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스승인 박현채 선생이 그랬습니다. “대중이 필요로 하면 무조건 쓴다. 몰라서 못 쓴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지금 그리스 상황을 우리가 알아야 할까요? 만일 그렇다면 저는 아무 것도 몰라도 써야 합니다. 더구나 참여정부 시절 동북아비서관을 하면서 유럽연합(EU)을 모델로 삼았던 저로선 마땅히 써야 하겠죠.
여러 언론에서, 특히 별로 보수적이지 않은 ‘경제전문가’들이 부정부패나 과다한 복지가 그리스 위기의 근본 원인이라고 너무나 쉽게 단정하는 걸 보면서, 또 우리나라의 상황과 비교하면서 그리스 국민들의 나태를 탓하는 걸 들으면서 “몰라도 써야 한다”는 제 생각은 더욱 굳어졌습니다. 해서 그리스 경제에 관한 별 지식이 없으면서도, 그간 읽은 칼럼과 몇 편의 논문에 의지해서 이 편지를 보냅니다(그러므로 구체적인 사실보다는, 지금 그리스 사태가 대체로 어떻게 흘러 가고 있는지에 초점을 맞춰서 읽으시기 바랍니다).
치킨 게임
현재 그리스 상황은 점입가경입니다. 국가부도를 둘러싼 외교적 문서는 합의가 이뤄지기 까지는 공개되지 않는 것이 상례인데 며칠 사이에 그런 문서의 원본이 공개됐습니다.
(☞바로 가기)
(☞바로 가기)
첫 번째 문서는 채권자를 대변하는 트로이카(EU집행위원회, 유럽중앙은행, IMF)가 3차 구제금융을 받기 위한 조건을 표로 정리해 놓은 겁니다.
가장 큰 요구는 재정흑자를 달성하라는 겁니다. 2015년 GDP의 0.1%, 2016년 2%, 2017년 3%, 2018년 3.5%라는, 기초재정흑자(기초재정이란 이자지급분을 뺀 재정수지를 말합니다)의 구체적 목표를 제시했습니다.
뒤에 보시겠지만 구제금융을 받은 5년간 그리스 경제는 마이너스 성장률을 보이다가 작년에 겨우 0.8%의 성장을 했습니다. 성장률이 마이너스면 세수도 줄어드는 게 당연하겠죠. 그러니 이 얘긴 결국 사회지출을 줄이라는 겁니다.
트로이카는 주로 연금을 지목해서 2016년에 GDP의 1% 만큼 줄이라고 요구했습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노인에게 돌아가는 돈을 10조원 이상 줄이라는 거죠. 한편 세수를 늘리는 방편으론 표준 부가가치세율을 23%로 올리라고 요구했습니다. 역진적인 세수확보를 요구한 거죠. 또 조기퇴직자에게 벌금을 부과하라는 지시도 있습니다. 한편 노동시장개혁에 관해서는 대화와 타협을 강조하면서도 트로이카의 동의 없이는 어떤 정책도 시행할 수 없다고 못박았습니다. 그리스 정부가 소유한 자산의 민영화, 즉 헐값 판매(fire sale)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이런 문서를 보면서 굴욕을 느끼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겁니다. 5년간 그야말로 뼈 빠지게 구제금융 조건을 지켰는데 국채는 엄청나게 늘어났고 GDP는 위기 이전 수준의 75%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실업율은 27%까지 치솟았는데 특히 청년들은 둘 중 하나가 실업자인 상황이니 남녀노소 모두 반발하는 게 당연해 보입니다.
트로이카의 이런 쥐어짜기 긴축정책(austerity)에 반대하여 구제금융 조건의 재협상을 공약으로 내걸고 당선된 시리자 정부로선 정말 난감한 상황입니다. 결국 이 조건을 수용할지 여부를 국민투표에 부치겠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첫 번째 문서는 시리자 정부 쪽에서 흘렸을 가능성이 높습니죠). 과연 이 승부수는 ‘신의 한수’일까요?
두 번째 문건은 치프라스 총리가 트로이카에 보낸 편지입니다. 한 마디로 항복문서입니다. 부가가치세율도 더 올리고 거의 모든 조건을 다 받아들이겠다는 겁니다. “겉으로 당당한 척 하지만 실은 당신들의 정부가 이렇게 비겁하다” 필경 이 문서는 트로이카 쪽에서 유출했겠죠.
