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동조합 49] 칼폴라니사회경제연구소, 차갑고도 뜨거운 이름
아시아 최초 개소, 한국형 사회적경제 이론 제공…다원적 경제 발전 모델 수립 목표
이보배 기자 | lbb@newsprime.co.kr
[프라임경제] 지난 4월 ‘칼폴라니사회경제연구소(이하 KPIA, Karl Polanyi Institute Asia)’가 문을 열었다. 눈에 띄는 점은 일반 연구소와 달리 협동조합 형식으로 꾸려졌다는 데 있다.
조합원 한 명 한 명이 또 다른 조합원을 모집하고, 출자금과 매달 조합비로 사회경제연구소를 운영한다. 세계에서 세 번째,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서울에 문을 열게 된 KPIA는 사회적경제 대표 연구기관이다. 현재 서울과 한국형 사회적경제 모델과 아시아 모델을 제시하는데 힘을 쏟고 있다.
◆아시아 최초 칼폴라니연구소 왜 한국인가
칼 폴라니는 베버, 케인스, 슘페터 등과 함께 20세기 가장 중요한 사회과학자로 꼽히는 인물이며 그의 대표적 ‘거대한 전환’은 사회과학 문헌에서 가장 많이 인용된 저작이기도 하다.
KPIA 정태인 소장에 따르면 ‘거대한 전환’의 핵심은 ‘시장 원리로 사회를 조직하면 사회는 붕괴한다’는 것이다.
다원적 경제는 시장경제뿐 아니라 공공경제, 사회적경제, 생태경제까지 다양한 경제가 공존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며 다양하고 조화로울 때 인간다운 삶, 바람직한 삶이 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KPIA 개소는 그의 딸인 마거릿 멘델 칼 폴라니 연구소장이 지난 2013년 11월 서울에서 열린 국제사회적경제포럼에 참가하면서 논의가 시작됐다. 이후 2014년 서울시-칼폴라니정치경제연구소-칼폴라니연구소 아시아지부 설립준비위원회 간 협약을 체결하면서 본격화됐다.
서울에 둥지를 튼 KPIA는 연구자, 후원자, 조합원 등 다양한 주체가 연구소를 이끄는 협동조합 형태로 운영 중이다.
몬트리올의 칼폴라니정치경제연구소와 파리의 칼폴라니연구소 등 사회적경제 대표기관 간 네트워크를 결성, 명실상부한 세계적 사회적경제 연결망을 완성하고 있다. 창립 당시 50여명이었던 조합원도 250여명으로 늘었다.
이와 관련 정 소장은 “경제 위기가 닥치면 협동조합이나 사회적기업이 커진다.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생기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2009년 유엔에서 협동조합의 해를 선언했고, 시장에서 생긴 문제를 국가에서 해결한다는 복지국가가 생겨났다. 이후 문제점들이 발견되면서 사회적경제를 강조하게 됐다”고 제언했다.
더불어 “우리나라는 그 이전에도 자활 공동체가 있었지만 2013년 협동조합 기본법이 발효되면서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됐다”고 첨언했다.
캐나다의 칼 폴라니 연구소 본부라고 할 수 있는 곳에서 연구자가 훨씬 많은 일본을 놔두고 한국에 아시아지부를 둔 것 역시 실천과 실현이라는 부문에서 일본보다 한국에 장래성이 있다는 생각에서라는 진단이다.
아울러 정 소장은 “KPIA가 목표로 하는 것은 우리나라에 칼 폴라니 사상이 워낙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사상을 알리고, 사상이 정리된 책들을 소개하는 것”이라고 언급했다.
또 “나아가 사회적경제운동이 폭발적으로 일어나는 가운데 향후 사회적경제가 맞닥뜨릴 문제점들을 분석해 미리 알려주는 한편, 사회적경제란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싶다”고 말을 보탰다.
◆한국형 사회적경제 모델 구축 위한 연구
실제 한국에서 사회적경제는 짧은 시간 동안 상당한 양적 성장을 이뤘으나 이론·사상적 기초와 틀을 마련하는 작업은 상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다. KPIA는 한국적 풍토에 맞는 사회적경제의 발전 전략과 담론화 작업을 통해 한국형 사회적경제 모델 개발에 힘쓸 예정이다.
또 세계 경제 전체가 장기적인 저성장의 늪에 빠진 지금, 대한적인 성장 모델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는 만큼 KPIA는 칼 폴라니의 경제 사상에 기초해 국가, 시장, 사회, 생태가 조화를 이루는 ‘다원적 경제 발전 모델’ 수립을 목표로 설정했다.
연구소 문을 연 지 이제 반년 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KPIA는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천천히 한 걸음 한 걸음 칼 폴라니 이론과 사상을 발전시키고, 이를 기반으로 한국형 사회적경제 모델 수립에 기여하는 다양한 연구프로젝트를 수행할 예정이다.
그 중심에 △칼 폴라니의 다원적 경제발전론 △사회적 경제의 사상적 기초와 폴라니의 사회이론 △포스트케인지언 생태경제론과 거시경제정책 △공공경제와 사회적경제의 결합에 의한 복지모델 △한국의 불평등과 사회적경제에 의한 치유 등이 있다.
이 밖에 네트워크 사업과 교육사업, 출간사업도 병행할 예정이다. 협동조합 역시 경제적 목표와 사회적 목표를 추구하기 때문에 다른 기업처럼 이윤을 내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KPIA는 경제와 사회에 관심 있는 대중을 위한 정기적인 교양 강좌를 개최하고, 대안적 경제학의 필요를 느끼는 각 분야 연구자 및 전문가 세미나를 진행한다.
이와 함께 칼 폴라니의 저작과 그에 관한 2차 문헌, 사회적경제의 이론화와 대안적인 ‘다원적 경제 발전 모델’ 관련 서적 출간에도 노력을 아끼지 않을 방침이다.
한편, 정 소장은 “역사적으로 시장경제는 200~300년에 불과하다. 공공경제는 국가가 생기면서 만들어 졌기 때문에 오래 잡아도 1만년이다. 그 이전에 우리는 사회적경제 형태로 수백만년을 살았다고 볼 수 있다”고 짚었다.
그동안 인간은 경쟁이 아니라 협동할 수 있는 존재로 진화했고, 진화심리학자의 연구를 빌리면 유인원과 인간은 협동하느냐 안 하느냐로 나뉜다는 것이다. 경쟁을 강조하는 것은 진화론적으로도 맞지 않는다는 견해다.
정 소장은 “사회서비스 영역으로 사회적경제 영역은 장점이 매우 크다. 유럽에서 민영화라는 개념은 협동조합이 발달한 곳에서 국가의 역할을 협동조합의 활동으로 옮기며 비용 절감과 만족감 상승이라는 효과로 이해된다”고 부연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마을 내 1차 의료기관은 경쟁력을 잃고 있지만 그런 의료기관이 의료 생협형태로 바뀔 수 있다면 매우 효과적인 서비스를 전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의견이다. KTX가 생기고 정차하지 않는 간이역이 문을 닫는데, 렌트카 협동조합과 코레일이 만나면 충분한 아이디어로 간이역을 살릴 수 있다는 것.
마지막으로 정 소장은 “이 밖에도 복지기관, 공공기업이 마을 단위의 사회적 경제조직과 결합하는 방안은 무궁무진하다. 이런 것이 마을을 살리고 공동체성을 살리는 지금의 방안이라고 생각한다”고 역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