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폴라니 총서 1] 거대한 전환-우리 시대의 정치 경제적 기원
칼 폴라니 지음 | 홍기빈 옮김 | 길 | 657쪽 | 3만8000원 | 2009년 6월 30일 출간
<출판사 서평>
왜 지금, 철지난 책이 21세기 현재의 우리 사회에 주목받고 있는가
한 권의 책이 다시금 새롭게 주목을 받고 있다. 이 현상은 국내에서건, 국외에서건 마찬가지이다. 1944년에 씌어진 책이 왜 갑자기 다시 주목을 받게 된 것일까. 어떤 경제사가가 “세상에서 사라지기를 거부하는 책들이 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왜 이 책은 철지난 시대에 다시금 우리 앞에 고개를 내미는 것일까.
간략히 말하자면, 이 책은 21세기 현재의 시점에서 지구적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딜레마를 이해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저서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 책은 시장 자유주의, 즉 나라 단위의 사회들과 지구 경제를 모두 자기조정 시장을 통해 조직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해야 한다는 믿음에 대해 지금까지 나온 가장 강력한 비판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지점은 이념적으로 좌?우의 논리에 휘둘리지 않고, 칼 폴라니(Karl Polanyi, 1886~1964) 스스로 좌?우 두 논리에 대한 치밀한 비판을 통해 자신만의 독특한 논리를 주창한다. 즉 그에게 하이에크나 마르크스 모두는 비판적 극복대상이며, 그들이 보지 못한 ‘경제’ 현상을 분석함으로써 비록 세기가 바뀐 지금에서도 더욱 그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상 시장 자유주의는 지난 1980년대 이후, 특히 1990년대 초 냉전 종식과 함께 대처주의, 레이건주의, 신자유주의, ‘워싱턴 컨센서스’ 등의 이름을 달고 지구 정치를 지배해왔다. 하지만 이 책이 처음 출간된 1944년 직후 미국과 소련 사이에 냉전이 격화되면서 폴라니의 기여가 갖는 의미는 잊혀지고 말았다. 자본주의 옹호자에서건, 현실 사회주의 옹호자에서건 지극히 양극화된 논쟁 속에서 폴라니의 복잡하고도 섬세한 논리의 주장이 들어설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칼 폴라니의 이 책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와 제3부에서는 어떻게 1815년에서 1914년까지 오랜 기간에 걸쳐 상대적인 평화와 번영을 구가해온 유럽이 갑자기 세계대전에 빠져들고 그 다음에는 경제적 붕괴가 이어지는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그러고 나서 이 책의 핵심인 제2부에서 그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을 제시한다.
지금까지의 경제와 경제학은 인간의 ‘사회’라는 실체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 인간을 위한 경제학
가장 먼저 폴라니는 19세기 초 영국 산업혁명의 시대로 되돌아가 영국의 사상가들이 산업화 초기의 혼란에 대응하기 위해 인간 사회가 자기조정 시장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핵심적 교리로 하는 시장 자유주의를 발전시키게 된 경위를 탐구한다. 영국이 ‘세계의 공장’이라는 지도적 역할을 맡고 있었던 결과, 이러한 믿음이 세계 경제의 조직 원리가 되었다고 그는 설명한다. 이는 곧 인간은 모두 자기의 이익이라는 ‘경제적 이해’로 움직이는 존재이며, 따라서 그렇게 구성되는 시장경제의 경제 법칙이야말로 전 역사에 걸쳐 모든 경제와 나아가 사회까지 지배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폴라니가 보기에 이러한 생각은 19세기인들의 ‘신화’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화에 대해 그는 당시 최신의 경제인류학 및 고대 중세사의 성과를 빌려, 경제는 사회 과정에 ‘묻어 들어'(embedded) 있는 것이며, 특히 시장경제는 인류 사회의 보편적 경제 형태이기는커녕, 최소한 200년 전까지는 어디서나 ‘부수적 존재’로 철저하게 억압되어 왔다는 것이다. 개인의 이윤 동기로 조직되는 시장이라는 형태는 16세기 영국에서처럼 자유롭게 풀려날 경우 급속도로 사회와 인간과 자연을 파괴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모든 경제 활동을 완전히 시장이라는 제도 하나만으로 조직하여 그것으로 자기조정 시장을 세운다는 것은 적어도 수천 년 수만 년의 인류사에 비추어보면 ‘자연적’이기는커녕 극히 인위적인 유토피아적 망상이라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칼 폴라니는 고전판 경제학자들, 특히 토머스 맬서스와 데이비드 리카도가 그 이전의 사상가들과 얼마나 단절되어 있는지 설명하기 위한 앞서 언급한 ‘묻어 들어 있음’이라는 용어에 방점을 찍고 있다. 간단히 말해 이 용어는 경제란 경제 이론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자율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종교?사회 관계들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토록 비현실적인 자기조정 시장경제라는 유토피아는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그는 산업혁명을 통해 출현한 기계제 생산에 그 혐의를 둔다. 예전의 기계가 인간의 노동을 위한 보조적 역할을 했던데 비해 산업혁명을 통해 나타난 값비싼 기계들은 인간을 자신의 보조적 위치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이제 생산주체는 값비싼 기계가 되어버리고, 인간과 자연은 그 기계를 가동시키기 위해 들어가는 ‘투입물’의 위치로 떨어지게 된 것이다. 이제 인간과 자연, 화폐는 ‘상품’처럼 취급되게 되었다. 그 결과 19세기 구빈법의 철폐, 금본위제의 시행, 곡물법 철폐를 통한 자유무역과 같은 자기조정적 시장 자유주의의 유토피아를 실현하기 위한 갖가지 조치들이 취해진다.