상대의 항복을 요구하며 전 속력으로 마주 달리는 두 자동차. 전형적인 치킨게임입니다. 그리스국민들은 국민투표에서 어느 한 쪽의 손을 들어줘야 합니다. 그러나 도대체 어떤 협상안에 대한 찬성과 반대인지도 불분명합니다. 치프라스 총리가 국민투표를 선언한 순간, 트로이카는 최종 협상안을 거둬들였거든요.
거시 경제지표는 분명 회복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지만, 그건 국민들의 삶을 희생시킨 결과입니다. 5년 동안 고생하면 좋은 세상이 열린다는 IMF의 약속은 너무나 현실과 멀었습니다(<그림1>참조)
< 그림1> IMF의 추정과 현실의 실질 GDP
< 출처> Krugman, 2015, Greece Breaking
이렇게 이미 신뢰를 잃은 된 트로이카의 추정을 믿고 더 가혹한 조건을 받아들이라는 건 누구라도 납득하기 어렵겠죠.
시리자 정부가 국민투표를 강행한 것은 이 때문이겠죠. 반면 트로이카는 당신들이 No(협상안의 거부)에 표를 찍는 순간 그리스는 유로지역에서 탈퇴(이른바 GREXIT)하는 것이고 국제적 미아가 될 것이라고 협박합니다.
치킨게임의 균형은 어느 한 쪽이 양보하는 겁니다. 하지만 현재로선 두 자동차가 정면 충돌하는 상황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하는 그리스 시민들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도대체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른 걸까요?
그리스 사태의 세 국면
현재의 사태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리스가 유로지역에 가입한 2001년부터 지금까지를 세 국면으로 나눠서 살펴 보겠습니다. 첫 번째 국면은 그리스의 유로가입부터 위기 이전까지(2001-2009)입니다. 두 번째는 트로이카의 두 차례 구제금융 조건에 따라 긴축정책을 행한 5년 동안의 시기(2010-2014)이고 세 번째는 2015년 1월 시리자 정권이 들어선 이후입니다.
(1) 첫 번째 국면 – 행복한 추억
1999년 유럽의 엘리트들은 과감한 결정을 내립니다. 기존의 지역통합이론에서 맨 마지막 단계로 설정되어 있던 통화통합을 먼저 하기로 한 겁니다. 그리스는 2001년에 유로존에 가입합니다.
유로존 국가들이 단일 통화를 사용한다는 것은 과거의 금본위제(또는 고정환율제)를 채택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 체제에서 거시불균형은, 요즘 용어로 “내부평가절하”(internal devaluation)에 의해 조정됩니다. 즉 경상적자를 본 나라에서 유로가 유출되고, 임금과 물가가 떨어지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대외경쟁력이 회복되면 수출이 늘어서 균형으로 향하게 되는 거죠.
이에 대비되는 외부 평가절하란 통화가치가 떨어지는 걸 말합니다. 즉 외환위기 이후 원화의 가치가 급속하게 떨어져서 수출이 증가한 것이 바로 이 메커니즘입니다. 유로존에서는 이제 같은 돈을 쓰니까 이런 조정이 일어날 수가 없죠. 마치 미국의 캘리포니아와 시카고 사이, 우리나라의 서울과 강원도 사이에서 환율 조정이 일어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통화통합의 조건에 관한 경제이론은 1960년대에 처음 나와서 많은 논의가 이뤄졌습니다. 그러니 1990년대에 유로화를 만들 때는 누구나 알고 있던 사실이었죠. 하지만 유로존의 경쟁력 약한 나라들, 예컨대 그리스나 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 등에서도 이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유로가 빠져나가기는커녕 오히려 몰려들었습니다. 이렇게 경제논리에 반하는 현상은 미국에서도 일어났죠. 하지만 미국은 달러라는 기축통화를 보유한 나라고, 세계경제가 나빠지면 가장 안전한 미국 재무성 증권을 사려 하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벌어진다지만 유럽에선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요?
아무래도 경제가 나쁜 나라가 발행한 국채의 이자율은 높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유로가 도입되면서 모든 나라의 채권 이자율은 독일의 국채 수준으로 수렴하기 시작했습니다. 상대적으로 이자율이 낮아진 거죠. 요즘 우리나라에서 그렇듯이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빚을 내는 걸 겁내지 않게 됩니다. 유로존에 큰 문제가 없는 한, 저이자율은 계속 유지될 거라는 믿음이 퍼졌습니다. 증시와 부동산시정이 흥청거렸고 흑자국의 갈 곳 없는 유로도 몰려들었습니다.
