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폴라니 총서 4] 칼 폴라니, 새로운 문명을 말하다

 

[칼폴라니 총서 4] 칼 폴라니, 새로운 문명을 말하다

칼 폴라니 지음 | 홍기빈 옮김 | 착한책가게 | 422쪽 | 2만4000원 | 2015년 4월 30일 출간
<출판사 서평>

경제인류학, 역사사회학, 경제사 등 여러 영역에 걸쳐  통합적인 관점에서 현실을 읽어낸 폴라니의 글을 모아 엮은 책이다. 경제가 사회를 지배하면서 차별과 굶주림, 자살과 사회 폭력이 인간다운 삶을 위협하는 지금, 현대 사회와 인류의 미래라는 질문에 대한 고민이 집약되어 있어  새로운 문명을 열어갈 지혜와 인문학적 상상력의 물꼬를 트는 데 기반이 되어줄 것이다.

Ⅰ. 폴라니의 유령, 폴라니의 복수

2008년 금융공황과 함께 세계경제가 1930년대 이후 가장 심각한 위기에 빠져들면서 전 세계적으로 폴라니를 주목하며 재조명하고 있다. 여러 학술지에서 폴라니에 대한 특별호를 출간하고 다양한 정치 포럼에서는 자본주의 발전과 붕괴 징후에 대한 그의 분석을 더 자주 언급하고 있다. 특히 세계의 엘리트들이 모인 2012년 다보스 포럼에서는 토론 과정 내내 폴라니의 유령이 맴돌았다는 보고가 나왔을 정도다. 그렇다면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원인은 무엇일까?

70년 전에 진행된 폴라니의 연구와 문제제기는 오늘날에도 매우 큰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지금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라 있는 경제와 민주주의의 관계, 전면적인 상품화 경향, 기술에 대한 통제, 초국가적 무역 규제 등의 문제는 폴라니 사상을 구성하는 핵심 줄기들로서, 조지프 스티글리츠가 “폴라니가 오늘날의 문제에 대해 직접 이야기하는 것 같은 생각이 종종 든다.”고 말한 것처럼 당면한 현실을 그대로 비추고 있다. 나아가 자기조정 시장의 파괴적 경향에 대한 폴라니의 경고는 자본주의 체제가 새롭고도 극적인 위기를 한창 겪고 있으며 세계 곳곳에서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사건과 추세가 이어지고 있는 지금 급기야 ‘폴라니의 복수Polanyi’s Revenge'(Lisa L. Martin)라는 말까지 낳고 있다.

데자뷔, 고삐 풀린 자유주의 경제 질서의 붕괴
19세기 서구 문명의 운명을 결정한 자기조정 시장이라는 제도는 토지, 노동, 화폐 시장이 각기 등장하고 하나로 어우러지며 탄생했다. 이때부터 사회에서 뽑혀나가게 된 경제는 스스로 생명력을 갖고 사회를 자신의 요구에 복무하도록 강제했다. 이는 대단히 이상하고 역사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사태였지만 어마어마한 경제 성장을 이끈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자유로운 시장을 창출하려는 자본과 지배계급의 ‘의도적인’ 노력과, 자기조정 시장의 파괴적 경향으로부터 사회가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노력 사이에, 즉 폴라니의 독창적 개념인 ‘이중운동’이 필연적으로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고 이는 자유주의 경제 질서의 붕괴와 파시즘의 발흥, 양차 세계대전과 민주주의 국가들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오늘날 마찬가지로 우리는 사회의 규제와 통제에서 풀려난 자본이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시장 근본주의적 신자유주의 이념이 세상을 지배하는 현실을 똑똑히 목격하고 있다. 지난 30년간 자본은 복지국가가 이룩한 많은 성과를 허물어뜨리고 부자가 지고 있던 조세 부담을 다른 이들에게 떠넘기는 데 성공했다. 생산된 부는 고소득자들의 이윤으로 돌아갔고 실질 임금은 거의 오르지 않았을 뿐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이 빈곤선 아래로 추락하고 있다. 자본은 모든 규제와 통제에서 해방되어 금융상의 부의 집중을 숫자로 설명하는 것이 더는 의미가 없어졌고 2008년 금융공황 속에서도 오히려 크게 강화되었다. 이제는 가장 강력한 나라의 정부와 사회조차 금융자본의 독재에 볼모로 잡혀 있는 상태다.

