떤가? 한국도 크게 보면 다르지 않다. 예를 들어 방송사들 출구조사에 따를 때, 지난 2017년 치러진 19대 대선에서 홍준표 후보는 20대에서 8.2퍼센트를 득표해서 모든 연령대 가운데 가장 낮았고, 반대로 70대 이상에서는 50.9퍼센트로 가장 높았다. 20대에 비해서 무려 6배 이상이 많다. 호남에서 홍준표 후보가 거의 득표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역별 편차를 빼고는 이렇게 큰 편차가 나는 것은 오직 연령대뿐이다. (물론 그대로 비교하기에는 무리가 따르지만) 2012년 18대 대선에서는 보수를 대표한 박근혜 후보가 20대에서 33.7퍼센트를 득표했지만 60대 이상에서 72.3퍼센트를 얻어 약 두 배 정도 격차가 벌어진바 있다. 그 당시에 비해서 현저하게 더 벌어졌다는 얘기다.

 

  단지 언제 태어났는지가 왜 점점 중요해지고 있을까?

그러면 정말 왜 ‘단지 언제 태어났는지’ 하는 구분이 이처럼 정치적인 성향의 현저한 차별을 만들어내도록 중요해지고 있는 것일까? 전부는 아니더라도 현대사의 경제적 변화 추이의 독특함 제외하고는 설명하기 어려울 것이다. 예를 들어, 한국을 기준으로 보면, 386세대(주로 50대)는 내수경제가 전성기에 오르고 불평등이 가장 낮아진 시점인 1988~1997년에 사회에 진입한다. 이 시기는 또한 전반적으로 연봉이 매년 높은 수준으로 거듭 인상되었고 부동산 가격마저도 상대적으로 안정기(1990년대)를 구가했던 정말 특별한 시기다. 당연하게도 이들이 이후 세대들에 비해 사회생활 초기시점에서 경제적 안정성이나 자산축적 기회가 많았던 것은 시기적 요인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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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1997년 외환위기를 전후로 사회에 진입한 세대(주로 40대)는 급작스런 경제충격과 비정규직 팽창, 등록금 폭등, 신용카드 대란과 부동산 가격 폭등이라는 대단히 불안정한 환경에 직면해야 했다. 이는 그 이전 세대와 완전히 다른 경험이다. 하지만 그래도 연 평균 4~5퍼센트의 경제 성장이 이뤄지는 것을 체험했고 그 와중에 일정하게 소득이 상승하던 시기였다. 그런데 다시 10년이 지나서 특히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에 경제생활을 시작한 세대(주로 20~30대)로 가보면 사정은 더욱 나빠진다. 경제적 성장이나 번영은 한 번도 구경해보지 못한 채 구조적으로 소득정체, 불안정한 일자리가 일상화되었고, 유일하게 안정된 취업기회로서 행정고시 준비가 아예 뿌리를 내리는가 하면, 상대적으로 다양한 공적 지원에 더 의존하면서 살았던 세대가 아닌가.

요약해 보면, 최근 30~40년 경제사의 공간에서, 성장률은 점점 둔화되는 방향으로 흐르고 노동유연화 등 제도변화 탓에 일자리는 점점 불안정해지며, 금융과 부동산 등 자산 가격만 폭등하는 현상들이 연령대별 경제적 경험의 단층선을 만들어 낸 것으로 보인다. 특히 성장세가 단계적으로 주저앉으면서, “앞 세대에 비해 뒤 세대가 더 윤택하게 사는 게 당연하다”는 전통적인 패턴이 깨지게 된다. 더욱이 인구조차 베이비 붐 세대로 정점으로 이후 세대로 내려가면서 줄어들게 되자 자원과 권력이 아래로 내려오지 않고 상당정도 위 세대에 머무르는 현상 때문에 자산격차가 연령대에 투영된 것이다. 이처럼 연령대는 경제적 단층선은 물론 인구 규모의 단층선으로 작용하면서 정치를 포함한 사회 모든 영역의 차이를 만들어 낸다.

 

세대간 정의로 바라본 부의 대물림

물론 당연한 것이지만, 얼핏 보기에 세대 사이의 격차로 보이는 것에도 내면을 보면, 상당 정도 세대 안의 심각한 불평등이 세대를 이어서 확대 재생산 되는 모습이 겹쳐서 나타난다는 점을 잊지 않아야 할 것 같다. 더 좁아진 기회, 더 불안정한 사회 환경, 더 치열해진 경쟁은 청년세대 모두가 직면한 현실이지만, 부모의 재력과 소득에 따라서 그 열악한 환경을 돌파할 수 있는 능력은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오히려 기회가 좁아질수록 부모가 동원해줄 재정, 교육, 인맥들의 영향력은 더욱 커지고 청년 내부의 격차 확대에 더 결정적인 영향을 주게 되지 않을까?

때문에 세대간 정의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앞 세대가 평균적으로 보유한 자원을 더 동원하여 미래에 투자함으로써 미래 세대 전체가 직면한 어려움들(부진한 경제성장, 열악한 교육환경 등)을 해소해야 하지만, 동시에 부모의 재력이 자녀들의 기회의 정도를 결정하는 연결 고리를 끊어내고 부모가 누군지에 관계없이 동일한 기회를 갖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유사한 맥락에서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최근 저서에서 세대 사이의 정의를 복구하기 위해 세 가지 정책 방안을 제안한다. 첫째는, 현재의 자원을 최대한 동원하여 교육투자, 인프라 투자, 기술투자 등 미래세대에게 전체적으로 기회의 창을 넓히기 위한 투자를 더 확대하자는 것이다. 둘째는, 기후변화 문제를 세대 사이의 정의 문제로 규정하고, 미래세대가 누려야 할 환경과 생태에 대해 통상적인 할인율을 적용하여 미래세대 환경의 현재가치를 저평가하지 말 것을 주문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부모의 재력여부에 따라서 다수 청년들이 더 나은 삶의 선택 기회를 얻지 못하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지적한다(스티글리츠의 2019년 저서 『민중, 권력, 수익』). 청년문제를 좀 더 거시적인 시야로 확장하여 정책 틀을 잡는데 도움이 될 제안이라고 생각한다.

세 번째 대안과 관련하여 글머리에 인용한 파이낸셜 타임스 기사는 끝부분에서 세대간 전쟁에 대처할 하나의 대안으로서, 청년들이 30세가 되었을 때 1만 파운드(약 1,500만원)씩 지급하는 일종의 사회출발자본을 제안하고 있다(one option is a capital endowment of perhaps £10,000 when a young person reaches the age of 30). 이런 식으로 사회적 상속은 곳곳에서 검토되고 있다.

김병권 / 서울시 협치자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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