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준의 그람시를 다시 읽자] 능동적이고 효과적인 중립

이 글은 그람시가 처음 발표한 중요한 정치 논설이다. 그가 최초로 세상을 향해 내뱉은 외침이며 그의 공생활이 시작됨을 알리는 첫 나팔 소리와도 같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에 발표됐으니 그의 나이 불과 23세에 쓴 글이다. 하지만 젊은 나이에 완전히 무명의 필자가 쓴 문장인데도 밀도가 아주 높다. 무엇보다 그람시가 평생에 걸쳐 발전시킨 문제의식의 단초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점이 놀랍다.

능동적이고 효과적인 중립[1]

현재 전 유럽적 위기 때문에 개인이든 정당이든 비상한 혼란에 빠져 있지만, 이 와중에도 누구나 동의하는 한 가지 사실이 있다. 지금 전개되는 역사적 국면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중대하며 그 결과는 엄청나게 거대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너무도 많은 피를 흘렸고 너무도 많은 생명력을 허비했기에, 우리는 과거로부터 물려받아 아직도 해답을 찾지 못하는 문제들에 대해 최대한 답을 찾아내야만 한다. 그래서 이러한 암울한 불운과 불의에 더는 가로막히지 않으면서, 또한 머지않은 장래에 이와 비슷한 또 다른 파국이 닥쳐 지금과 같은 인간 삶과 활동의 가공할만한 낭비가 재연되는 일 없이, 인류가 제 궤도로 돌아올 수 있게 해야 한다.

게다가 우리 이탈리아 사회주의자들은 다음 물음과 마주해야 한다. “이탈리아인들의 삶의 현 국면에서 이탈리아 사회당의 역할(나는 일반적인 사회주의나 프롤레타리아트의 역할을 묻는 게 아님을 강조하고자 한다)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왜냐하면 우리가 힘을 쏟고 있는 사회주의 정당은 이탈리아의 사회주의당, 즉 사회주의 인터내셔널[2]을 위해 이탈리아 국가를 획득할 임무를 지닌 인터내셔널 이탈리아 지부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직접적 임무, 일상적 임무 때문에 이탈리아 사회당은 특수하고 국민적인 성격을 지니게 되며, 이탈리아인의 삶 속에서 특별한 기능, 특수한 책임을 떠맡는다. 당은 점진적으로 성숙해가는 잠재적 국가다. 부르주아 국가와 경합하는 이 국가는 적과의 일상적 투쟁을 통해, 자체의 내적 변증법의 전개를 통해 적대자를 극복하고 흡수하는 데 필요한 기관을 창조하려고 노력한다. 또한 이러한 기능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당은 자주적이다. 당은 궁극 목표와 관련해서만, 당의 투쟁이 본질적으로 계급투쟁이라는 점과 관련해서만 인터내셔널에 의지한다.
반면 다양한 우발성 속에서 투쟁이 취해야 할 형태와 최종적 혁명을 향해 나아가며 때를 포착하는 과제와 관련해서는 이탈리아 사회당 자신만이 유일하게 합당한 심판관이다. 이탈리아 사회당만이 이 투쟁을 실제 경험하고 있고 현실 변화를 알아채는 유일한 조직체이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사회당은 ‘절대적 중립’ 공식을 선포하면서 G. 에르베Gustave Hervé[3]의 모욕과 독일 사회민주당의 조심스러운 태도 모두에 조소와 경멸을 퍼부었는데, 이는 오직 이런 맥락에서만 정당화될 수 있다. 에르베와 독일인들 모두 자기네가 인터내셔널의 공식 대변자라 믿으며 인터내셔널을 대표해 발언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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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분명히 짚자면, 여기에서 쟁점은 중립이라는 개념 자체가 아니라(물론 우리가 염두에 둔 것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중립이다) 이러한 중립이 취해야 할 형태이기 때문이다.