그러나 이러한 유토피아적 행동이 현실화되는 것을 ‘사회’라는 실체는 단 한순간도 못 견뎌했다. 노동자들은 노동조합과 정당을 만들어 저항했고, 토지 세력은 보호 관세와 반동적 군국주의 등의 공세 등을 통해 저항했으며, 심지어 자본주의적 기업들마저 중앙은행을 통한 원활한 통화 및 신용 공급을 요구하며 저항했다. 이른바 폴라니가 말하는 ‘이중적 운동’이 나타난 것이다. 이 이중적 운동이야말로 폴라니가 강조하는 시장경제 유토피아적 성격과 이와 맞서는 사회 실재의 발견이 표출되는 지점이다. 이러한 ‘사회’의 존재 문제를 칼 폴라니는 로버트 오언(Robert Owen)으로부터 가져온다. 즉 오언에게 ‘사회’란 국가와 시장이라는 두 영역은 물론 기계라는 압도적 현실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북새통과 시련의 밑바닥에 버티고 있는 진정한 실체라는 것이다.
21세기에도 요구되는 진정한 경제란? ― 인간의 ‘자유’에 토대를 두어라
책 제목인 ‘거대한 전환’은 바로 19세기 인류 사회에 걸어온 이러한 현실에 대한 비유적 표현이다. 자유주의적 국내 정부, 자기조정 시장, 국제 금본위제, 세력 균형 체제로 구성된 지구적 시장자본주의가 곧바로 파국적 상황인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으로 표출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어떤 사회를 구성해야 하는가. 칼 폴라니의 대답은 다시 ‘자유’이다. 개인의 자유와 인간의 영혼은 분리할 수도 없고 포기할 수도 없는 본연의 모습이다. 이것을 여러 기능으로 나뉠 수밖에 없는 산업 사회라는 ‘복합 사회’와 양립하는 길은 시장이라는 유토피아를 걷어내고 그 밑에 버티고 있는 실체인 ‘사회’를 발견하고 그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지극히 도덕적인 답변이지만, 사실상 ‘사회’라는 실체의 인정을 주장하며 인간의 ‘자유’를 말하는 것은 바로 인간 자체를 상정하고 거기에서부터 시작하여 ‘경제’가 태동함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시장 자본주의를 분석하는 정치경제학자로서의 폴라니가 갖는 시각의 새로움은 어디에 있을까. 바로 우리 시대의 경제위기 현상을 제대로 분석하는 틀은 무엇일까라는 문제와도 연관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보자. 마르크스는 시장 자본주의의 비인간성을 고발하고 그 작동 법칙의 내적 모순을 분석함으로써 그것을 아예 폐절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케인스는 시장 자본주의 특히 금융 자본주의가 본질적으로 비합리적인 운동을 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들어 그것을 국가의 적절한 개입으로 조절하고 규제해야 한다고 본다. 하지만 폴라니는 그보다 시장경제란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것이며, 거기에 담겨 있는 인간?자연?화폐가 상품에 불과하다는 상품 허구는 단지 우리의 현실을 바라보고 착각하는 일종의 상상이요 매트릭스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제시하는 해결책의 방향 또한 시장경제를 폐절하거나 국가에 의한 적절한 개입 등으로 그저 규제하는 것이 아니다. 올바른 방향은 사회라는 실체와 거기에 담겨 있는 인간의 자유와 가치와 이상을 틀어쥐고서, 국가와 시장을 그러한 목적에 복무할 수 있는 기능적 제도로 제자리에 돌려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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