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라엔 모든 게 있습니다. 여기선 당신이 원하는 게 무엇이든 찾을 수 있습니다. 당신이 찾을 수 없는 게 있다면 그건 희망입니다.”(영어를 옮겼으므로 일어 원본이나 한국어 번역본과 다를 수 있다). 무라카미 류가 자신의 소설에서 한 얘기다.
1991년 일본의 부동산 거품이 터진 뒤, 딱 10년째 되는 해에 나온 소설이었다. 예술가는 어떤 천재 사회과학자보다도 더 정확하게 미래를 예감한다. 2000년이면 일본은 이미 “잃어버린 10년”을 겪은 상태였고 그 이후 15년을 또다시 잃어버려야 하는 시점이다. 그 어떤 경제학자가 역사를 이렇게 해석하고 예측했을까? 1985년 플라자 합의로 엔화 가치가 두배로 뛰면서 위기론이 대두했지만, 오히려 미국의 상징인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그리고 컬럼비아 영화사마저 사들이지 않았는가?
‘세계 최고의 일본’(Japan as No.1)이라는 자부심도 이제 희미한 기억으로 남았을 뿐이다. 이후 25년간의 침몰이야말로 끝이 어딜지 모른다는 점에서 진정한 공포일 테다. 일본은 인구를 잃었고, 성장과 고용을 잃었으며 그예 희망을 잃었다. 프리터스(Freeters, 오로지 알바), 니트(NEET, 교육·고용·훈련을 받지 않는 젊은이들)에서 오타쿠, 히키코모리(은둔자)를 거쳐 이젠 초식남, 건어물녀가 일본 젊은이들을 일컫는 이름이 되었다. 젊은이들은 일자리와 세상을, 그리고 미래를 차례로 잃었다.
일본의 역사로 치면 지금 우리는 어디쯤 있는 걸까? 한국의 모든 사회경제지표는 1997년 외환위기를 즈음해서 뚜렷하게 나쁜 쪽으로 치달았다. 압축성장만큼이나 압축침체를 겪고 있는 셈이다. 젊은이들의 비명 역시 88세대, 3포세대와 5포세대(연애, 결혼, 출산, 집, 인간관계 포기 세대)를 지나 ‘헬조선’까지 빠르게 진화했다. 바로 ‘희망의 제국에서 탈출하자’(무라카미 류의 소설 제목)는 얘기가 아닌가? 어쩌면 우리는 일본의 1995년쯤에 와 있고 앞으로 20년간 침몰을 더 겪어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정부는 무엇을 해야 했을까? 일본의 잃어버린 25년은 곧 신뢰상실의 역사였다. 잃어버린 25년 중 딱 3년 빼고 계속 집권한 자민당은 1995년의 고베지진 때, 야쿠자보다 정부가 더 느리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웠다. 그리고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태를 맞으면서, 일본주식회사를 이끌던 ‘발전국가’의 이미지는 완전히 사라졌다. 아베노믹스라는 이름으로 아베 총리가 들고나온 건 기껏해야 2008년에 파산한 신고전파 구조개혁이고 외교안보는 종전 이전의 “과거로 돌아가자”는 퇴영적인 것이다.
이에 뒤질세라 한국 정부는 세월호와 메르스 사태 등 국가위기에 대해 “나몰랑”으로 일관했고, 경제정책이라곤 일본의 1980년대 말 부동산 투기 정책을 되풀이하는 것이 고작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경포대”(경제를 포기한 대통령)라면 2%대의 경제성장률을 거둘 박근혜 대통령은 “경망대”(경제를 망친 대통령)라 불러 마땅하다. 일본의 ‘게이레쓰’(계열)도 한국의 ‘재벌’처럼 동네 빵집이나 문구류까지 집어삼키려 하지는 않았다. 일본의 정경유착이 악명 높다지만 검찰과 재판관까지 매수한 게이레쓰는 없었다.
우리가 나은 점도 있다. 20년의 시차 덕에 우리 시민들은 현재의 위기를 벗어날 방향을 명료하게 알고 있으며 선거 때마다 이 방향을 요구했다. 경제민주화와 복지, 소득주도성장이 그것이다. 박근혜 정권은 선거가 닥치면 이런 요구를 수용하고 현실에선 완전히 반대쪽으로 치달았다. 당연한 결과로 침체와 위기가 왔고, 대통령은 버릇처럼 세계적 환경, 피치 못할 사건, 그리고 국회를 탓했다. 이런 억지와 무능을 용인해서 장기집권을 허용한다면 그 대가로 우리 아이들은 ‘압축적 침몰’을 겪어야 할 것이다. 세월호의 그 아이들처럼….
정태인 칼폴라니사회경제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