사건들이 갑자기 우리를 덮쳐서 그 거대한 규모에 비해 대비가 전혀 안 돼 있던 위기 초창기에는 ‘절대적 중립’ 공식이 참으로 유용했다. 왜냐하면 그 시점에는 오직 교조적일 정도로 비타협적이며 완고한 입장 표명을 통해서만 참전에 대한 열광과 개인적 이해관계의 첫 번째 격랑에 맞서는 난공불락의 굳건한 방파제를 구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이러한 초기의 혼돈 상황에서 혼란의 요소들이 사라졌고, 또한 누구든 스스로 책임을 떠맡아야만 하는 처지다. 따라서 이 공식은 이제는 제비뽑기[4]를 하고 싶지는 않다고 말하는 개혁주의자들(하지만 이들은 다른 사람들이 도박에 뛰어들어 판돈을 따는 것은 말리지 않는다)에게나 쓸모 있을 따름이다. 개혁주의자들은 차라리 프롤레타리아트가 어느 팀도 응원하지 않는 관중 마냥 사태를 지켜보기만 하다가 저절로 기회가 열리길 기다리길 원한다. 그러는 동안에 우리의 적들은 스스로 기회를 창출하며 저들 입장에서 계급투쟁의 무대를 준비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역사를 자신들의 행동의 결과로 이해하며 그러한 행동의 주 내용이란 곧 사회 안의 다른 능동적이거나 수동적인 세력들에게 가하는 끊임없는 일련의 일격이라 여기는 혁명가들이라면, 그리고 최후의 일격(혁명)을 가하기에 가장 유리한 조건을 준비하는 혁명가들이라면, ‘절대적 중립’이라는 초기의 잠정적 공식에 만족해서는 안 되며 이를 ‘능동적이고 효과적인 중립’[5]이라는 대안적 공식으로 전환해야 한다. 이는 국민의 삶의 중심에 계급투쟁을 복귀시킨다는 뜻이다. 노동계급은 권력을 쥔 계급이 책임을 떠맡지 않을 수 없게 만듦으로써, 집권 계급이 자기 존재 이유를 끌어내는 전제들을 그 논리적 결론으로까지 밀고나갈 수밖에 없게 만들고, 자기 목표라고 주장하는 바를 달성할 준비가 돼있는지 확인하는 시험에 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듦으로써 이들이 그 목표를 실현하는 데 철저히 실패하고 말았다는 사실을 (우리의 경우는 이탈리아에서) 받아들이도록 몰아갈 것이다. 왜냐하면 집권 계급은 자기네가 국민의 유일한 대변자라 자처하면서 이 나라를 막다른 골목길로 이끌어 버려 이제 이 나라는 비참한 현 상태에 직접적 책임이 있는 그 모든 제도를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내버리지 않고는 이 상태에서 빠져나갈 길이 없기 때문이다.
오직 이런 방법을 통해서만 부르주아지 대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 대립은 회복될 수 있으며, 사회당은 전쟁의 공포 탓에 덮어쓴 부르주아의 외피를 벗어버릴 수 있다(지난 두 달만큼 많은 이들이, 진지하든 아니든, 사회주의에 동조한 적은 없었다). 권력을 위임받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아무런 행동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국민(이탈리아에서 이는 단순히 프롤레타리아트만도 아니고 부르주아지만도 아니다. 이 나라에서는 주어진 협소한 이익을 놓고 광범한 인민 대중이 정치 투쟁에 참여해왔다. 따라서 이 나라는 자신들이 어디로 나아가는지 분명히 알며 열정 또한 충만함을 증명하는 이들에게 넘어갈 가능성이 다른 어느 곳보다 높다)에게 더 없이 명백하게 보여주었기에 당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지배 계급을 대체하도록 준비시킬 수 있으며 문명이 불완전한 형태에서 보다 완전한 형태로 이행하는 신호가 될 최후 최대의 일격에 나서도록 준비시킬 수 있다.
따라서 나는 a.t.[6]가 <일 그리도 델 포폴로Il Grido del Popolo>[7]지난 호에서 이른바 무솔리니 파동에 대해 글을 쓰면서 좀 더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고 생각한다. 그는 <아반티!Avanti!>[8]편집자[무솔리니]의 선언에서 무솔리니Benito Mussolini가 인간, 로마냐 지방인(이러한 지역적 배경의 의미는 이미 논의된 바 있다)으로 말한 바와 그가 사회주의자, 이탈리아인으로 말한 바를 구별했어야 했다. 즉, 그는 일단 무솔리니의 입장에서 가장 독창적이며 가장 생동감 넘치는 게 무엇인지 판별했어야 했으며, 이 입장에 대한 비판의 방향을 잡는 일은 이를 박멸하기 위해서든 아니면 당 지도부 나머지의 교조적 형식주의와 <아반티!> 편집자의 구체적 실용주의를 화해시킬 수단을 찾기 위해서든 그 다음에 했어야 했다.

