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배 기자
대한상공회의소가 주도하고 재벌들이 적극적으로 동참해서 ‘민생 구하기 1000만 명 서명운동’을 벌인다기에, 처음에는 ‘민생’이 이민생이나 김민생 같은 어느 재벌 3세 이름인 줄 알았다. ‘그러니까 저렇게 열심히 구하려는 거겠지’라는 생각에 검색을 해 봤는데, 한국의 재벌 3세 중에는 ‘민생’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가 없다.
그렇다면 이들이 구하겠다는 그 ‘민생’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民生, 즉 우리 국민들의 생활과 생계를 뜻한다는 말인가? ‘그럴 리가 없다’며 아무리 고개를 저어도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 그렇다. 재벌들과 정부는 지금 분명히 쉬운 해고를 필두로 한 노동악법들을 진짜로 ‘민생 구하기’라고 우기는 것이다.
그리고 심지어 정부와 재벌들은 이 ‘민생 구하기 서명운동’이 꽤 성공적이라며 언론을 동원해 홍보까지 하고 있다. 운동본부에 따르면 이 황당한 서명에 동참한 사람들 숫자가 27일 기준으로 무려 30만 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사장님이 서명하는데 직원들이 어떻게 서명을 안 하나?
이 코미디 같은 서명운동을 반박하는 데에 귀중한 지면을 할애하는 것이 낭비라는 생각을 떨칠 수는 없으나, 하도 나라 전체가 “민생 구한다”며 떠들썩하니 기술적인 사실부터 확인해보자. 우선 언론 보도부터 살펴보면 대부분의 서명이 재벌 대기업의 본사 서명 부스에서 이뤄진다. 사장님이 먼저 내려와 서명을 하면 직원들이 줄줄이 따라와 서명을 하는 식이다.
27일에는 한진그룹 본사에 서명부스가 설치됐고, 대한항공 지창훈 사장 등 임원들이 쪼르르 내려와 ‘선제적’으로 서명을 했다. 26일에는 포스코 센터 로비에 서명 부스가 설치됐고, 권오준 회장이 서명을 한 뒤 직원들이 줄줄이 서명에 동참했다. 25일에는 현대차그룹이 본사 1층에 서명 부스를 설치했고, 같은 날 GS그룹은 온라인 서명 방식을 친절하게 직원들에게 안내했다. 사장님, 회장님이 서명을 하는데 어느 간 큰 직원이 서명을 안 하겠는가?
제일 개그스러운 일을 벌인 곳은 LG그룹이다. LG그룹은 지난주에 온라인으로 직원들에게 서명하는 방법을 안내하면서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민생 구하기 입법 촉구 서명운동’에 참여토록 독려키로 했다”고 밝혔다. ‘자발적’으로 참여하라고 ‘독려’를 한단다. ‘독려(督勵)’라는 말은 ‘감독하여 장려한다’는 뜻이다. 감독을 해서 장려하는 게 어떻게 자발적일 수 있나? 한국 3위 재벌에게 한글부터 가르쳐야 할 판이다.
주요 온라인 게시판에서는 누리꾼들의 항의가 빗발친다. 한 누리꾼은 “민생 법안 관련해서 회사에서 사인 받고 다니네요. 전 사인 안했지만 다른 직원들 전부다 하네요. 경영진에서 시키는 거라 안 할 수 없는 시스템이네요”라고 적었다. 최근 손해보험협회는 각 보험사에 ‘서명운동 관련 협조 요청’ 공문을 보냈는데, 소속 회사 임직원 뿐 아니라 독립사업자인 보험설계사들에게까지도 서명을 받으라고 명시한 사실이 밝혀졌다. 대한상의가 각 경제 단체에 보낸 협조 공문에도 해당 기관에서 주관하는 행사, 교육, 세미나 참석자 등 방문객들까지 서명 대상으로 명시돼 있다.
20일 한 누리꾼이 “회사에서 이메일로 받았다”며 온라인 게시판에 올린 공문에 따르면 대한상의는 은행연합회, 금융투자협회, 생명보험협회 등 6개 단체 소속 기업들에 공문과 입법 촉구 동의서를 보내 임직원들에게 서명을 받아달라고 요청했다. 그런데 이 요청 공문에는 “회원사의 적극 협조를 요청한다. 내일(15일)부터 매일 오후 4시까지 각 사에서 취합된 (서명) 숫자를 간단히 회신하고 20일 오전까지 취합된 서명지 원본을 협회로 송부해 달라”고 적혀 있었다. 한 마디로 매일 몇 명씩 서명 받았는지 숫자를 보고하라는 뜻인데, 이런 걸 ‘강제성을 띤다’고 하지 ‘자발적이다’라고 부르는 사람은 재벌들 외에 아무도 없다.
