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니얼은 기존의 사피엔스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별종이거나 다른 별에서 온 외계인일까? 함께 지내기 위해서는 책 한 두 권 가격을 지불해야 할 만큼의 특별한 노력과 공부가 필요한 신인류일까? 혹은 이전의 다른 세대들이 사실은 그러했듯, 동시대의 정치·경제·사회·문화적 배경으로부터 받은 영향을 공유하는 또 다른 청년 세대일 뿐인 것은 아닐까?
우주↗선에서↘↗ 외계↗인이↘ 내려와↗ 하↗는↗ 말↗♪♬
밀레니얼Millenials이 호명되고 있다. 미디어와 출판시장에서 ‘신세대’(라고 쓰고 ‘외계인’이라고 읽는다)와 동의어로 통용되는 밀레니얼은 이제 담론이라 칭해도 될 정도로 최근 몇 년 사이 가장 자주 언급되는 ‘세대’다.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사람들을 일정한 특성에 따라 하나의 집단으로 묶는 세대 담론은 갑작스러운 일이 아니다. 세대를 규정하는 기준은 그 세대를 부르는 이름을 보면 알 수 있다. ‘베이비붐 세대’는 특정 시기의 사회 구조적 특성을 반영한다. ‘386세대’는 출생 시기를 기준으로 하는 듯하나, 사실은 특정 계급집단(‘386’이라는 용어에는 ‘학번’이 포함되어 있다)을 일컫는다. ‘X세대’는 특정 시기 출생자들의 불가해한 독특성(이라는 것이 존재했다는 가정 하에)에 붙은 이름이다.
한편 ‘밀레니얼’이라는 이름에서 읽어낼 수 있는 정보는 ‘새천년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것뿐이다. 말하자면 이 이름은 그저 시간대를 가리킨다. 위의 조어 방법에 비추면 밀레니얼 세대라는 명칭이 존재해야 할 명분이 모호하게 느껴진다. 시차는 세대를 구분하는 일반적인 기준이기는 하지만, 그 세대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다.
밀레니얼 세대라는 말을 너도 나도 쓰기 시작한 지는 오래되지 않았지만, 이 세대가 어느 날 갑자기 우주선에서 뚝 하고 떨어진 것은 아니다. 이들은 태어난 지도 한참이고, ‘밀레니얼’이라는 이름을 부여받기 이전에 이미 N 세대, 에코 세대, 월드컵 세대, 테크 세대, N포 세대 등으로 불린 바 있다. 최근에는 IMF 외환위기 30년을 맞아 ‘IMF 키즈[1]’로 호명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심지어 ‘밀레니엄’이라는 말조차 잘 쓰지 않게 된 지금에 와서)밀레니얼이라는 호칭이 새로이 유행하기 시작한 것은 굳이 그렇게 해야 할 필요가 생겼기 때문일 것이다.
[그림 1] ‘밀레니얼’을 다루는 책 표지들을 보면 이 담론이 어떤 지형에서 형성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언제나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보통 어떤 세대 집단을 규정하여 불러내는 배경에는 정치적 목적 혹은 산업적 필요가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전자는 표 계산을, 후자는 HR[2]과 마케팅을 말한다. 최근 쏟아져 나오고 있는 밀레니얼 관련 단행본들이 대부분 서점의 경제·경영 서가에 자리 잡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경우는 후자에 해당된다고 추측할 수 있다. 이 책들의 표적 독자층은 밀레니얼의 개념 자체보다도 더 뚜렷하다. 이는 노동시장에 진입하기 시작한 밀레니얼 세대 부하 직원과 함께 지내야 하는 ‘기성세대’ 혹은 주 소비층으로 등장한 밀레니얼 세대를 공략해야 하는 산업계 종사자(마찬가지로 ‘기성세대’)들이다.
결국 밀레니얼 담론이 답하려 하는 질문은 이것이다. ‘부하 직원과 소비자로 등장한 밀레니얼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이를 위해 밀레니얼 세대는 타의적으로 하나의 세대라는 프레임에 묶여 규정되고, 범주화되고, 특징지어지며, 해설된다. 밀레니얼 담론에서 밀레니얼은 호명될 뿐 호출되지는 않는다. 사실상 이 세대 담론은 당사자의 자기표현에 기초하고 있지 않은데다 기성세대의 시선에서 납작하게 타자화되어 바라보아진 왜상歪像이라 할 수 있다.
밀레니얼은 기존의 사피엔스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별종이거나 다른 별에서 온 외계인일까? 함께 지내기 위해서는 책 한 두 권 가격을 지불해야 할 만큼의 특별한 노력과 공부가 필요한 신인류일까? 혹은 이전의 다른 세대들이 사실은 그러했듯, 동시대의 정치·경제·사회·문화적 배경으로부터 받은 영향을 공유하는 또 다른 청년 세대일 뿐인 것은 아닐까?
