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16년 6월7일 [비정규직 노동자의 집 10화 – 비정규직 노동자의 집 가상 설계도]라는 제목으로 다음 스토리 펀딩에 연재된 글이다. ‘꿀잠’ 이라는 이름도 짓기 전에 가상 설계도를 그려 본 것이다. 이러한 바람과 상상은 불과 1년 후인 2017월 8월 19일 꿀잠 개소식으로 현실화되었다. 시민의 힘으로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꿈꾸는 소중한 진지를 만들어 냈다. 이 글을 시작으로 꿀잠의 기억들을 기록한다.
“노동자들이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못써? 그런 생활이 오래되면 자신이 처한 현실을 잊게 되지. 한뎃잠을 자면서 투쟁해야 동료애도 깊어지고 투쟁 의지도 높아지는 거야.” 백기완 선생님이 입버릇처럼 하시는 말씀이다. 투쟁하는 비정규노동자들의 한뎃잠은 일상이 되었다. 그것도 모자라 더 높은 하늘 감옥으로 올라가고 있다. 제대로 씻을 곳도 먹을 곳도 없다. 옷 빨래는 엄두도 못 낸다. 추위와 더위는 가뜩이나 불편한 잠자리를 더 힘들게 한다. 하루도 배부르거나 등 따뜻한 적이 없다. 단 한 시간 만이라도 ‘꿀잠’을 자는 게 소원이다. 백 선생님도 이런 현실을 잘 알고 계신다. 그래서 그런지 비정규노동자들을 위한 밥집이나 쉼터를 만들어보겠다는 제안에 제일 먼저 반기셨다.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 회원과 기륭전자 조합원들에게 처음으로 비정규노동자의 집 ‘꿀잠’을 만들어 보자고 이야기하자, 다들 시큰둥했다. 필요성을 공감하면서도 재정마련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한발 물러섰다. “필요하다면 논의라도 해보자”고 겨우 설득을 한 다음. 당시 비정규투쟁의 상징적인 사업장인 KTX 여승무원, 이랜드-홈플러스, 코스콤, 현대하이스코, 현대기아차, 동희오토사내하청 노동자들과 함께 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장기간 상경 투쟁과 노숙 투쟁의 아픈 경험 때문인지 너나 할 것 없이 “비정규 노동자들을 위한 공간이 있으면, 너무 좋겠다”고 동의하면서 흔쾌히 초기 제안자가 되어 주었다. 당사자의 직접적인 호소는 그동안 비정규투쟁에 지원과 성원을 아끼지 않았던 많은 단체와 개인들의 자연스러운 참여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 이렇게 ‘꿀잠’은 첫걸음을 내딛었다. 기륭전자 노동자들이 앞장서자, 더 많은 관심과 참여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 기륭투쟁과 함께 했던 분들을 비롯해서 ‘희망버스’승객, 문화예술인, 종교인, 변호사, 학자, 의료인 등 전문가 집단, 재외동포와 고등학생까지 주춧돌(후원금, 1구좌 50만원)이 되어 주었다.
어린 딸이 크면 비정규직 없는 세상이 되길 바라는 어머니가 딸의 이름으로 주춧돌 기금을 보내주셨으며, 첫 세례 봉헌금을 모아 보낸 준 여중생들도 있었다. 딸과 사위의 결혼선물로 주춧돌 기금을 보낸 분도 계시며, 한 달 치 아르바이트 월급과 연말 상여금 전액을 보내온 분도 있었다. 특히 당사자들은 적은 월급을 다달이 모아서 힘을 보태주고 있으며, 동양시멘트, 유성기업 등 장기투쟁 사업장 조합원들은 투쟁기금을 쪼개서 자기 일처럼 나서주고 계신다. 전교조 해고자 34명도 기금을 모아주셨다. <다음> ‘스토리 펀딩’ 글만 읽고 말없이 도움을 주신 분들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꿀잠’ 건립 기금마련을 위한 ‘두 어른전’은 언론의 많은 관심과 호응 속에서 작품이 전부 판매되었다. 분노를 삭이며 칼과 망치로 새김판을 만들어 주신 문정현 신부님과 한 달 동안 집안 감옥살이를 하면서 붓글씨를 써주신 백발의 투사 백기완 선생님은 그 어느 때보다 기뻐하셨다.
2016. 6.27 비정규직 노동자의 집 기금 마련을 위한 두 어른(백기완, 문정현)전 기념 사진(정택용사진작가)
‘꿀잠’에 대한 공감대와 필요성이 넓혀지면서 “도대체 어떤 집을 지으려고 하는 거야?”, “공간구성과 설계, 사업과 운영은 어떻게 할 것인가?”를 궁금해하는 분들이 많아지고 있다. 이 글에서는 이 집을 먼저 고민한 분들의 의견을 모아 ‘가상 설계도’를 펼쳐보려고 한다. 이 글을 시작으로 ‘꿀잠’에 참여하는 모든 분의 다양한 의견과 제안을 바탕으로 ‘진짜 설계도’를 작성하고자 한다. 공간만 있으면 수많은 상상력을 현실로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비정규노동자의 집 ‘꿀잠’은 서울 중심가에 있는 허름한 2층 단독주택이었으면 한다. 지하 공간이 있거나 3층으로 증축할 수 있다면 더없이 좋겠다. 식당과 주방시설, 세면장과 세탁시설, 남녀침실, 회의실 또는 교육장, 작은 휴게실 겸 카페 그리고 문화공연이 가능한 공간으로 꾸미면 어떨까 생각해본다. 자연과 친구가 되기 위해 옥상에는 태양광 발전설비를 설치하고 작은 텃밭도 조성했으면 한다. 행복한 소식은 공간만 마련된다면, 집을 설계하고 건축하고 용도에 맞게 꾸며 주겠다는 건축사와 일꾼들이 기다리고 있다. 집이 지어지면 생협과 농민단체들이 먹을거리만큼은 책임지겠다고 한다.