누리꾼들은 이런 강제성에 반발해 서명 패러디를 진행 중이다. 무한정 중복 서명이 가능한 서명 시스템을 이용해 누리꾼들은 ‘아베’ ‘배트맨’ ‘어벤저스’ 등의 이름으로 서명을 한다. 심지어 ‘박근혜’라는 이름의 서명은 이미 1,000명을 넘겼다는 말도 나온다. 고담시 치안을 유지하느라 바빠야 할 배트맨과 지구를 지켜야 할 어벤저스는 물론, 위안부 사과 문제로 국제적으로 사기 치느라 바쁜 일본 아베 총리까지도 한국의 민생을 구하려고 애쓰는 판이다.
민생 구하기(?)의 본질은 선제적 구조조정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말도 안 되는 개그가 사실 박근혜 정부가 점차 ‘파시즘’화 되고 있다는 증거로 보인다는 점이다.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이래 한국 경제는 벼랑 끝으로 내 몰리는 중이다.
지난해 4분기 수출의 성장 기여도는 마이너스 0.2%포인트로 2014년 3분기 이래 6분기 째 마이너스 행진을 이어갔다. 연간 기준으로는 마이너스 1.2%포인트인데, 이건 2010년 마이너스 1.4%포인트 이후 5년 만에 등장한 마이너스 수치다. 2011년 80%를 넘나들던 제조업 평균가동률은 현재 74% 수준으로 떨어졌다. 블랙 프라이데이다 뭐다 해서 난리를 친 통해 3분기 경제성장률이 1.2%나 됐다며 호들갑을 떤 지 딱 3개월 만에 4분기 경제성장률이 0.6%라는 처참한 성적표를 손에 쥐었다.
경제의 핵심은 국민의 소득을 늘리는 것이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는 국민 소득을 늘리는 일에 관심도 없고, 그 일을 할 능력도 없다. 그렇다면 이제 박근혜 정부에게 남은 카드는 딱 하나다. 최소한 기업이 망하는 일은 없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재벌들에게라도 확고한 지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온 것이 바로 ‘선제적 구조조정’이다.
선제적 구조조정이란 위기가 현실화하지 않아도 미리부터 위기를 빌미로 노동자들을 해고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선제적 구조조정은 언제든 노동자를 대량으로 해고할 수 있는 제도가 갖춰져야 가능하다. 박근혜 정부가 밀어붙이는 쉬운 해고를 필두로 한 노동 악법은 바로 재벌들의 이런 소망이 담긴 재벌 민원(民願)의 결정체다.
당연히 쉬운 해고가 입법화되면 기업들은 위기를 빌미로 선제적 구조조정에 나설 것이다.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이 쏟아지면 한국의 내수 시장은 더 얼어붙는다. 재벌들은 수출에 더욱 목숨을 걸 것이고, 수출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며 노동자들의 임금을 더 낮추고 해고를 더 많이 할 것이다. 이 악순환의 끝은 이미 경제의 역사가 보여준 바 있다. 물건이 쏟아지는데 국민이 가난할 때 생기는 현상은 경제적 공황이다. 1929년 미국의 대공황도 바로 그렇게 시작됐다.
대중을 동원하는 파시즘
민생 구하기 서명 운동은 이미 그 자체로도 충분히 웃긴다. “세금은 올렸지만 증세는 아니다”, “경제 사범(최태원)을 풀어주면 경제가 살아난다”에 이어 “노동자를 해고하면 민생을 구한다”는 어젠다는 현 정부가 남긴 3대 코미디에 들어갈 자격이 충분히 있다.
하지만 이 코미디를 보며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이유가 있다. 박근혜 정부와 재벌들은 민중을 탄압하는 도구로 ‘민중의 서명’이라는 방식을 동원한다. 정부와 재벌에 종속된 언론들이 이를 적당히 포장하면서, 대중들은 자기 목을 자르는 법안의 입법을 촉구하는 서명지에 사인을 한다. 이성과 합리가 포기되고 이데올로기의 광풍이 지배하는 세상, 우리는 그것을 바로 파시즘이라 부른다.
칼폴라니사회경제연구소의 정태인 원장은 최근 한 언론에 보낸 기고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식당마다 하루 종일 켜져 있는 종편 프로그램은 괴벨스의 언론 조작을 이미 넘어섰다. 박정희의 유신시대를 파시즘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박근혜의 ‘국민행복시대’ 역시 파시즘이다. 혁명과 쿠데타 모두 불가능해진 시대의 ‘법대로’ 파시즘이라고나 할까? 역사교과서 국정화는 파시즘의 필수 요소인 국가주의의 발흥이요, 민주노총을 비롯한 노동계는 홀로코스트의 대상이 될 테다.”
부디 ‘민생 구하기 서명 운동’이 그냥 웃기려고 한 개그에서 멈추기를 바란다. 의도가 웃기려는 것이었다면, 충분히 웃겼다. 하지만 그 방식이 정녕 파시즘을 향한 걸음이라면, 민중들은 이제 이 개그를 보고 웃고 있어서만은 안 된다. 독재라면 우리도 지겹도록 겪었고, 21세기 한국 경제는 파시즘으로는 결코 회복되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