새로운 문명으로 거듭나고자 하는 희망
이 책은 폴라니의 미출간 원고와 강연 중에서 1919년부터 1958년까지의 것들을 가려 모아 일관된 체계로 엮은 것이다. 이 책에서 폴라니는 20세기 전반기에 자기조정 시장의 폐해가 불러온 서구 사회의 붕괴를 문명사적 관점에서 조명하고 새로운 문명으로 나아갈 바를 비추고 있다. 즉, 근대 자본주의 체제를 문명 차원에서 해부할 뿐 아니라 그 안에 담겨 있는 서양 본래의 정신을 성찰, 비판하여 과학, 제도, 경제학, 기술 등이 모두 변혁될 것을 희망하고 있다. 나아가 그렇게 혁신된 이해를 바탕으로 자기조정 시장의 신화를 대체하는 새로운 경제 체제가 출현할 것을 갈망하고 있다.

이 책은 이렇듯 제도, 역사, 문화, 과학에 걸친 문명의 다양한 측면들에 대한 폴라니의 폭넓은 사유가 집약되어 있다. 그리하여 현대 문명의 위기와 붕괴의 징후를 읽는 법을 보여주면서 그런 위기를 넘어 자기조정 시장이 아닌 ‘인간의 살림살이’로서의 경제에 근거한 새로운 문명으로 거듭날 것을 요구한다. 특히 그간 출간되었던 폴라니 관련 책에서는 심도 깊게 볼 수 없었던 전쟁과 평화의 의미, 문화와 제도, 공동체와 민주주의, 협동조합에 관한 탐구, 사회과학의 역할 등 현대 사회와 인류의 미래라는 질문에 대한 고민이 집약되어 있어, 새로운 문명을 열어갈 지혜와 인문학적 상상력의 물꼬를 트는 데 주요한 기초가 될 것이다.

Ⅱ. 자유는 모든 진정한 조화의 기초

자기조정 시장의 파괴적 경향에 대한 비판과 함께 폴라니 사상이 지닌 또 하나의 핵심은 ‘자유라는 가치야말로 모든 사회 체제를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또한 폴라니는 자유란 책임과 갈라낼 수 없기에 공동체, 사회, 민주주의에 대해 사람들이 스스로 책임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폴라니는 두 가지 과제를 제기하고 있다. 첫째는 과학, 기술, 경제조직을 우리가 추구하는 인간적 진보와 자유로운 인격적 개성의 실현이라는 목적의 달성에 복무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경제적 자유와 평등을 향한 자본주의 개혁을 가로막는 이념적 장벽인 ‘경제결정론에 대한 교조적 신앙’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즉, 경제적 자유를 하나라도 제약하면(즉, 계획의 도입) 시민의 자유에도 부정적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하이에크의 주장이나, 반대로 부르주아적 기만에 지나지 않는 자유의 제도를 변화시키려면 경제 조직부터 변화시켜야 한다는 마르크스주의의 주장을 모두 문제 삼았던 것이다.

규제 없는 시장경제와 중앙계획경제 모두 비판
이렇듯 폴라니는 ‘자유는 모든 진정한 조화의 기초’라는 전제 아래 ‘자본주의적 이윤 경제의 무정부적 시장’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적 중앙계획경제에 대해서도 명확한 선을 그었다.

노동착취에 근거한 규제 없는 자본주의의 기원은 강권적인 토지 소유라는 ‘정치적 법칙’이 경작 가능한 토지에서 사람들을 접근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현실에서 자유 경쟁을 없애버린 데 있다고 보았다. 또 그런 자본주의는 사회적 필요와 생산 사이에 갈등을 일으키고 사적 개인들로 구성되는 경제의 본질상 공동체의 삶에 미치는 나쁜 영향들을 인식하지 못하게 만든다고 비판했다. 나아가 규제 없는 시장경제는 경제 행위자가 한 선택의 결과에 대해 모든 형태의 규제를 금지하는 것이기에 개인의 책임을 묻지 않게 되고 사회의 응집력을 떨어뜨려 파편화를 불러오고 개인이 도덕적으로 행동할 동기를 앗아갈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폴라니는 생산수단을 국유화하여 중앙계획경제를 건설한다는 전망에 대해서도 강하게 반대했다. 그런 전망은 선택의 자유라는 이상과 양립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경제란 살아 있는 과정이며 제아무리 정밀하게 천재적으로 착상된 것이라 해도 그 어떤 기계적 장치로도 대체할 수 없다’고 했듯이 시장이란 사회의 특수한 감각기관이고 이것이 없으면 경제의 순환 시스템이 무너질 것이라 예측했던 것이다.

