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포럼] ‘사회 혁신’ 없는 ‘기술 혁신’은 재앙이다
다음은 2월 25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에서 열리는 다섯 번째 백년포럼 “4차 산업혁명,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의 발제문이다. 홍기빈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소장의 발제와 최상명 우석대학교 교수의 지정 토론으로 진행될 이번 포럼에서는 최근 급속히 전개되고 있는 산업 기술 패러다임의 전환을 진단하고, 그것이 어떠한 차원의 사회적 변화를 요구하는지에 대해 알아본다. 20세기 초에서 1970년대에 이르는 포디즘에 의한 대량 생산, 대량 소비 체제에서 최근 인공지능, 로봇, 사물인터넷 등을 이용해 개인의 창의적 생산을 지향하는 이른바 ‘4차 산업혁명’으로의 전환, 즉 기술과 생산체제의 변화가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살펴본다.
특히 발제자인 홍기빈 소장은 대다수가 현재의 기술 혁신을 4차 산업 혁명으로 지칭하는 데 대해 “현재는 4차 산업 혁명은커녕 3차 산업 혁명조차 제대로 시작되지 않았다”면서 그 이유로 “기술과 사회는 서로 독립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특히 산업 혁명의 시대에 이 둘은 서로 연속된 인류 사회의 진화 과정의 두 축일 뿐이다. 기술 혁신만으로 산업 혁명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에 조응하는 사회의 총체적인 변화가 함께 따라줄 때에 비로소 인간 공동체가 스스로의 욕구와 필요를 만족스럽게 조달하는 과정으로서의 산업 과정 전체가 완결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최근 ‘4차 산업 혁명’이라는 말이 핵심 키워드로 회자되고 있으나 ‘기술의 변화’라는 점에만 주목할 뿐이고, 사회에 대한 영향과 관련해서는 ‘대량 실업’이나 ‘인생 주기 변화’ 등과 같이 몇 가지 ‘기능적인’ 문제들에만 국한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지난 1차 및 2차 산업 혁명에서 산업 기술의 패러다임 전환은 그보다 훨씬 근본적이고도 광범위한 사회 변화를 가져왔다. 그는 1, 2차 산업혁명의 경우 기술 혁신에 걸맞은 사회 체제가 완성되는 데 대략 반세기 이상 소요됐다는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1970년대 시작된 정보화 기술 혁신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홍기빈 소장은 1차 산업 혁명이 정치·경제적으로 ‘현금 결합 cash nexus’과 헌정주의로 대표되는 자유방임 사회를 가져왔고, 2차 산업 혁명은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를 이상(理想)으로 삼는 중화학 공업의 산업 사회로 전환하면서 과학적 경영, 산업 합리화, 계급 타협 등을 조직 원리로 삼는 국가 자본주의 – 파시즘, 공산주의, 사회민주주의 등 – 사회를 가져왔다고 말한다.
나아가 그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3차 산업 혁명이 인간의 삶과 공동체의 유지에 쓸모 있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기술 혁신에 걸맞은 사회 혁신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번 백년포럼에 한국 사회의 미래에 관심을 가진 많은 시민들의 참여와 토론을 바란다.
제5회 백년포럼
주제: ‘4차 산업 혁명,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때: 2월 25일(목요일) 오후 7시 30분~9시 30분
곳: 서울 중구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 220호
발제: 홍기빈(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소장)
토론: 최상명(우석대학교 교수)
주최: 다른백년 창립준비모임
주관: 백년포럼 기획위원회
“왜 4차가 아닌 3차 산업 혁명인가”
1. 들어가며: “3차 산업 혁명”
얼마 전 다보스 포럼 이후 이른바 “제4차 산업 혁명”이라는 어구가 온 세계의 뜨거운 화두가 되고 있다. 분명히 온당하고 지금 꼭 필요한 문제 제기이기는 하지만, 두 가지 점에서 이견 혹은 관점의 차이를 느꼈다.