동아시아와 미국 간의 관계가 유럽 내에서도 재현된 겁니다. 몇 번 말씀드린 수출주도성장과 부채주도성장의 결합이죠. 유럽에선 독일, 오스트리아, 핀란드 등이 수출주도국가이고(요즘은 이들은 ‘북쪽’이라고 부릅니다) 그리스와 스페인 등이 부채주도국가(‘남쪽’)입니다. 그러나 빚이 끝없이 쌓이는 데도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을 수 있을까요? 미국에선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터졌고 유럽에선 남쪽의 국채가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골드만삭스같은 투자은행이 각국의 국채 발행을 도와주면서 파생상품으로 국채규모를 감춘 것도 사태의 급진전에 톡톡히 한 몫을 했습니다.
유로가 일거에 빠져 나가고 국제신용평가회사가 국가등급을 내리면서 남쪽 국가들은 위기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나라의 1996년과 유사한 상황입니다.
2. 두 번째 국면 – 뼈를 깎는 고통
결국 그리스 정부는 2010년과 2012년 두 번에 걸쳐 IMF와 EU의 구제금융을 받습니다. 돈을 받는 대신 IMF의 요구조건(conditionality)을 수용해야 했죠. 기본적으로 우리가 1996년에 수용한 조건과 같습니다. 다만 환율 조정이 일어날 수 없으니까 더 가혹한 내부평가절하를 요구했고 재정적자 해소를 특별히 강조했죠.
만일 그리스와 독일의 관계가, 캘리포니아와 시카고, 또는 서울과 강원도의 관계와 같다면 다른 방식의 조정이 일어납니다. 즉 두 지역에 같은 세율을 적용해서 세금을 거둬들인 다음, 둘 사이의 불균형을 줄이기 위해서 시카고나 강원도에 재정보조금을 주게 되겠죠. 즉 같은 나라에 속한다면 독일(지역)이 그리스(지역)에 보조금을 주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런 내부 메커니즘이 유로존에선 불가능합니다. 재정통합이 안 된 상태고, “우리는 같은 나라”라는 정체성도 없으니까요. 해서 유럽위기가 닥쳤을 때 많은 학자들이 문제는 재정적자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적자(deficit of democracy)라고 한탄하기도 했습니다.
더구나 2009년은 주류경제학계가 원론대로(또는 19세기 경제학 이론대로) 긴축정책을 강조하던 때입니다. 특히 독일국민의 정서론 다른 나라에 대한 부채감면과 보조금 지급은 상상조차 어려운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독일 “질서자유주의”의 특징을 지적합니다만(1,2차 대전 후 독일의 부흥은 근검절약에서 비롯됐다), 제가 보기엔 통독 이후의 경험이 더 생생하게 살아났을 겁니다. 동서독 단일 통화를 채택한 이후, 생산성 격차에 따라 동독지역의 경제가 파산에 이르렀고 정부는 10년에 걸쳐 재정을 투입해야 했죠. 그런데 같은 나라도 아닌 곳에 돈을 줘야 한다니 독일 국내 정치에서는 용납이 되지 않을 겁니다.
결국 남은 것은 오직 하나, 앞에서 이야기한 내부 평가절하, 즉 임금과 물가의 하락 뿐이었습니다. 이 구제금융의 조건은 2009년에서 2014년까지 ‘효과적으로’ 작동했습니다.
< 표1> 그리스의 경제성장률 추이
<출처> 강유덕, 임태훈, 오태현, 2015,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가능성과 한국경제에 미치는 영향, p 6.
(☞바로 가기 (한글로 된 문서 중, 그리스 상황을 가장 잘 보여주는 문서입니다))
가혹한 긴축정책의 여파로 2010년 –5.4%, 2011년 –8.9%로 곤두박질한 성장률은 2014년 0.8%까지 증가했고(<표1>) 기초재정수지도 미미하나마 흑자를 기록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수출이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10%포인트 정도 증가했고 특히 관광산업의 경쟁력이 높아져서 GDP 성장에 대한 수출의 기여도도 높아졌습니다. 당연히 트로이카는 자신들의 정책이 성공했다고 평가하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림2>와 <그림3>에서 보듯이 GDP는 위기 이전의 75% 수준에 머물렀습니다. 5년간의 고통을 겪었는데도 그 결과는 과거 국민소득의 3/4 밖에 되지 않고 1인당 GDP도 1/3 가량 줄어들었습니다.
<그림2> 실질 GDP의 추이 (2010=100)
<출처> 강유덕 등, 2015, p6
< 그림3> 실업율의 추이
< 출처> 강유덕 등, 2015, p6
위기 때부터 치솟은 실업율은 여전히 27% 수준이고(<그림3>) 특히 청년실업율은 50%까지 올라갔습니다. 즉 트로이카를 만족시킨 거시지표의 개선은 오로지 그리스 국민의 삶이 피폐해진 결과입니다.