안젤로 타스카(Angelo Tasca)와 사회당 토리노지부 기관지 <일 그리도 델 포폴로>
그러나 어쨌든 나는 a.t. 주장의 핵심에서 오류를 발견한다. 무솔리니가 이탈리아 부르주아지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을 때, 즉 “당신들의 운명이 이끄는 대로 가라”, 달리 말해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하는 것이 당신들의 의무라 믿는다면 프롤레타리아트는 당신들의 행동에 대해 사보타주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을 때, 그는 결코 a.t.가 ‘전쟁의 부정적 신화’라 부르는 바로 발전했던 리비아 전쟁[9]에 대한 과거 자신의 입장에서 물러선 것이 아니다. 부르주아지에게 이야기하면서 ‘당신들의 운명’이라 할 때, 그는 부르주아 계급의 역사적 역할 때문에 이들의 운명이 전쟁에 끌려들어갈 수밖에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무솔리니의 선언에서 전쟁은 프롤레타리아트 운명의 돌이킬 수 없는 반反명제라는 성격을 그대로 유지한다. 이 성격은 프롤레타리아가 이 사실을 더 뚜렷이 의식하게 될수록 더욱 명백해진다.
결국 무솔리니가 원하는 바는 모두 다 화해하자는 것도 아니고 모든 정당이 한데 뭉쳐 거국일치를 과시하자는 것도 아니니, 왜냐하면 그럴 경우 그의 입장은 반反사회주의라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가 희망하는 바는 프롤레타리아트가 하나의 계급으로서 자신의 권능과 혁명적 잠재력에 대해 명확히 자각하기는 하지만 아직 국가를 수중에 넣을 태세까지는 아닌 국면임을 깨달아 […] 이상적인 규율,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의 힘을 자유롭게 풀어놓아 자신감을 느끼게 하면서도 당장은 지배계급을 대체할 처지가 아님을 알게 해줄 것이다. 게다가 기계를 사보타주한다고 하여(왜냐하면 절대적 중립이란 사보타주 외에 다른 무엇이 아니며, 무엇보다도 지배계급이 열렬히 환영할 사보타주이기 때문이다) 기계가 완전하지 못함이, 전혀 쓸모가 없음이 증명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무솔리니의 입장은 프롤레타리아트가 무조건 반대만 하고 보는 태도를 그만 둘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도 아니며, 지배계급 쪽에서 실패하거나 허약함을 드러내고 난 뒤에 이 계급 전부를 제거하고 통치권을 장악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도 아니다. 적어도 내가 두서없는 그의 선언을 제대로 이해했고 무솔리니 자신이 발전시켰어야 할 방향에 맞게 그 내용을 발전시켰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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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절대적 중립이라는 스위치를 눌러 7월에 작동을 시작했지만 10월인 지금에 와서는 때려 부수지 않는 한 정지시킬 수 없는 동력기쯤으로 프롤레타리아를 바라보지는 않는다.