첫째, 클라우스 슈와브 박사는 기술 전환에 따른 사회적 제도 변화의 문제에 주의를 환기하고는 있지만, 이것이 “기술 전환에 조응하는 사회 변화”라는 기능적 태도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주로 소득 및 일자리의 문제로 국한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새로운 산업 혁명의 물결에 따른 사회의 변동은 그렇게 협소한 것이 아니다. 앞으로 보겠으나, 지난 200년간 벌어졌던 1차 및 2차 산업 혁명의 물결이 가져왔던 사회의 변화는 글자 그대로 전면적인 사회 혁명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을 도외시하고 그저 사회와 기술의 순조로운 조응을 위한 몇 가지 기능적인 제도 및 장치에만 시야를 국한한다면 굳이 그렇게 “몇차 산업 혁명”이라는 이야기틀을 동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일자리와 소득 불평등의 문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줄기차게 제기되어온 것들이니까.
둘째, 이러한 점에서 볼 때 현재의 새로운 산업 혁명의 물결에다가 네 번째라는 숫자를 붙이는 것은 납득하기 힘들다. 슈와브 박사 등은 단순한 정보 기술의 확장과 이를 통한 생산의 자동화가 이루어졌던 “세 번째”와 인공 지능과 사물 인터넷 등으로 “완전히 새로운” 기술 패러다임이 나타난 “네 번째”의 산업 혁명을 구별해야 한다고 역설하지만, 기술 패러다임의 변화가 단순한 산업 나아가 경제를 넘어서서 사회 전체와 하나로 엮여 있는 변동의 과정을 생각한다면 이는 너무나 협소한 기술적 기능적 시각에 묶여 있다고 밖에 할 수 없다. 역사적으로 인정되는 앞의 두 번의 산업 혁명의 물결의 경우 새로운 기술 혁신이 개시된 이후 새로운 기술 패러다임과 조응하는 사회 변화가 시작되는 데에 반세기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대략 1960년대 말 1970년대 초에 시작된 세 번째 기술 혁신의 시작이 그에 걸맞은 전면적인 사회 변화를 요구하는 때가 대략 현재의 시점과 일치한다는 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기술-사회의 종합적인 틀에서 본다면 더더욱 현재의 국면은 네 번째가 아닌 세 번째의 산업 혁명이 사회적 형식과 제도의 변화를 초래하기 시작한 시점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따지고 보면 현재의 사회 경제적 제도의 틀은 많은 이들이 지적하듯이 2차 산업 혁명을 통해 전면화된 자본 시장, 투자 은행, 대규모 주식회사 등에 압도적으로 지배당하고 있는 현실로서, 100년 전 미국의 노상강도 귀족들(robber barons)의 시대에서 아직 크게 바뀐 것이 없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이 글이 제기하려는 문제는 단순히 현재의 기술 전환의 국면이 세 번째냐 네 번째냐는 숫자상의 논쟁이 아니다. 앞선 시대에 벌어졌던 두 번의 산업 혁명의 물결은 항시 벌어지는 일반적인 기술 변화와 달리 몇 가지 사회 제도와 관행의 변화와 같은 “기능적”인 것이 아니라 총체적이고도 근본적인 것이었다. 만약 21세기 초인 오늘날의 기술 변동의 상황을 그러한 깊이와 폭을 가진 “세 번째 산업 혁명”으로 파악하려 한다면 (나는 그것이 옳다고 믿는다), 이것이 가져올 사회 변동의 폭과 깊이 또한 그러한 규모로 파악하고 준비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글은 아주 소략하게나마 앞의 두 번의 산업 혁명의 역사적 경험에 비추어 현재 국면의 몇 가지 측면들을 짚어보도록 한다.
2. 두 가지 이론적 틀
그런데 이는 아주 거시적이고도 종합적인 시각과 이론틀을 필요로 하지만, 마르크스주의와 역사적 유물론이 사라진 이후 이러한 총체적인 기술과 사회의 역사적 진화라는 큰 문제에 접근할 수 있는 “큰 이론 grand theory”은 불신과 거부의 대상이 되어왔고 따라서 그러한 이론의 발전도 저발전 상태에 머물고 있다. 이 글에서 그러한 “큰 이론”을 제대로 개진할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두 가지의 이론적 개념 혹은 시각을 분석의 틀로 간략하게 밝힐 필요가 있다고 보인다.