협동적 사회주의, 그리고 자율적인 협동조합
여러 자유주의적 사회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폴라니는 교환이 사라진 중앙집권화된 경제가 아니라 노동, 소비, 생산이 모두 자신을 대변할 대표자를 통해 여러 문제를 조화롭게 해결하는 협동적 경제를 꿈꾸었다. 즉 협동적 사회주의와 시장경제를 같은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다만 이때의 시장경제란 잉여가치의 수탈을 상품 가격 안에 은폐하는 현장인 자본주의적 이윤 경제의 무정부적 시장이 아니라 자유로운 노동 생산물이 등가 관계로 교환되는 유기적 구조를 갖춘 시장이 된다.

폴라니는 이런 경제로 구성된 사회에서는 자유로운 협동이 협업의 일반적인 형태가 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하여 자율적인 협동조합들이 서로 유기적 구조를 맺는 가운데 생산과 소비가 시장에 의해 조직될 것이며 유통과정을 복잡하게 만드는 중간 거래, 투기, 그 밖의 모든 기생적 행태들이 배제될 것이라 주장했다. 그리고 사회 구성원들은 생기 넘치는 직관으로 자신의 경제적 이익과 이타적 충동을 모두 이끌어내고 풍부히 키워나갈 것이라 예측했다. 다만 국가나 정부가 창출한 협동조합이란 대규모 공기업에 지나지 않으며 자유주의적 사회주의의 입장에서 볼 때 오로지 자발적 협동조합 말고 다른 형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Ⅲ. 자유와 일탈의 사상가 폴라니에 대하여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지적인 열기 속에 성장한 폴라니는 지식인으로서의 자신의 역할을 결코 한발 비켜선 냉정한 ‘역사의 공증인’으로 생각한 적이 없다. 반대로 공적 시민의 일원으로서 강한 열정과 자유, 다원주의, 사회정의 등의 가치를 확고히 견지한 가운데, ‘우리의 사회적 운명을 결정하는 것’(2장)이 가능할 뿐 아니라 그것을 인간의 개성에서 비롯되는 다양한 필요에 부응하도록 이끄는 것 또한 가능하다는 반反 결정론적 신앙으로 살아 움직였던 이였다. 그리고 학자로서는 시대의 흐름에 완전히 거꾸로 맞섰으며 그의 사상은 확실히 이단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오늘날의 시대정신과는 더욱 어긋나는 인물로 보일 수 있지만 지난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의 사상에 대한 관심은 갈수록 커져왔다. 특정 분야의 경계선 안에 시야를 가두지 않고 다양하고 복합적인 관점에서 현실을 읽어내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대표작《거대한 전환》등이 담지 못한 것
폴라니의 가장 유명하고 중요한 저서가《거대한 전환》임에는 틀림없지만 자기조정 시장이라는 ‘경제’제도가 19세기 인간 사회의 모습을 결정했던 과정을 보여준 이 책의 핵심 내용은 폴라니 사상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 반대 방향의 이야기, 즉 자기조정 시장이라는 제도가 어떤 문명적 역동 속에서 생겨나 문명의 여러 요소들과 어떻게 상충하거나 조응하면서 어떤 모순을 낳는가에 대한 성찰이 폴라니 사상의 다른 한쪽을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폴라니의 주요 저서에는 본격적으로 서술되어 있지 않은 이런 생각을 알기 위해서는 강연, 에세이, 개인 노트 등의 문서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 바로 그런 글들 가운데 주요한 것들을 모아《칼 폴라니, 새로운 문명을 말하다》를 구성했기에 폴라니 사상의 전체적인 진화 과정을 추적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한 문명의 성원 전체가 공유하는 상상과 의미 부여를 통해 제도가 생겨난다는 역동적 현실 인식과 그에 따라 현대 문명 위기를 ‘인간의 살림살이’ 또는 ‘실체적 경제’에 근거해 극복할 수 있다는 확고한 방법론적 지향을 읽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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