아니, 우리가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특히 지난 몇 년간 명민한 지성과 신선한 감수성을 지녔음을 보여준 사람들이다. 이들에 비한다면, 흐리멍덩하고 무감각한 부르주아 대중은 그 꽁무니조차 따를 수 없다. 우리가 다루는 대중은 새롭게 재생한 사회당이 퍼뜨리기 시작한 새로운 가치를 삶에 불러들여 소화할 능력을 지녔음을 입증하기까지 했다. 혹여 우리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이 새 과업을 떠맡게 하려면 수행해야 할 작업, 부르주아지의 온정의 대상이라는 지위를 끝낸다는 첫 신호일지 모르는 작업에 지레 겁먹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무튼 절대적 중립이라는 태평한 입장 때문에 우리가 현 상황의 중대성을 망각하거나 잠시라도 자포자기에 빠져 너무도 순진하게 수동적 관조를, 우리의 권리에 대한 불교적 포기를 선택해서는 안 된다.<일 그리도 델 포폴로> 1914년 10월 31일

[주] 
[1]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이탈리아는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동맹국임에도 중립을 선언했다. 이탈리아 사회당은 당론으로 ‘절대적 중립’ 입장을 채택했다. 정부가 참전을 보류했기에 다른 나라 좌파정당들과는 달리 이탈리아 사회당은 편하게 ‘전쟁 반대’를 외칠 수 있었다. 그러나 당 기관지 <아반티!> 편집장이자 당 내 좌파에 속했던 무솔리니는 <아반티!> 1914년 10월 18일자에 「절대적 중립에서 상대적이고 효과적인 중립으로」라는 논설을 발표하며 당론에 반기를 들었다. 특정한 조건에서는 이탈리아도 참전해야 한다는 게 그 글의 주된 논지였다. 무솔리니는 당 지도부에서 고립됐고, <아반티!> 편집장에서 쫓겨났다. 11월 말에 그는 결국 출당 당한다.
[2]1889년에 파리에서 설립된 제2차 인터내셔널을 가리킨다. 이탈리아 사회당을 비롯한 유럽 각국 좌파정당들이 가입해 있었다.
[3]1871-1944. 프랑스 정치가. 원래는 프랑스 사회당 안에서 혁명적 사회주의를 대변하며 반군국주의 투쟁에 앞장섰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을 앞두고 갑자기 전투적 민족주의자로 돌변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무솔리니처럼 아예 초기 파시스트 운동에 뛰어들었다.
[4]원문에는 terni secchi라 되어 있다. 이탈리아의 전통적인 제비뽑기 도박이라 한다.
[5]무솔리니가 주장한 ‘상대적이고 효과적인 중립’을 조금 변형한 공식이다.
[6]안젤로 타스카Angelo Tasca, 1892-1960. 이탈리아 정치가, 역사가. 그람시와 함께 <오르디네 누오보L’Ordine Nuovo(신질서)>를 창간했고, 이탈리아 공산당 창당에도 함께 했다. 그람시보다 먼저 사회당 청년당원으로 활약하던 타스카는 <아반티!>에 무솔리니의 도발적인 문제제기가 실리자 사회당 토리노지부 기관지 <일 그리도 델 포폴로>에 무솔리니를 반박하는 논설 「전쟁의 신화」를 발표했다. 타스카는 나중에 공산당의 반파시즘 노선을 두고 그람시, 팔미로 톨리아티Palmiro Togliatti와 대립했고, 프랑스에 망명한 뒤에는 혁명운동에서 이탈했다.
[7]‘민중의 함성’이라는 뜻. 이탈리아 사회당 토리노지부 기관지.
[8]‘전진’이라는 뜻. 이탈리아 사회당 전국 기관지. 1896년에 창간했다. 전통적으로 당 의원단은 개혁주의자들이 장악했지만, <아반티!> 편집진은 늘 혁명적 좌파가 맡았다. <아반티!>를 중심으로 모인 이탈리아 사회당 좌파를 흔히 ‘최대강령주의자’라 부르곤 했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초기에는 무솔리니가 좌파의 총아로서 편집장을 맡고 있었다.
[9]1911년에 이탈리아는 해외 식민지를 확보하려는 제국주의적 의도로 당시 오스만튀르크 제국령이던 리비아를 침략했다. 이때 사회당 좌파는 반전 입장을 고수했다.
[해설]
이 글은 그람시가 처음 발표한 중요한 정치 논설이다. 그가 최초로 세상을 향해 내뱉은 외침이며 그의 공생활이 시작됨을 알리는 첫 나팔 소리와도 같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에 발표됐으니 그의 나이 불과 23세에 쓴 글이다. 하지만 젊은 나이에 완전히 무명의 필자가 쓴 문장인데도 밀도가 아주 높다. 무엇보다 그람시가 평생에 걸쳐 발전시킨 문제의식의 단초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점이 놀랍다. 이 글과 『옥중수고』 사이에는 20여 년이라는 짧지 않은 세월이 있지만, 주요 주제들의 인상적인 반복 때문에 마치 하나는 오페라의 서곡이고 다른 하나는 그 대단원인 듯한 느낌을 준다.