그래서 밀레니얼은 누구인가
일반적으로 알려진 밀레니얼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그들은 대부분 386세대의 자녀로, ‘꼰대’를 싫어하며, ‘워라밸’을 중시하고, 재미와 단순함을 쫓으며, 회사에 충성하지 않고, 윤리적 소비를 지향하며, 대기업 공채에 지원하기보다는 9급 공무원이 되기를 희망하는 낯선 존재들이다, 등등.
여기에 나열된 밀레니얼의 습성 리스트가 정말로 밀레니얼의 보편적인 DNA인지 아닌지를 논하는 것은 적어도 이 글에서는 중요하지 않다. 어떤 세대를 현상적·단편적으로 파악하는 데 그치는 세대 담론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밀레니얼 세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 가상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려는 것 또한 아니다. 이 글은 밀레니얼 세대가 그 전 세대와 다른 모종의 구획에 존재한다는 전제를 수용한다. 따라서 이들이 공유하는 ‘세대 정체성’의 존재 역시 인정한다. 그러나 이 세대 정체성을 다른 방향에서 파고들어 재구성하고자 하는 것이 지금부터 하려는 작업의 출발점이다.
그러기 위해 우선 현재 통용되고 있는 밀레니얼 세대의 정의를 재고해야 한다. 밀레니얼 세대의 범위를 정하는 방식은 연구자에 따라 이견이 존재한다. 1991년 최초로 ‘밀레니얼’이라는 개념을 언급했다고 알려진 미국의 세대 전문가 닐 하우와 윌리엄 스트라우스는 1982~2004년생을 밀레니얼 세대라고 정의했다. 미국의 보험회사 메트라이프MetLife는 1977~1995년생을 지목한다. 한편 퓨Pew 리서치 센터는 1981~1996년생을 밀레니얼 세대라고 정의한다.[3] 여기까지는 각종 백과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는 밀레니얼 세대의 정의다.
이러한 규정들은 대체로 미국의 사회적 맥락에 따른 것이다. 2000년대 들어 미국의 시대정신을 가로지른 대표적인 사건은 2001년 9.11테러와 이라크전쟁 그리고 2008년 금융위기였다. 한국의 밀레니얼이 성장하는 과정에서는 1997년 IMF 외환위기와 두 번의 대통령 탄핵 국면이 더 영향력 있는 사건이었다. 게다가 386세대와 X세대라는 기성(세대가 되기를 거부하는)세대가 한국에서 매우 특수한 맥락으로 존재한다는 점 또한 밀레니얼의 범주를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근거가 된다.
물론 이러한 근거들을 재료로 삼아 세대의 범위를 뚜렷하게 산정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따라서 이 기획에서는 밀레니얼의 범위를 일종의 구성개념으로 사용하려 한다. 앞으로 언급하는 밀레니얼은 대체로 1985년생부터 1995년생까지를 가리킨다. 이는 ‘386의 자녀 세대’라는 보편적인 지목을 받아들이되, 문화 경험의 중심이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이동하는 과도기를 청소년기에 경험한 세대를 최대한 좁게 잡은 범주다. 또한 앞으로 계속해서 등장하게 될 어느 매체의 주 독자층이었던 세대를 넓게 잡은 범주이기도 하다.
[그림 2] 한국과 미국의 세대별 출생 시기 (한국의 밀레니얼 세대는 이 글에서 정하는 범주)
시간 브랜드, 시간의 향우회
밀레니얼의 세대 정체성을 찾아 나서기에 앞서, ‘세대 정체성’의 개념을 먼저 합의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세대 프레임의 모순을 비판적으로 다룬 전상진(2008)의 말을 빌려 오고자 한다. 그는 ‘세대 정체성’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세대 정체성은 ‘당신들은 누구요’나 ‘우리들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것이다.……역사의 우연한 굴곡에서 어떤 또래 집단이 그 이전과 이후의 선후배 집단과 구별되는 고유한 모습을 보일 때, 그리고 그것을 의식할 때 비로소 그들을 독특한 정체성을 지닌 세대라 부른다.[4]
그에 따르면 이전에는 민족, 국적, 계급, 직업 등이 정체성의 준거점이었지만, 현재 정체성 가르기에 있어서 유행하는 프레임이 바로 ‘세대’다. 이때 세대와 세대를 구분하는 정체성의 매체 중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것이 바로 ‘세대 브랜드’다. 어떤 시대를 회고하거나 그 시대를 향유한 세대를 호명할 때 호출되는 문화 상품들이 그것이다.
