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인 칼럼] 재벌과 부자를 위한 정부

 

소비 부진과 2% 성장

8월 26일 정부가 ‘최근 소비 동향과 대응 방안’을 발표했습니다. “관계 기관 합동”, 즉 경제 부처들이 함께 마련한 정책이란 얘긴데, 제목 위에 아래의 문구가 붙어 있습니다. (☞관련 자료 : 최근 소비 동향과 대응 방안)

“이 자료는 ’15. 8. 26일 14:00부터 보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금일 경제 관계 장관 회의 논의 결과에 따라 변경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제 관계 장관 회의도 거치지 않은 발표라는 뜻인가요? 세월호 때도, 메르스 때도 “나몰랑”으로 일관하던 정부가 최근의 소비 위축엔 신속하게 대응한 거지요. 무슨 내용이기에 이리도 급한 걸까요? (“관계 부처 합동”이 아니고 “관계 기관 합동”이네요. 후자는 주로 치안이나 대공 사건에 쓰는 용어 아닌가요?)

“세월호 사고(14. 4월)로 부진했던 소비가 저유가 등으로 회복세를 보였으나, 메르스 영향 등으로 감소세 전환(15. 2/4분기 –0.3%)”(1쪽)했기 때문에 나온 정책입니다. 최경환 부총리는 매년 민간 소비가 3%포인트 이상 증가할 거라고 장담했습니다. 그런데 소비 증가율은 마이너스고 따라서 성장률은 기껏해야 2%에 머물 테니 대통령 볼 면목이 없겠죠. 그래서 국회를 거치지 않고 바로 다음 날부터 시행할 수 있는 정책부터 발표한 게 아닐까요?

물론 메르스 사태 때를 돌이켜 생각해 보면, 사람들이 많은 곳엔 웬만하면 가지 않으려고 했으니까 특히 서비스업이 타격을 받았을 겁니다. 하지만 이 문서에도 나오듯이 이렇게 일시적으로 억눌렸던 소비(“pent-up demand”)는 원인이 사라지면 빠르게 회복되기 마련입니다. 부자들이 주로 이용하는 백화점 매출액은 이미 메르스 이전 상태로 되돌아갔습니다(2쪽).

문제는 가계의 평균 소비입니다. 2014년 1/4분기부터 15년 2/4분기까지 74.5→71.5→72.3→71.6으로 1년 동안 약 3%포인트 줄어들었습니다. 특히 아래 그림에서 보듯이 실질 소득이 증가했는데도 소비가 감소하는 건 소비부진이 장기화할 우려가 있다는 거지요.

▲ [그림 1] 소비자 심리 지수와 가계 소득·소비 지출 추이. 8월 26일 발표한 ‘최근 소비 동향과 대응 방안’ 2쪽에서 인용했다. ⓒmosf.go.kr

[그림 1]의 왼쪽처럼 “심리 위축으로 소비 성향이 하락”한 게 문제니까 국민들의 심리를 개선해야 한다는 거죠. 그래서 나온 정책이, 아래 기사에서 보듯이 자동차와 대용량 가전제품 등의 ‘개별 소비세'(과거에는 특별 소비세로 불렸고, 일반적인 경제 용어론 ‘사치세’입니다)를 인하하겠다는 겁니다. 과연 이 정책은 올바른 진단에 따른 올바른 대책일까요? (☞관련 기사 : 최경환호, 3년 만에 개별 소비세 인하…소비 활성화 대책)

 

소비 위축의 이유 : 가계 부채의 양적/질적 악화

우선 아래 그림을 보면 정부가 제시한 설명과 달리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2013년 1/4분기를 제외하곤 민간 소비 증가율이 GDP(국내 총생산) 증가율을 밑돌았고 세월호(2014년 4~5월)나 메르스 사태(2015년 5~6월)와는 특별한 연관을 찾을 수 없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 [그림 2] 국민 총생산(지출)과 민간 소비 증가율(2005년 2/4분기~2015년 2/4분기). 붉은 선은 실질 국민 총생산 증가율. 한국은행 경제 통계 시스템(ECOS)에서 인용했다. ⓒecos.bok.or.kr