더구나 극적인 것은 이 글이 당시 사회당 전국 일간지 <아반티!> 편집장이던 베니토 무솔리니가 촉발한 논쟁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파시즘의 창시자로 아돌프 히틀러의 선배 격인 무솔리니는 본래 좌파 투사였다. 1883년생으로 그람시보다 8살 위인 무솔리니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무렵, 이탈리아 사회당 내 좌파의 총아였다. 그는 그람시 같은 젊은 당원들의 지지를 받으며 사회당의 입이라 할 수 있는 <아반티!> 편집권을 장악했다. 덕분에 <아반티!>는 필리포 투라티Filippo Turati(1857-1932) 의원이 이끌던 당 내 우파의 강력한 거점인 의원단에 맞서 좌파의 보루가 됐다.
편집장 시절의 베니토 무솔리니와 이탈리아 사회당 전국 기관지 <아반티!>
그랬던 무솔리니가 좌파에서 벗어나 파시즘으로 나아가기 시작한 첫 계기가 1914년 이탈리아 사회당의 전쟁 방침 논쟁이었다. 다른 참전국들과 달리 이탈리아는 제1차 세계대전에 즉각 뛰어들지 않았다. 자유주의 연합 소속의 안토니오 살란드라Antonio Salandra(1853-1931) 총리가 이끌던 정부는 영국-프랑스-러시아 진영과 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오스만 진영 중 어느 쪽에 가담할지를 놓고 저울질을 계속했다. 그러다 1915년 5월에야 영국-프랑스-러시아 편에 서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선전포고했다. 이탈리아는 개전 전에는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삼국동맹을 맺은 나라였지만, 자유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들대로 영국, 프랑스와 한편에 서길 원했고 민족주의자들은 또 그들대로 숙적 오스트리아와 일전을 벌이길 원했기에 이렇게 말을 바꿔 탄 것이다.
참전을 결정하기까지 약 1년간 사회당의 당론은 ‘절대적 중립’이었다. 전쟁에 반대한다는 제2인터내셔널 방침의 연장이었다. 다른 나라 자매정당들은 하나같이 이 방침을 지키지 못했다. 제2 인터내셔널의 최대 정당인 독일 사회민주당은 한때 반전 총파업 전술을 저울질하기는 했지만, 결국 군부와 타협해 전쟁 예산을 통과시켜주었다. 유럽 반전운동의 상징 장 조레스Jean Jaurès가 암살당하자 프랑스 사회당 역시 전쟁 지지 입장으로 선회했다. 이들 정당에 비하면, 이탈리아 사회당은 편하게 지조를 지킨 셈이었다.
그러나 ‘절대적’ 중립은 곧 ‘수동적’ 중립의 다른 표현이었다. 사회당은 무슨 반전 ‘운동’을 벌인 게 아니었다. 어느 편에 설지 결정하지 못해 참전 시점을 미루던 이탈리아 지배계급 덕분에 체면을 세울 시간을 좀 벌었을 뿐이다. 무솔리니는 이게 불만이었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포부를 지닌 정치 세력이라면, 세계 전쟁 같은 역사의 대전환기에는 누구보다 더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서야 한다. 절대 중립 당론은 이런 행동의 연기 혹은 회피에 다름 아니다. 이를 넘어서는 새로운 입장이 필요하다. 10월 18일 무솔리니는 <아반티!>에 이런 논지를 담은 장문의 논설 「절대적 중립에서 상대적이고 효과적인 중립으로」를 발표했다.
