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무너지는 ‘카르텔 정당’

미국과 영국의 진보 정치에서 버니 샌더스와 제러미 코빈이 힘을 몰아가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이 현상이 시사하는 바는 여러 가지이지만, 그중에서 특히 착목해야 할 지점은 정당정치의 구조 변동, 즉 ‘카르텔 정당’의 위기 혹은 몰락으로 보인다.

1990년대 이후 중도의 좌우 정당은 신자유주의적인 시장경제 개혁의 의제들에 합의하면서 사회·경제 정책에 있어 서로 비슷하게 수렴하는 길을 밟아나간다. 그러한 정책들 때문에 서민 대중들의 삶의 질이 악화돼 그에 반대하는 여론과 행동이 아래로부터 터져나왔다. 하지만 중도 좌파 정당이 이를 의제로 받지 않고 기존 합의된 의제들만을 고수하는 바람에 별 소용이 없었다.

본래 노동운동 등에 기초해 생겨난 중도 좌파 정당이 어떻게 이렇게 아래로부터의 압력에 요지부동일 수 있을까. 이는 ‘카르텔 정당’으로의 변화 때문이다. 정당의 의사결정구조와 정책 생산 과정은 형해화되거나 크게 왜곡되고, 정당의 주요한 의사결정 과정은 물론 여러 권력 자원도 당권을 장악한 소수와 그 주변 세력에게 집중돼 버린다.

최근 치러진 영국 노동당의 당 대표 선거는 이러한 지난 몇 십년간의 흐름에 근본적 구조적 변화가 임박했음을 알리고 있다. 1990년대 이후 토니 블레어가 이끄는 영국의 ‘신노동당’은 노동조합 등 전통적 대중 기반과 거리를 멀리 두면서,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출신으로 시장주의 정치경제를 지지하는 것이 합리적인 정치 노선이라고 믿는 정부 각료들이 지배하는 정당으로 변해갔다. 여기에 대해 각종 비판이 터져나오면 노동조합이나 구좌파 등과 같은 낡은 세력의 구시대적이고 비합리적인 선동이라고 무시해 버리곤 했다.

이번 선거에서 중심 쟁점이었던 내핍(austerity) 정책의 문제가 이러한 카르텔 정당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영국 보수파는 2008년 경제위기 이후 영국 경제의 살길은 오로지 엄혹한 경제 긴축 정책뿐이라고 주장했지만, 폴 크루그먼이 여러 번 역설했듯이 이는 억지에 가까운 논리였다.

그럼에도 블레어의 후예들이 이끄는 노동당은 이러한 정책 기조를 진리인 양 받아들였고, 당내 좌파라고 여겨졌던 ‘붉은 에드’ 전 대표도 기껏해야 그 정책으로 인한 서민들의 고통을 경감시켜 주자는 정도의 주장을 내놓았을 뿐이다. 이리하여 내핍 정책은 영국 정치의 ‘전 국민적’ 합의가 되어 버렸고, 내핍 정책 자체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목소리는 비합리적인 극단주의로 몰려 정치적 의제에서 배제됐다.

하지만 이는 다수 서민들의 생각과 큰 차이가 있었다. 제러미 코빈 후보의 돌풍 속에서 노동당의 당권파들이 가장 당혹스러워했을 사실 하나는, 코빈이 내핍 정책 자체를 분명히 반대하면서 내건 정책 각론들이 여론조사로 밝혀지는 영국 국민들의 민심과 거의 일치한다는 점이다. 내핍 정책에 대한 근본적인 반대는 비합리적인 극단주의가 아니라, 기실 영국의 진보 정치 진영에서 가장 중심으로 삼았어야 할 의제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의제를 지금까지 효과적으로 배제해 왔던 ‘카르텔 정당’의 메커니즘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젊은층을 중심으로 노동당 선거에 한 표를 행사해 코빈을 지지하겠다는 이들이 무더기로 입당한 것이다. 이 상황을 보는 당권파들의 심정을 ‘인디펜던트’의 한 논평가는 “큰일이다! 정열과 비전이 넘치는 젊은이들이 떼지어 우리 당으로 몰려오고 있다! 우리 당은 이제 망했다!”고 익살스럽게 표현하기도 했다.그 결과 블레어의 자식들이라고 할 후보들은 모두 창피할 정도의 득표율로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 또한 앞으로 민주당이 예전과 똑같을 수 없을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미국 민주당은 복마전같이 복잡하고 불투명한 내부구조로 악명이 높지만, 그 터줏대감이라 할 클린턴 집안은 이미 7년 전에도 풋내기 오바마에게 고배를 마신 바 있다. 미국의 사회·경제적 위기와 크게 동떨어진 양당 구조의 낡은 정치 의제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버리자는 사람들의 흐름 때문이었다.

지금은 이 흐름이 듣도보도 못하던 노인 정치가 버니 샌더스에게 몰리고 있다. 높은 지지율뿐만 아니라 힐러리에 못지않게 2600만달러를 모금한 그는 이제 금방 사라질 반짝 현상을 넘어 유력한 후보로 발돋움하고 있다. 그가 설령 패배한다고 해도, 미국에서 ‘민주적 사회주의’를 내걸고 사회·경제적 평등 강화를 주장한 목소리는 결코 정치적 의제에서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민주·공화 양당 간의 타협, 정당 엘리트들 및 그 주변 세력이 대중적 열망을 도외시한 채 정치적 의제를 마음대로 정하는 ‘카르텔 정당’ 또한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내년 총선을 앞둔 우리의 정당들이 깊이 생각해 볼 지점이다.

 
칼폴라니사회경제연구소 홍기빈 연구위원장

원글은 경향신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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