1) 경제는 “수단과 방법”을 통한 공동체의 “쓸모” 조달이다
근대 경제학의 기본적인 개념과 범주들은 18세기와 19세기를 경과하면서 완성되었지만, 이는 인간 세상에서 벌어지는 경제 활동을 물리적 화학적인 자연 현상처럼 파악하는 편향을 갖는다. 그 중의 한 예가 경제 활동을 생산과 소비 (때로는 분배) 의 두 축으로 분리하여 생각하는 경향이다. 이러한 경향이 심화될 경우 기술과 사회라는 두 개의 축은 마치 서로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들처럼 여겨지며, 극단에 가면 서로에 대한 아무런 언급과 고려가 없이 따로따로 연구되는 현실을 낳고 말았다.
그런데 이렇게 생산/분배 및 소비, 기술/사회 등의 이분법에 갇히게 되면 산업 혁명이 가져오는 인간 세상의 총체적인 변화를 파악하는 데에는 한계가 생길 수밖에 없다. 토스타인 베블런(Thorstein Veblen)은 이러한 총체적 변화를 파악하기 위한 그의 “진화론적 과학(evolutionary science)”의 방법으로서, 경제 활동이란 어디까지나 공동체 – 개인이 아니다 – 가 스스로의 필요를 충족하고 조달하기 위해 벌이는 활동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생산과 분배 및 소비도 또 기술과 사회도 그 안에서 하나로 통일되어 있는 연속된 과정임을 분명히 한다. 그가 쓰는 용어를 통해 설명하자면, 어떤 공동체는 그 성원들이 공유하는 독특한 문화와 삶의 방식에 기초하여 어떤 것이 가치가 있는 것들이며 또 바람직한 것들인지 즉 “쓸모(serviceability)”가 있는 것인지를 규정할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조달하기 위한 “수단과 방법(ways and means)”에 대한 기술적 지식 또한 축적한다. 경제학에서 보통 좌파든 우파든 마치 자연 현상인 것처럼 다루는 생산성이라든가 가치라든가 하는 범주들은 모두 이러한 욕구와 생산 능력을 집단적으로 보유하는 인간 공동체라는 틀을 준거로 했을 때에만 제대로 의미를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진공관이나 트랜지스터는 19세기 이전에는 아무런 생산성도 가질 수가 없는 것들이며, 유튜브가 존재하는 21세기에 중세기의 음유시인이 문화재로서 이외의 가치를 가지기는 힘든 일이다. 요컨대, 경제와 산업이라는 현상은 이렇게 그것을 수행하는 주체로서의 인간 공동체가 공유하는 욕구 (혹은 가치) 그리고 생산 기술 능력이라는 연속된 과정을 틀로 하여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기술과 사회 중 무엇이 우위를 점하느냐는 소모적인 논쟁은 물론이요 기술 변화를 사회와 무관하게 그저 “생산력” – 이는 그 욕구의 주체인 공동체의 문화를 준거로 삼지 않으면 전혀 의미를 가질 수도, 심지어 측정조차도 불가능하게 되는 개념이다 – 의 개선으로 보는 단선적인 관점도 극복할 수 있게 된다. 기술과 사회는 연속되어 있는, 기실 동일한 과정의 두 측면에 불과하다. 따라서 기술의 발전이라는 것과 사회가 어떠한 욕구와 가치를 발전시켜나가는가는 서로가 서로를 규정하는 문제가 된다.
