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한국의 정치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소득주도성장론이란 포스트케인지언 경제학자들의 “임금주도성장(wage-led growth)”에 뿌리를 대고 있다. 여기서 ‘소득’은 임금소득을 말하며 임금소득은 1인당 평균임금*노동자수(고용)이므로 임금주도, 소득주도, 고용주도의 구분은 별 의미가 없다. 다만 한국에서는 자영업자의 비율이 대단히 높기 때문에 소득주도로 표현하는 쪽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소득주도성장론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소득주도성장을 노동시장정책, 간단히 말해서 “임금이 올라가야 한다”는 주장으로 한정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만으로도 가히 상전벽해다. 지난 50년 간의 수출주도(-부채주도) 성장기조에서 임금 인상은 수출경쟁력을 낮추는 것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국민의 정부”나 “참여정부”조차 시장은 되도록 건드리지 않고 재분배를 통해 복지를 늘리는 데 주력했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부와 소득의 불평등은 분배 상황(‘조정 노동소득분배율’)은 1990년대 중반 이후 거의 일직선으로 나빠지고 있다. 시장의 분배 자체가 문제인 것이다. 이런 경우 상당한 폭으로 복지를 증가시켜도 과거에 비해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고 느낄 수 있다. 실제로 두 민주정부가 애써서 복지를 늘렸지만 지니계수로 보면 1990년대 초반보다 불평등했다.
소득주도성장론은 경제구조에 따라(대부분의 선진국에서) 임금인상이 총수요를 늘려서 성장률을 높일 수 있다는 주장이다. 최근 부경대 홍장표교수의 계량경제학 연구에 따르면 한국도 소득주도경제에 속하며, 나아가서 투자와 수출에도 도움이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적절한 속도의 최저임금 인상, 취약계층에 대한 복지지출의 확대는 빈곤과 양극화 해소라는 차원에서 동의[하고], 내수 진작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된다는 점에서 동의합니다”라는 유승민대표의 발언은 어쩌면 획기적인 인식변화다.
하지만 “저성장의 대재앙이 예고된 우리 경제에 대하여 이 정도의 내용을 성장의 해법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유승민), “정부가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기업의 결심이 필요한 일인데, 기업을 움직이게 할 정부의 수단이 줄어들고 있다”(안철수)는 비판이 뒤따랐다. 즉 둘 다 소득주도성장을 좁은 우리에 가둔 것이다.
하지만 소득주도성장은 포스트케인지언 경제정책을 아우르는 정책기조이며 그들의 경제학 방법론을 집약한 용어이다. 예컨대 임금은 노동시장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각종 사회적 힘들이 작용한 결과이며 이렇게 분배가 결정된 이후에 다른 경제변수가 결정된다. 또한 상품의 가격은 기업의 독점력에 따른 마크업(비용에 일정한 이윤을 가산하는 것)이 결정하므로, 예컨대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세력관계가 중요하다. 금융정책에서도 포스트케인지언들은 중앙은행이 통화량이 아니라 기준금리를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포스트케인지언의 정책기조는 각 이해관계자(보통 모델에서는 노동자, 기업, 금리생활자)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사회적 합의를 필요로 한다.
실제 역사를 봐도 그렇다. 1960년대 이래 로빈슨이나 칼레츠키 등 ‘캠브리지 케인지언’들(포스트케인즈주의의 창시자들)이 적극적으로 옹호한 “소득정책”(incomes policy, 초기에는 임금정책이라고 불렀다)은 현재 소득주도성장론의 원형이다. 현재 세계의 경제학계는 90% 이상이 신고전파경제학자(더 정확히 말하면 신합의경제학, New Consensus Economics)이므로 포스트케인지언 경제학이 실제로 주요 국가의 정책을 결정한 건 이 때가 마지막이라고도 할 수 있다.
로빈슨 등은 노동조합의 강화 뿐 아니라 고용주연합(예컨대 대한상의)의 단결을 통한 중앙교섭을 지지했다. 당시에는 인플레이션에 대해서, 그리고 지금은 ‘장기침체’에 대해서 노동자와 고용주, 그리고 정부가 사회적 합의를 해야 한다. 불행하게도 70년대 영국에서는 와일드캣 파업이 돌출하면서 중앙교섭에 실패했고 노동당은 정권을 잃었다. 대처의 신자유주의로 향한 길이 열린 것이다.