사회당은 일대 논란에 휩싸였다. 일단 당 중진들은 무솔리니가 사실상 참전론을 주장한다고 봤다. 그래서 당장 당론 위반 책임을 물어 <아반티!> 편집권을 빼앗았다. 그간 무솔리니를 우호적으로 바라보던 젊은 당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다. 그람시가 글에서 비판 대상으로 삼은 토리노지부의 또 다른 청년당원 안젤로 타스카는 지도부와 마찬가지로 무솔리니의 주장이 참전론이라고 단정했다. 그는 한때 이탈리아의 리비아 침략을 앞장서서 반대했던 무솔리니가 이제는 이탈리아를 전쟁의 참화 속에 밀어 넣으려 한다며 공박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당에서 쫓겨난 무솔리니는 실제로 영국-프랑스 편에서 전쟁에 뛰어들자는 여론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 파시스트당으로 발전하게 되는 신생 극우파 운동의 시작이었다. 훗날 무솔리니는 이 시절 자신의 입장 전환을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 국민들은 전쟁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 있었다. 나는 그것을 선동하고 있었다. 당시 사회당은 다른 정당의 힘이 사회당보다 미약했기 때문에 이탈리아 사회에 어느 정도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사회당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이탈리아의 사회당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사회당의 다수는 절대 중립―시간의 제한, 서약, 위엄 전부를 무시한 중립―을 주장하고 있었다. 같은 당원 가운데는 공공연하게 독일에 대한 지지를 표하는 사람들도 다수 있었다. 나는 그쪽 편에 서지 않았다. 소수의 총명하고 굳건한 의지를 가진 인물들이, 프러시아왕의 정치 목적을 위해 이탈리아인을 동원하는 것이 정당한 일인지, 그것이 이탈리아 및 세계의 장래에 행복을 가져다주는 일인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나는 <아반티!>를 통해서 이러한 문제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그것을 각 계급의 시민들이 열심히 읽었다. 이 문제를 제출한 것이 저널리즘에 대한 나의 가장 뛰어난 노력이었다.” 베니토 무솔리니, 『무솔리니, 나의 자서전』, 김진언 옮김, 현인, 2015. 49-50쪽.
청년 그람시도 이 논쟁에 뛰어들었다. 무솔리니의 글이 발표되고 2주일쯤 뒤인 10월 31일에 사회당 토리노지부 기관지 <일 그리도 델 포폴로> 지면에는 그람시가 서명한 첫 번째 논설이 실렸다. 제목인 “능동적이고 효과적인 중립”은 무솔리니의 정식을 조금 변형한 것이었고, 똑같이 기존 당론(절대 중립)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었다. 이 글에서 아직 무명인 이 젊은 필자는 무솔리니의 논지를 자기 입장에서 재해석하면서 애써 변호했다. 그래서 당시에도 그람시 역시 무솔리니처럼 참전을 지지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다.
그람시의 이후 삶을 아는 우리에게는 참으로 아이러니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람시는 무솔리니를 편드는 글로 문필 생활을 시작했지만, 무솔리니는 이후 그의 숙적이 됐다. 전쟁이 끝나고 그람시가 ‘붉은 두 해’ 동안 이탈리아 혁명에 발 벗고 나설 때, 무솔리니는 파시스트당을 꾸려 반혁명을 착착 준비했다. 파시스트 운동이 급성장해 국가권력을 장악하자 그람시는 이 전대미문의 사건을 분석하며 신생 이탈리아 공산당의 정치 노선을 발전시켰다. 그람시가 의원이 돼 무솔리니 정권에 정면으로 맞서자 무솔리니는 결국 그람시를 감옥에 가뒀고 마침내 목숨까지 앗아갔다. 그러고 보면 그람시 삶의 큰 줄기는 무솔리니와의 한판 대결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능동적이고 효과적인 중립」은 이 대결극의 참으로 기이한 시작이었다.
그럼 오늘날 이 논설을 다시 읽는다는 것은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가? 어쩌면 젊은 치기에서 나온 한때의 오류 정도를 드러내는 글은 아닌가? 그런 면도 있지만, 이를 압도하는, 주목할 만한 문제의식 또한 있다. 무엇보다도 그람시가 정치를 바라보는 독특한 관점과 만날 수 있다.
이 글에서 그람시의 주된 논지는 어쩌면 무솔리니 옹호가 아니다. 그보다는 무솔리니를 비판하는 세력에 대한 비판이 핵심이다. 바로 투라티가 이끌던 당 내 개혁주의 분파에 대한 비판이다. 그람시는 왜 이들을 비판하는가? 그들은 정치 투쟁 속에서 마치 도박판처럼 과감한 선택을 요구받을 때에 이를 외면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스스로는 어떤 선택도 감행하지 않으면서 다만 다른 세력들의 선택을 지켜볼 따름이다. 그들은 사태를 수동적으로 관조하기만 하다가 저절로 기회가 열리길 기대한다. 사회당의 원내 정치를 독점한 개혁주의 분파가 이렇게 수동적 태도로 일관하는 동안, 적대 세력들은 스스로 기회를 창출하며 자기에게 유리한 전장을 조성한다.