도대체 이 기간 동안 받은 구제금융 2520억 유로는 어디로 간 걸까요? “주빌리 부채 캠페인”에 따르면 1492억유로(59%)는 부채 원금과 이자를 갚는 데 썼습니다. 또 약 345억유로는 민간 채권자들의 부채탕감에 대한 대가로 지불됐습니다.
빚으로 빚을 갚은 거죠. 다만 외국의 민간 채권자에서 공공 채권자(전체 금액의 78%)로 빚쟁이가 바뀌었을 뿐입니다. 반면 그리스의 국내 채권자인 은행과 연기금은 구제금융 순위에서 밀려나, 급기야 파산상태에 이르렀습니다. 국가채무위기가 은행위기로 발전한 겁니다(우리나라에서 외환위기가 국내 금융위기로 발전한 것과 유사합니다). 2012년의 2차 구제금융은 이들 은행을 구제하기 위한 겁니다. 결국 구제금융 중에 그리스 경제에 직접 투입된 돈은 201억유로(약 13%)에 불과했습니다. 즉 우리나라 외환위기 때와 마찬가지로 구제금융은 외국인 민간 채권자, 즉 독일과 프랑스 등의 대형은행의 구제를 위해서 쓰인 겁니다. 문제는 향후에도 마찬가지로 구제금융의 90% 이상이 빚 갚는 데 쓰일 거라는 데 있습니다. 또 다시 고통은 국민 몫이라는 얘기죠.
기껏 경제성장율 0.8%로 새로 생겨난 빚을 갚을 수는 없습니다. 또 다시 그리스는 지불불능 상태에 빠졌고, 트로이카는 앞에서 본 것처럼 더욱 가혹한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IMF 등 국제기구가 지난 30여년 간 그래 왔듯이 언제나 문제는 긴축과 구조개혁의 부족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동아시아처럼 수출이 획기적으로 늘어나고 투자가 급증하지 않는다면 이 상황은 영원히 반복될 겁니다. 환율이 작동하지 않고 수출비중이 적은데다 주력산업에 대한 투자가 생산성 증가로 이어지지 않는 한(그리스의 주력산업은 관광입니다), 현재의 처방은 결코 선순환을 낳지 못하겠죠.
3. 세 번째 국면 – 벼랑 끝에서
2015년 1월 25일 조기총선에서 시리자가 36.3%의 득표율로 집권(그리스 독립당과의 연정)하자 세 번째 국면이 벌어졌습니다. 곧바로 유럽중앙은행은 그리스 국채를 담보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결정을 했죠. 새로운 정부 길들이기에 들어간 겁니다.
그리스 신정부와 트로이카가 2월 20일 4개월의 구제금융 연장에 합의했지만, 6월 들어 빚을 갚지 못하자, 트로이카는 글머리에 본 최후협상안을 제시했고, 치프라스 총리는 국민투표로 대응했습니다. 이제 국민투표에서 어느 쪽이 승리하느냐가 힘겨루기의 관건이 됐습니다.
치킨게임의 균형은 어느 쪽이든 양보를 하는 겁니다. 해서 치킨게임에서 이기는 방법은 상대가 나를 “미친 놈”으로 믿게 하는 겁니다. 그래야 치킨(겁쟁이)이라는 조롱을 감수하면서도 충돌을 막기 위해 핸들을 돌릴(양보할) 테니까요.
양쪽의 “미친 놈으로 포장하기”가 GREXIT와 경제위기인 셈입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게임이론 교과서에 나오는 것처럼 보수표가 확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유로존에서 탈퇴하거나(법적으로 대단히 복잡한 일입니다), 협상안을 거부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정확히 모르니까요. 또 하나, 교과서와 달리 현실에서는 막후 재협상도 가능합니다. 즉 보수표를 사슴-사냥게임으로 만들어서 모두가 이익을 볼 수도 있습니다. 논리적으론 아직 희망이 살아 있다는 얘깁니다.
경우의 수에 따라 어느 쪽이 유리한지, 간단한 시나리오를 상상해 볼 수는 있겠죠. 국민투표에서 No가 승리하고, 재협상에 들어가는 경우는 그리스 국민들이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입니다. 긴축정책의 강도는 약해지고 내수에 기초한 성장도 가능해질 테니까요.