임금정책이 놀라운 성공을 거둔 곳은 스웨덴이었다. 당시 노총의 이론가였던 렌과 마이드너에게 가장 큰 문제는 인플레이션이었다. 1950년대 초반 렌-마이드너 모델은 수출대기업의 임금을 제한하고 내수중소기업의 임금을 끌어 올리는 ‘연대임금’을 제안했다. 대기업 고용주들은 쌍수를 들어 환영할만한 제안이었고 오직 대기업 노동자의 양보가 문제였다. 임금 인상에 따라 파산을 하는 중소기업의 노동자들을 위해선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이 준비되었다. 이후 이 정책은 공공부문의 확대와 보편적 복지국가로 발전했다.
지금은 정반대 상황이다. 노동자들의 임금이 올라야 성장률이 높아질 수 있고 인플레이션을 걱정할 때도 아니다. 포스트케인지언의 가격설정이론에 따르면 한국 임금격차의 가장 큰 원인은 대기업의 마크업 가격에 있다. 실로 한국의 재벌은 생산물 시장 뿐 아니라 생산요소 시장에서도 가공할만한 독점력을 휘두른다. 하청단가의 후려치기가 바로 그것이다. 중소기업의 생산성 향상분 만큼 하청단가를 내려서 중소기업의 과실을 모기업이 전부 빼앗을 수도 있다. 과실의 일부는 대기업 노동자에게 나눠 줄 수도 있을 것이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임금격차가 계속 벌어지는 가장 큰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문제는 재벌들이 전체 노동자 임금이 올라야 기업도 이익을 볼 수 있다는 사실, 공동교섭에 의한 하청단가 결정(이윤공유제 등)이 장기적으로 수출경쟁력에도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것인가, 여부이다. 또 대기업 노동자가 전체 임금인상분의 대부분이 중소기업 노동자와 비정규직에게 돌아가는데 합의하고 앞장서서 싸울 수 있을까? 현재의 기득권 세력이 스스로 단기적인 이익을 양보할 수 있을까? 소득주도성장론이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이런 중요한 전제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포스트케인지언들은 장단기 모두 적극적 재정정책을 써야 한다고 주장하며(따라서 미국과 유럽의 긴축정책에 반대한다), 특히 생태정책을 옹호한다. 즉 현재와 같은 ‘과소투자’(마이클 스펜스)의 시대에는 정부가 적극적으로 생태인프라 투자를 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즉 소득주도성장론은 생태투자를 정책패키지에 포함시킬 수 있다.
소득주도성장론은 나라 전체의 정책기조가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포스트케인지언들은 세계적인 ‘장기침체’가 부와 소득의 분배 악화에 따른 총수요 부족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각국은 내수 부족에 대해서 한편으론 수출주도성장(중국과 독일)으로, 다른 한편으론 부채주도성장(미국과 영국)으로 대응했다. 한국은 90년대 중반 이후 수출주도에 부채주도(주택 등 소비자금융의 급등)를 결합한 모델이었다.
하지만 지금 한국의 수출은 마이너스 증가율을 기록하고 있으며, 가계는, 140%에 달하는 부채비율 때문에 더 이상 빚으로 소비를 늘릴 수 없다. 수출주도-부채주도성장의 시대가 막을 내린 것이다. 사회적 대타협의 소득주도성장은 현재 한국에 절실한 “분배를 통한 성장” “균형성장” “합의에 의한 성장”의 길이다. 또한 “생태혁신을 통한 성장”의 길이다. 또한 소득주도 성장론은 대기업과 공공부문 노동자가 솔선해서 자본가와 정치인들을 설득하고 압력도 가해야 비로소 성공할 수 있는, ‘험한 오솔길’이기도 한다.
(사회적경제는 소득주도성장론의 일부로 포함될 수 있다. 아니, 사회적경제조직은 시민사회 대표 중 하나로 사회적 합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할 주체이다. 사회적경제야말로 이해당사자들의 합의에 기초한 경제조직이다. 자본소득(즉 배당)과 노동소득(임금)의 분배가 조합원총회에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또한 기업 내의 임금격차도 일정하게 제한되어 있으므로 노동소득내 불평등도 최소화한다. 이런 면에서 사회적경제는 소득주도성장론의 이상적 형태라고도 할 수 있다.)
정태인 칼폴라니 사회경제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