‘꿀잠’의 최우선 이용자는 비정규노동자들이다. 그것도 장기간 상경 투쟁을 하는 비정규노동자들이다. 이들이 제일 먼저 부딪히는 것은 자고, 먹고, 씻는 것이다. 농성 텐트 하나 제대로 칠 수 없기 때문에 노숙 투쟁은 기본이고, 끼니를 제때 챙겨 먹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씻을 공간이 없어서 주변 건물 화장실이나 지하철 화장실을 주로 이용한다. 옷을 빨거나 말리는 것도 불가능하다.
‘꿀잠’은 이 문제를 가장 먼저 해결할 수 있는 공간이다. 대형 세탁기와 빨래 건조대 그리고 세면장과 침실, 식당이 이들을 제일 먼저 맞이할 것이다. 투쟁하는 비정규 노동자들의 외갓집이자 사랑방이 되어, 밥집, 쉼터, 목욕탕, 빨래터의 역할을 제일 먼저 할 것이다. 또한 자신들의 끼니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면서 ‘비정규직 없는 세상은 가능하다’는 확신을 갖고 헌신하는 비정규활동가들도 즐겨 찾는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문턱이 없기 때문에 누구나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
‘꿀잠’은 삶의 전망을 잃어버린 채 차별과 멸시에 주눅 들고, 억울해도 도움받을 곳이 없는 조직되지 않은 청년 비정규 노동자들에게도 편안한 안식처가 되고자 한다. 휴게실 겸 카페에 마련된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잔을 무료로 마시면서 ‘인생 상담’도 하고 ‘노동 상담’도 할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어떨까? 위로와 치유가 필요하다면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상담자와 의료인들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문화예술 공연 관람에서 소외된 비정규노동자들 위한 ‘문화공연 공간’이 될 수 있다. 홍대 인디밴드와 노동가수를 초청해서 함께 즐기는 공연을 선보이고, 북 카페가 되어 자유롭게 책도 읽고 작가와 대화도 추진하며, 사진과 악기, 뜨개질 등을 배울 수 있는 문화강좌도 열린다면 좋겠다. 이를 통해 ‘청년 비정규 노동자들’에게 좀 더 편하게 다가서고, 이들이 비정규직 현실을 바꿔낼 수 있는 주체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꿀잠’은 비정규 교육공간이자, 비정규 노동운동의 성장과 발전에 기여하는 공간이 되고자 한다. 이곳에서 비정규 노동운동의 역사도 배우고 비정규 노동순례 탐방, 노동법률 상담도 제안되고 있다. 비정규직 선배가 새로 노조결성에 나선 후배들에게 노조 설립과 교섭 전술, 투쟁계획 등의 경험을 전달하는 공간도 될 수 있다. 비정규 노동자들이 지혜를 맞대고 투쟁을 공유하고 실천을 다짐하는 장소가 되었으면 한다. 또한 지역과 함께 하는 열린 공간이 되고자 한다. 여유 있는 공간이 생긴다면 지역 주민이나 활동가들에게 개방하려고 한다.
‘꿀잠’은 기금조성과 운영의 투명성을 확보하기 위해 비영리 사단법인 등록을 마쳤으며, CMS 후원회원과 물품 후원을 중심으로 운영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이곳을 거쳐 간 분들은 자신들의 흔적을 남길 수 있다. 다음 올 분들을 위해 김치를 담기도 하고, 유자청이나 매실차도 담글 수 있으며, 청소도 할 수 있다. 고향에서 가져온 음식이나 물품을 나눌 수도 있다. ‘꿀잠’이 공유와 재생산의 공간으로 운영된다면 더욱더 좋겠다.
‘꿀잠’의 가상 설계도는 대략 이렇다. 기금조성과 함께 공간구성과 사업, 운영방안에 대해 본격적인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가상 설계도에서부터 이 집의 주인인 비정규 노동자들의 의견이 제일 먼저 반영되고 있다. 투쟁하는 비정규 노동자들의 발 냄새가 정말 지독하기 때문에 “신발장은 문밖에 별도로 만들었으면 한다.”는 의견이 제일 먼저 채택되었다.
‘꿀잠’은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꿈꾸며 실천하는 사람들이 함께 짓는 집이다. 짧은 기간에 목표액의 절반을 넘겼지만 아직 턱없이 부족하다. 주춧돌 기금뿐만 아니라 도배, 목공, 페인트 등 건설과 관련된 재능기부와 공간에 필요한 물품 기부도 가능하다. 전공기술이 없다면 현장 청소나 새참을 준비 할 수도 있다. 이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이 마음과 손을 보태 만들어진 공간의 주인은 바로 당신이다. 이 집이 만들어지면 참여한 모든 분의 이름이 새겨진 멋진 작품을 건물 내에 게시할 계획이다.
비정규직 없는 세상은 우리 사회의 생존과 인권, 민주주의와 평등을 실현하는 지름길이다. ‘꿀잠’은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앞당기는데 소중한 진지가 되고 싶다. 그래서 단 한 시간만이라도 ‘꿀잠’을 잘 수 있는 공간마련이 절실하다.
황철우 / 비정규직 노동자의 집 쉼터 꿀잠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