그람시가 생각하는 ‘정치’란 정확히 이런 행태의 정반대를 지향한다. 그가 개혁주의자에 대비해 열거하는 혁명가의 특징에서 그러한 ‘정치’의 내용을 추출할 수 있다. 그것은 사회 안의 다른 능동적이거나 수동적인 세력들에게 끊임없이 일련의 일격을 가하는 것이며, 최후의 일격을 가하기에 가장 유리한 조건을 준비하는 것이다. 즉, 부단히 기존 세력 균형을 격동시키고 변형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이탈리아 사회가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로만 이뤄진 단순한 사회가 아니라 여러 계급이 협애한 이익을 둘러싸고 첨예한 정치 투쟁을 펼치는 복잡한 사회이기에 더욱 그렇다. 이런 사회에서는 오직 “자신들이 어디로 나아가는지 분명히 알며 또한 열정도 충만함을 증명하는” 세력만이 승리할 수 있다.
그람시는 기존 당론인 절대적 중립 공식에서 개혁주의 분파의 전형적인 정치 행태를 보았다. 반면 무솔리니의 문제제기에서 자신과 비슷한 정치관을 찾았다. 말하자면 그람시가 지지한 것은 무솔리니의 주장에 배어 있는 일말의 참전론이 아니라(그람시는 무솔리니의 주장이 참전론일 경우 분명히 사회주의에 반한다고 밝히고 있다) 서로 공유한 어떤 정치관이었다. 어쩌면 이렇게 둘의 정치관에 비슷한 점이 많았기 때문에 두 사람은 더욱 치열하게 대립할 수밖에 없었는지 모른다.
여기까지만 이야기하면, 그람시의 정치관은 다분히 의지주의적으로 보인다. “역사를 자신의 행동의 결과로 이해”하는 태도는 혁명의 조건 자체를 혁명 주체의 행위로써 만들어낼 수 있다는 극좌적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그람시를 이야기할 때면 흔히 인용되는 로맹 롤랑Romain Rolland(1866-1944)의 저 유명한 표어 “지성의 비관, 의지의 낙관”이 그람시에게 이런 인상을 덧씌우곤 한다.
그러나 그람시가 이 글에서 밝히는 또 다른 필생의 문제의식에 주목한다면, 이것이 적어도 그람시에게 어울리는 이미지는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이탈리아 사회의 구체적 상황에 대한 관심과 강조다. 그람시는 이탈리아 사회당이 추상적인 ‘자본주의’ 안에서 행동하는 것도 아니고 지구 자본주의에 맞서는 단일한 전 지구적 주체의 한 부분만도 아니라고 지적한다. 이탈리아 사회당은 분명히 “이탈리아인의 삶 속에서” “이탈리아 국가를 획득”하기 위해 실천한다. 그렇기에 이탈리아 사회주의자는 이탈리아인 삶의 현 국면을 이해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해야만 한다. 달리 말하면, 현재 이탈리아에 독특하게 나타나는 사회 세력 간 관계와 균형을 파악해야 한다. 기존 세력 균형을 격동시키고 더 나아가 역전시키려는 부단한 시도는 반드시 이러한 탐색과 분석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후자가 없다면 전자는 분명 의지주의에 빠져들고 말 것이다. 그러나 후자를 전제한 전자라면 이야기가 전혀 다르다. 그람시가 최초의 논설에서부터 분명히 한 방향은 물론 이 쪽이었다.
이탈리아인 삶의 현 국면에 대한 구체적 분석. 이후 그람시가 제안하고 실험하고 발전시킬 모든 개념들은 바로 이러한 분석을 위한 도구들이었다. 「능동적이고 효과적인 중립」에서는 아직 이런 개념을 발견할 수 없지만, 훗날 그람시가 무엇을 위해 험난한 실천 와중에 혁신적인 사고 실험을 거듭했는지 선명히 밝혀준다.
장석준 /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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