2) 사회, 국가, 산업의 분리
이 세 가지의 영역이 서로 기능적으로 확연하게 구별되었다는 것이 산업 혁명 이후의 근대 사회에 나타나는 가장 중요한 특징의 하나라고 할 것이다. 유럽 역사에서 우선 나타났던 것은, 16세기를 경과하면서 사회로부터 동떨어진 인위적 정치체로서의 근대 국가 출현이었다. 초월적이든 내재적이든 사회를 구성하고 지배하는 보편적인 규범과 원칙과 별개로, 독자적인 합리성의 근거와 규칙으로 구성되는 국가이성(raison d’Êtat)의 담지자라는 것이 근대 초기에 나타난 국가였고, 이는 그 통치 대상으로서의 사회–부와 권력의 기초가 되는 신민과 토지의 결합물로 이해되었다–의 위에 독자적으로 군림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보다 극적인 산업과 사회의 분리는 18세기 말 최초의 산업 혁명을 거치면서 벌어졌다. 전통 사회에서 베블런이 말하는 바의 인간 집단의 경제 활동이란 인간, 자연, 문화, 도덕 규범 등이 불가분으로 하나로 엮여 들어가는 과정이었기에, 사회의 작동에서 산업만을 따로 떼어내어 독자의 영역을 구성한다는 것은 성립할 수 없는 일이었다. 폴라니의 표현을 빌자면, 경제는 그야말로 사회 안에 “묻어들어”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산업 혁명이 시작되면 인간의 생산 활동은 기계적 합리성 그리고 기계를 소유한 자본가들의 영리적 합리성 (막스 베버의 “자본 회계 합리성”)에 따라 조직되는 별개의 영역으로 분리된다.
인간의 자연적 삶의 흐름과 논리에 따라 전체 집단의 삶을 규제하는 원리가 통일적으로 결정되었던 원시 부족의 생활 방식과 비교해 본다면, 이렇게 국가, 산업, 사회 즉 정치 경제 사회 영역이 서로 기능적으로 분리가 되어 있는 삶은 아주 독특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세 영역의 작동은 서로 충돌을 일으켜서 산업 사회를 마비시킬 수도, 또 서로 효과적으로 조응하여 만족스런 산업 사회를 성립시킬 수도 있다. 이미 19세기 초의 생-시몽(Henri de Saint-simon)은 이 세 영역이 인간의 집단적인 행복과 자유를 위해 유기적으로 결합되도록 전력을 기울이는 것이 새로운 시대의 인류의 임무라고 주장한 적이 있었다. 이후 산업 혁명의 새로운 물결이 밀려올 때마다 이 세 영역이 어떻게 서로와 결합 혹은 분리하게 되는가는 인간 세상의 모습을 결정짓게 된다.
3. 1차 산업 혁명
18세기 중후반 영국 맨체스터 등지에서 증기 기관과 면화 산업으로 시작된 제1차 산업 혁명은 말할 것도 없이 인류 문명에 미증유의 충격을 주었지만, 이후 산업 혁명이 현재까지 지속되면서 가져온 누적적인 충격과 변화에 견준다면 외의로 그것이 사회에 가져온 충격은 크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위에서 말한 베블런의 두 차원 즉 공동체 전체의 욕구와 가치 그리고 “수단과 방법”이라는 두 차원에서 생각해 볼 때, 1차 산업 혁명은 어느 쪽에서도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온 것이라고 하기는 힘들 것이다. 1차 산업 혁명의 물결이 잦아드는 19세기 초반까지도 철도의 출현을 제외한다면 그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욕구와 가치를 만들어 낸 것이라기보다는 그 이전부터 존재해왔던 전통적인 의식주 및 생필품의 욕구를 당연히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였다. 따라서 시장의 크기는 인구와 지리적 확장에 따라 단선적으로 결정되는 경향이 있었다. 생산 기술에 있어서도 비슷한 점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전통적인 기술적 과정에 동력을 결합시키고 기계화했다는 것 뿐, 기술적 과정 자체가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나타나는 등의 새로운 단계로 들어간 것은 아니다. 기술과 공학은 아직도 자연과학과 결합되지 않은 상태에서 전통적인 방법과 기술 지식에 의존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동력과 기계의 전면적 발전이라는 것은 분명히 인간의 경제 활동에 있어서 상전벽해의 변화를 가져올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자연과 인간은 이제 생산의 주역이라는 자리에서 수동적인 “투입물”의 자리로 밀려나게 되었고, 이것들의 결합과 운영은 이제 기계의 합리성 그리고 기계를 소유한 이의 자본 계산 합리성이라는 완전히 독자적인 논리에 따라 이루어지게 된다. 이에 따라 앞에서 말한 대로 인간, 자연, 화폐라는 세 가지의 생산 요소는 사회의 맥락에서 떨어져 나와 그러한 산업/경제 영역의 독자적 논리에 따라 재조직될 수 있는 형식을 띠어야만 했고, 이것이 폴라니가 강조하는 바의 “허구적 상품”의 출현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 두 측면 – 독자적인 산업 영역의 출현과 욕구 및 생산 방법의 전통성 – 이 19세기 특히 1848년 혁명 이후의 유럽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났던 부르주아 사회의 모습을 보여준다. 전통적인 사회의 구조와 그 지배 계급인 토지 세력 및 군사 귀족들은 여전히 권력을 유지할 뿐만 아니라, 이것이 나라와 사회의 “기틀”로 존속한다. 그 기초 위에 서서 부르주아들은 경제 영역에서의 권력을 분명히 틀어쥐고 이들과 나란히 지배 계급을 구성한다. 부르주아들의 계산적 합리성과 전통적인 사회 규범이 나란히 존재하면서 균형을 이루었던 것이 19세기 자유방임 사회의 모습이었다.