(정부가 국민 총소득(GDI)을 사용한 것은 ‘소득’이라는 이름 때문에 그럴 듯해 보이지만, 국제 교역 조건의 변화를 반영한 이 지표가 민간 소비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다만 국제 유가 하락 때문에 이 수치가 높아진 걸 이용한 겁니다. 진정으로 정확한 비교를 위해서는 총가계 처분 가능 소득(PGDI)을 사용해야 하는데 이 통계치는 1년 단위로 발표됩니다.)

우리는 2011년 중반 이래 민간 소비 증가율이 2%를 넘지 못하는 이유를 잘 알고 있습니다. 바로 가계 부채 때문입니다. 지난 8월 25일 한국은행이 발표한 ‘2015년 2/4분기 중 가계 신용(잠정)’에 나온 [표 1]을 보시죠.

▲ [표 1] 대출 기관별 가계 대출 증감액. 지난 8월 25일 한국은행이 발표한 ‘2015년 2/4분기 중 가계 신용(잠정)’ 2쪽에서 인용했다. ⓒ한국은행

우선 총량으로 2013년 54.6조 원(6.0% 증가), 2014년 64.5조 원(6.5% 증가), 그리고 금년 상반기 동안 31.7조원이 증가(1분기 7.7%, 2분기 9.5% 증가)해서 2015년 2/4분기 말 가계 신용 잔액이 1,071조 원(1쪽의 통계로는 1130.5조 원)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즉, 가계 부채 증가 속도가 9%대로 늘어나는데, 경제 성장율은 2%대로 떨어지면(‘총처분 가능 소득(PGDI)’은 3%대) 가계 부채가 곧 국민 총생산(2014년 1,426조 원)보다 커지겠죠.

더 큰 문제는 예금은행의 가계 대출은 1/4분기 7.8조 원에서 2/4분기 –3.0조 원으로 감소(안심전환대출채권이 주택금융공사로 넘어갔기 때문입니다)한 반면, 기타 금융 기관 대출이 4.9조 원에서 26.8조 원으로 대폭 증가(전년 동기대비로는 13.9% 증가)했다는 사실입니다. 또 이 중 대부분(24.4조 원)은 기타 금융 중개 회사의 대출인데요(붉은 네모), 주5)를 보면 기타 금융 기관이란 “증권사, 자산유동회사, 대부사업자 등”입니다.

한국은행의 발표만 봐서는 이들 기관의 대출이 급증한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가계 부채의 질이 나빠지고 있다는 건 분명합니다. 중산층 이하의 빚 돌려막기가 시작된 건지도 모르죠. 즉, 1회성 사건이나 단순한 심리 위축 때문에 소비가 감소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얘깁니다.

 

“코리아 그랜드 세일”

이런 상황에서 소비 증가는 소득이 충분히 증가해서 빚을 어느 정도 정리한 이후에나 가능해질 겁니다. 물론 경제 성장률을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다면 별도의 부채 축소(디레버리징) 대책이 필요 없을 수도 있습니다.

정부는 소득은 놔두고도(최저 임금을 쥐꼬리만큼 올린 게 그 증거입니다) 소비를 늘릴 수 있다고 믿는 모양입니다. [그림 3]은 그래서 나온 정책의 개요인데 정부 표현대로 “적극적이고 직접적인 소비 활성화 노력”입니다.