트로이카의 협상안에 찬성해서(Yes가 승리해서), 새 정권이 들어선 이후 더 나쁜 조건의 재협상이 이뤄지는 경우는 이보다 나쁜 결과를 낳겠죠. 하지만 치프라스 정권이 물러나더라도 이를 대신할 정부가 순조롭게 들어서기도 어렵고 그리스 시민들의 저항은 더욱 심해질지 모릅니다.
협상안을 거부하고 결국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로 이어지는 경우에는 더 극심한 혼란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드라크마화(2001년 이전의 그리스 통화) 체제로 돌아가는 데도 꽤 오랜 시간과 갈등이 뒤따를 것이고 본격적으로 환율조정이 일어난다고 해도 단 기간에 수출과 투자가 늘어나기는 어렵습니다. 중국과 같은 제3자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는다면 가장 나쁜 결과로 이어질지도 모릅니다.
국민투표에서 협상안을 받아들이고 새 정부가 순조롭게 들어선 뒤, 트로이카도 과거의 협상안을 그대로, 또는 더 좋은 조건으로 이행하라고 요구한다면 그리스 시민들에겐 다행이겠죠. 하지만 트로이카는 기본적으로 긴축정책 기조를 고수할테니 고통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아무도 기약할 수 없을 겁니다.
진정한 문제는?
이미 길어질 대로 길어졌지만 한 마디만 덧붙이고 끝내려 합니다. 어차피 그리스 문제에 관해선 국민투표 결과가 나온 후에 한 번 더 써야 하니까요. 그리스 사태는 1980년대 금융위기가 발발하기 시작한 이래, 지속된 문제를 극적으로 드러냈습니다.
밀그롬과 로버츠의 교과서가 말하듯 금융위기는 3중의 ‘도덕적 해이’의 결과입니다. 채무자는 갚을 능력 이상으로 빌렸으니 문제고, 채권자는 그런 대출을 했으니까 그 역시 일종의 도덕적 해이죠. 마지막으로 이런 상황을 감독하지 못한 금융당국도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외환위기 때 겪은 바대로, 도덕적 해이에 대한 처벌은 오직 첫 번째에 집중되었습니다. 두 번째 도덕적 해이에 대해선 처벌은커녕 구제금융으로 보상을 해주기 일쑤였죠. 대형 금융기관일수록 금융시스템 자체를 구성하기 때문입니다(2009년 “시스템적으로 중요한 금융기관”의 거시건전성 규제가 논의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죠). 2008년 이래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세계금융위기도 이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더욱 큰 도덕적 해이, 예컨대 검증되지 않은 신상품에 대한 모험적 투자를 조장하여 새로운 금융위기를 준비하고 있는 셈입니다.
세 번째 도덕적 해이에 관해선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새로운 국제기구와 감독기구 개편이 논의됐지만 흐지부지된 지 오래입니다. 규제 대상인 월스트리트 출신 인사가 감독기구의 수장이 되는 일도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결국 거대한 시스템 위기의 비용은, 이런 ‘도덕적 해이’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국민 전체가 부담하는 일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현재의 그리스 사태는 이런 근본적 결함에 대해 정치권과 시민이 반발하는, 새로운 상황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지역적 경제통합과 관련해 현 사태가 가르쳐 준 교훈은 재정통합과 정치통합(유럽 전체의 민주주의) 없이 통화통합 먼저 할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위에서 본 첫 번째 국면의 행복한 나날들은 거품이 문제를 은폐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죠. 앞으로 유로의 존속과 유럽연방의 꿈을 계속 키워 나가려면 이런 기본적인 문제부터 해결해야 합니다. 만일 현재처럼 계속 채무국에 긴축을 강요한다면 각국 간 경제적 격차와 각국 내의 계층 간 불평등은 더 심해질 테고 결국 유럽 전체를 장기간의 불황과 사회갈등의 늪에 빠뜨릴 겁니다. 일반 시민들은 이제 유럽연방의 꿈을 접게 되겠죠.
금융자본의 단기 이익(구제금융에 의한 채권의 환수), 국내 정치의 요구(그리스에 대한 보조의 금지와 제재), 국제적 공동이익의 제도(재정통합과 민주주의의 발전)는 어긋날 수 밖에 없습니다. 시야가 다르고 문법마저 다르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렇게 서로 갈등하는 요구를 조화롭게 만드는 일은 이제 일상이 될 겁니다. 글로벌라이제이션이 만들어 낸 상황이니까요. 즉 정치의 역할은 이제 국민국가의 차원을 넘어서는 일까지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생태문제는 또 다른 차원에서 이런 정치적 능력을 절박하게 요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