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 리야 없겠지만 한국사회는 신이 내린 혹독한 시험을 연속으로 치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작년의 세월호 참사에 이어 이번에는 메르스 사태다. 마치 신은 “이래도 너희들이 ‘공공’(public)을 부정하겠느냐”고 묻는 듯하다.
공공의 가치, 또는 공익이란 사회가 숙의를 통해 합의한 가치, 또는 목표다. 구체적으로 가면 갈수록 왈가왈부 말이 많아지겠지만,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이라든가 자연의 보전 같은 것이 그런 예일 테다. 예를 들어, 적어도 이 정도의 생산력을 갖춘 사회에서는 굶어 죽는다거나 돈이 없어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나아가서 살 집이 없어서 길바닥을 전전한다거나 돈이 없어 공부를 더 하지 못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정도엔 웬만하면 동의할 것이다.
실제로 생산력이 지극히 낮았던 사회(우리가 원시사회, 또는 야만사회라고 그릇되이 부르는 곳)에서도 굶주림은 그리 쉽게 관찰되는 않았다. 인류학이 밝혀낸 것처럼 “카피르족의 크랄 토지 제도 아래서 궁핍이란 있을 수 없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는 누구든 두 말할 필요도 없이 도움을 받는다”. 콰키우틀 족은 어느 누구도 “굶주림의 위험을 최소한이라도 겪게 되는 법이 없다”(칼 폴라니,2006,p32). 물론 대홍수나 가뭄, 전염병이 일어나면 기근이 불가피했겠지만 그 경우에도 민주주의가 있는 곳에선 훨씬 피해가 적다는 사실을 센(Sen, A.)은 밝혀냈다.
생산력이 발전했다는 것은 이런 공공의 가치 목록이 더 늘어날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민주주의가 존재한다면 반드시 그럴 것이다. 이런 공공의 가치를 어떻게 실현할 것이냐, 즉 국가가 재정으로 해결할 것인지(공공경제), 시장이 적절한 가격을 통해 공급하게 할 것인지(규제있는 시장경제), 아니면 공동체 차원에서 상호성에 입각해서 해결할 것인지, 이 셋을 어떻게 조합하는 것이 가장 공정하고 동시에 효율적인지 역시 공공의 숙의를 통해 결정되어야 한다.
불행하게도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 그리고 최근 30년간 공공의 가치도 시장이 가장 효율적으로 실현할 수 있다는 시장만능주의(폴라니의 표현으로는 “자기조정적 시장경제”) 신화가 우리를 지배했다. 경제학자들 조차 ‘시장실패’라고 인정하던 영역까지 시장 논리는 스며들어갔다. 공공재나 외부성 문제도 규제완화와 민영화가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이 그것이다.
하지만 제 아무리 효율적 집단이라고 할지라도, 사익을 추구하는 집단이 공익을 담당할 수는 없다. 주류경제학으로 말하자면 (광범위한) 외부성을 외면하는 게 사익추구집단에겐 당연하기 때문이고, 정치학으로 얘기하자면 정보공개와 토론을 통해 공익을 정의하고 실현한다는 게 그 집단에는 존재하지 않는 처방이기 때문이다.
2008년에 시작되어 아직도 헤어나지 못한 세계금융위기는 기실 재정을 금융이 대신할 수 있을 거란 믿음이 만들어냈다. 기후온난화도 시장 메커니즘(탄소가격의 변화)이 해결할 수 있으리란 믿음 역시 위험천만하기 그지 없다. 이 둘이 지금 인류 전체에 던져진 시험이라면 한국이 반복해서 치르고 있는 시험은 더 구체적이다.
남대문이 눈 앞에서 화마에 휩싸여 무너져 내린 사건은 사설 경비업체에게 국보1호의 안위를 맡겼기 때문이다. 하루 종일 남대문을 감시하는 공무원 대신 사설업체에 맡기는 것이 훨씬 싸게 먹힐 수 있다. 하지만 비용을 아끼기 위해 최대한 많은 곳을 동시에 점검하는 사설업체는, 취한 노인 한 명을 막지 못해 우리의 상징을 태워 버렸다. 아마도 그들에겐 돈을 많이 주는 빌딩이 더 중요했으리라.
해군과 어선들이 주위를 에워쌌지만 세월호의 아이들을 신속하게 구조하지 못한 것은, 정부가 총지휘 책임을 언딘이라는 사설업체에 맡겼기 때문이다. 이에 앞서 정부는 산업의 효율을 높인다는 명목으로 선령 규제를 완화했고 선박의 구조변경에 대한 감독도 퇴직공무원들로 구성된 협회에 떠넘겼다.
이번의 메르스 사태도 비슷하다. 한국 의료제도의 특성 때문에 메르스 감염의 허브가 된 삼성병원을 감독한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정부는 “그저 독감일 뿐”이라는 ‘과학적 사실’만 되풀이했다. 서울시장이 정보공개를 촉구하고 폐쇄를 입에 올린 이후에야 삼성은 스스로 부분 폐쇄를 결정했다.
한미 FTA나 TPP는 국가정책을 송두리째 사적 투자자에게 맡기는 국제조약이다. 재난에 대한 어떤 긴급조치도 투자자의 이익을 훼손한다면 투자자국가중재제도(ISD)의 대상이 된다. 2001년 아르헨티나의 코랄리토(외화 유출을 막기 위해 페소화의 태환을 금지한 긴급조치)는 무려 47건의 ISD를 동시에 맞았다. 이런 상황에서 공무원들은 어떤 위기에 대해서도 최소한의 대응만 하려 들 것이다.
또 한번의 시험을 치를 여유가 없다. 이제라도 공익의 범위와 공급방식을 결정하고 국가가 전 과정을 감독하도록 해야 한다. 공공을 시장이 대체할 수 없다는 점을 이제는 인정해야 한다. 이번에도 적당히 넘어가면 더 큰 재앙이 기다릴 것이다. 예컨대 기후온난화가 본격화하면 그 때는 아무리 후회해도 우리 모두 파멸에 이르게 된다.
(물론 관료조직의 단점도 존재한다. 이른바 1960년대의 이른바, 공공선택이론이 유포시킨 ‘정부실패론’이 그것이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관해서는 다음번에 토론하기로 하자)
정태인(칼폴라니사회경제연구소 소장)
<참고문헌>
칼 폴라니, 홍기빈 편역, 2006, “전 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책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