▲ [그림 3] 소비 활성화 정책 개요. 8월 26일 발표한 ‘최근 소비 동향과 대응 방안’ 2쪽에서 인용했다. ⓒmosf.go.kr

첫 번째 “개소세 부담 완화”는 승용차, 대용량 가전제품, 녹용·로열젤리 등 사치재에 붙어 있는 개별 소비세를 연말까지 30% 줄여주겠다는 겁니다. 정부는 이런 편법에 “탄력세율”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을 붙였군요. 이런 고가의 제품을 조만간 사려고 했던 사람들은, 금년에 소비를 하게 되겠죠. 또 “가구, 사진기, 시계, 가방, 모피, 융단, 보석, 귀금속”에 대해선 과세 기준을 200만 원에서 500만 원으로 높여서 세금 부담을 줄이겠다고 합니다. 이 모두 돈의 여유가 있는 부자들에게 돌아가는 혜택입니다. 수출과 생산이 줄어 고민인 자동차 생산업자들도 일단 한숨을 돌릴 여유가 생기겠죠.

네 번째는 주택 연금 가입 요건을 완화하고(주택 소유자가 60세 이상이어야 가입할 수 있었는데 이젠 부부 중 어느 한명이라도 60세 이상이면 됩니다), 연금 가입자에게 2015년 말까지 재산세를 면제해 주었던 것을 18년까지 연장하겠다는 겁니다. 주택에 돈이 묶여 있는 노년층의 소비를 늘리는 정책이죠.

이 항목의 마지막엔 병행 수입, 해외 직구 등의 제도를 바꿔서 소비재의 수입을 촉진하는 방안도 슬며시 붙여 놓았습니다. 소비가 늘긴 할 테지만 이게 국민 경제에 무슨 도움이 될까요?

두 번째와 세 번째는 정부가 나서서 소비를 촉진하겠다는 겁니다. 두 번째는 이미 외국인을 대상으로 매년 해 오던 “코리아 그랜드 세일”을, 내국민도 포함하는 “전국적 합동 세일”로 확대하겠다는 겁니다. 특히 가을의 중국 관광객을 겨냥하여 케이팝(K-POP) 한류 페스티벌도 결합하겠답니다.

세 번째는 공공 부문의 가을 휴가를 독려하고(9월에 휴가비 조기 지급) 기업도 가을 휴가 실시에 동참하도록 하겠답니다. 휴일이 늘면 나라가 망할 것처럼 떠들던 정부가 획기적으로 변화한 건 반가운데, 과연 보통 사람이 가을에 이렇게 소비를 할 여력이 있을까요?

특히 가을철 관광·여가 활동 촉진에는 “골프 대중화 확산”도 들어 있습니다. 오는 10월에 열리는 “프레지던트 컵” 골프 대회 명예회장인 박근혜 대통령의 체면을 살리는 길이기도 하겠죠.  (뜬금없는 이 ‘골프 활성화’에 대해선 과거 기사를 참고하십시오.) (☞관련 기사 : ‘경제 민주화’ 실종 사건)

한 마디로 자동차와 고급 가전제품을 생산하고 골프장을 소유하고 있는 기업들, 그리고 이들 제품을 소비하고 즐기는 부자들을 위한 정책입니다. 정부가 어떤 정책을 쓴다 한들 보통 국민들이 소비를 늘릴 리 만무하니 자기들끼리 축제를 벌이겠다는 겁니다.

이 꼴을 보면서 아이들이 “헬 조선”을 외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합니다.

“한국 다 팔아 먹어라(Korea Grand Sale), 우린 이 지옥 같은 나라, 떠나련다.”

(추신) 도대체 이건 무슨 뜻일까요? “매주 수요일 ‘가족 사랑의 날’을 ‘캐주얼 데이’로 지정·운영하여 퇴근 후 가족 모임·외식 등 여가 활동 촉진”(6쪽) “가족 사랑의 날”처럼 바로 알아들을 수 있는 한글을 “캐주얼 데이”(무슨 뜻일까요?)라는 영어로 바꾸면 뭐가 달라진다는 걸까요? 제가 한글 전용론자는 아닙니다만 무슨 뜻인지, 짐작도 안 가는 영어를 남발하는 공문이라니, 우리 정부의 수준은 나날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정태인 칼폴라니사회경제연구소 소장

원글은 프레시안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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