확대·심화된 소비자본주의에서 성장한 비교적 젊은 사람들에게 어린 시절 자신이 썼던 일상적 상품에 담긴 소소한 감정이 그들의 삶 전체를 이해하는 표식이 될 수 있다. 특히 그 상품들이 동년배 집단에서 유행했던 것이라면 더……일종의 세대 상징이 된다.[5]
‘그 때 우리는 뭘 봤지? 뭘 샀지?’ 하는 기억들은 세대를 묶는 경험이 된다.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에서 1997년, 1994년, 그리고 1988년에 있었던 각종 유형무형의 소비재들을 동원한 것은 단순한 재현 또는 고증이 아니다. 그것들을 사고, 보고, 만지고, 경험했던 세대가 잊고 지냈던 감각을 일깨우는 것이다. 그 시대를 향유했던 시청자들은 서로가 공유하는 기억을 매개로 일종의 추억 공동체를 형성한다. 그 시기를 살지 않았던 시청자들은 ‘응답하라’ 시리즈와 같은 콘텐츠에 비춰지는 상을 통해 시대를 간접―기억하게 된다.
전상진은 이를 뵈른 보넨캄프의 ‘시간 브랜드Zeitmarken’ 개념으로 설명한다. “특정한 역사적 시대를 다른 시대와 구별할 수 있도록 돕는 표식인 시간 브랜드는, 세대가 무엇보다 시간의 동반자라는 점을 드러낸다.”[6] 이 대목에서 우리는, 세대 정체성이란 다른 무엇보다도 ‘시간’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한국처럼 개발속도가 빨라 특정 장소, 동네 즉 공간을 통해 시대를 호출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곳에서, ‘장소’적 고향을 공유할 수 없는 사람들은 ‘시간’의 기억을 고향처럼 향수한다. 이 ‘시간의 고향’을 공유하는 동년배들이 만든 ‘시간의 향우회.’ 전상진은 이것을 바로 ‘세대’라고 부른다.[7]
세대 정체성을 만드는 것은 시간, 그리고 시간에 대한 공동의 기억이다. 모리스 알박스에 따르면 ‘살아 있는 인간들을 결속시키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 바로 공동 기억, 곧 ‘집단적 기억’이다. 집단적 기억은 ‘보편적 기억’으로 존재하는 ‘역사적 기억’과는 구분되는 것으로, 시간적·공간적 제약을 가진 집단의 ‘특수한 기억’이 지속적인 사회적 상호작용과 확증을 통해 정체성으로 고정되는 것이다.[8]
다시 전상진으로 돌아가서, 시간을 기준으로 정체성을 구성할 때 “정체성은 세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기원, 현재 위치, 미래 전망에 대한 질문이다.”[9] 이 기획 안에서 해나갈 작업은 그 중 첫 번째, 밀레니얼 세대의 기원에 관한 것이다. 특히 문화적 고향의 지도를 그리는 하나의 대안적 과정이 될 것이다.
앞서 비판조로 이야기했듯 나는 밀레니얼 세대를 현상적으로 파악하고 납작하게 규정하는 태도에 이의를 제기한다. 그 대신 그들이 공유하는 문화적 경험, 즉 시간의 고향을 찾음으로써 정의하는 쪽이 더 합당하다는 입장을 토대로 이 글을 전개해 나갈 것이다. 말하자면 ‘밀레니얼 향우회’의 생김새를 그려보려는 것이다. 그림은 어렴풋할 것이며, 정밀하고 뚜렷한 윤곽을 담대하게 그려내어 현재의 담론을 완벽하게 대체하겠다는 원대한 야망 같은 것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 윤곽을 후에 가서야 알 수 있을 것이다.[10]
이 기획은 밀레니얼 세대의 문화적 고향을 추적하는 과정의 일환으로, 이들의 시간 브랜드라 할 수 있는 2000년대 초반의 한 청소년 잡지를 고찰한다. 잡지의 이름은 Mr.K ‘미스터케이’다.
최은별 / 디자인문화연구자
[1] 안은별, IMF 키즈의 생애, 코난북스, 2017
[2] human resources: 인적자원(관리, 혹은 인사부)
[3] 한경 경제용어사전, ‘밀레니얼 세대’, 2018
[4] Björn Bohnenkamp, Doing Generation: Zur Inszenierung von generationeller Gemeinschaft in deutschsprachigen Schriftmedien, transcript Verlag; Auflage: 1, 2011, p.272 (; 전상진, 세대게임, 문학과지성사, 2018, p.147에서 재인용)
[5] 전상진, Ibid, p.164
[6] Ibid, p.164
[7] Ibid, p.183
[8] Maurice Hallbwachs, Das kollektive Gedächtnis, Frankfurt am Main, 1985, pp.72~ (; Aleida Assmann, 기억의 공간: 문화적 기억의 형식과 변천, 그린비, 2011, p.176~179에서 재인용)
[9] 전상진, Ibid, p.149
[10] Jacques Derrida, L’écriture et la différence, Paris: Editions du seuil, 1967 (; 김보현, 데리다 입문, 문예출판사, 2011, p.181에서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