국가는 여기에서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게 된다. 산업의 영역과 사회의 영역이 서로 분리되어 독자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이다. 이 두 영역의 분리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기능적 인위적인 것에 불과하여 현실 세계에서는 서로 무수한 충돌과 갈등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 두 영역의 분리와 공존을 보장하기 위해서 국가는 철저한 헌정 정치의 원칙을 고수할 뿐만 아니라 여러 규제와 입법을 활발히 행하지 않을 수 없게 되며, 나아가 대외적으로는 군국주의적인 경향으로 치닫게 되기도 한다.
4. 2차 산업 혁명
1880년대에 미국과 독일을 필두로 시작된 2차 산업 혁명은 이와는 대단히 다른 논리를 품고 있었다. 먼저 생산 기술의 차원에서 볼 때, 이제는 자연과학 지식을 동원하여 생산 과정을 일련의 물리적 화학적 과정으로 잘게 분해하고 이를 과학적으로 재구성한다는, 보다 근본적이고 폭넓은 변화를 품고 있었다. 또한 이는 규모 및 범위의 경제라는 논리와도 연결되어 대량 생산 및 대량 소비라는 패러다임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이후 본격적으로 발전한 중후장대의 중화학 공업은 이러한 조건을 필연적으로 요구하는 것이었다. 이는 다시 인간 집단의 욕구와 가치에도 여러 변화를 가지고 왔다. 전통 사회의 생활 방식을 넘어서는 욕구와 가치들이 빠른 속도로 계발되면서 소비주의와 향락주의의 새로운 생활 방식과 가치가 대두되었고, 광고 산업 또한 폭발적으로 성장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중화학 공업의 출현은 19세기의 부르주아 사회와는 전혀 다른 원리로 국가, 산업, 사회를 결합시킬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1차 산업 혁명이 경제와 사회의 철저한 분리와 공존을 목적했던 데에 반하여, 2차 산업 혁명은 “집산화(collectivization)”를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즉 다른 말로 하자면, 2차 산업 혁명을 거치면서 그전과는 깊이와 폭이 전혀 달라진 산업 기술의 요구에 따라 사회 전체가 전면적으로 상시적인 동원 상태에 들어갈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경제와 사회를 철저히 나누는 것에 근거했던 19세기 형태의 자본주의는 여기에서 소멸하게 된다. 대신 산업 및 경제의 논리를 사회 조직의 논리와 최대한 조응할 수 있도록 양자를 변형시켜 하나로 통합한 형태의 국가와 사회가 특히 1930년대 이후 급속하게 확산된다.
양자의 논리를 서로 조응할 수 있도록 통일시킨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를 위해서는 핵가족, 노동조합, 지역 공동체, 각종 기능 조직 등 다양한 사회 조직들이 가지고 있는 논리를 충분히 받아들여 이를 산업 기술의 논리와 공존하고 나아가 시너지를 일으킬 수 있도록 조정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조정이 평화적으로 합의의 방법으로 일어날 경우 사회민주주의나 뉴딜과 같은 새로운 형태의 산업 민주주의로 발전했지만, 폭력과 억압의 방법으로 기계적인 통일을 보게 될 경우 공산주의나 파시즘 혹은 다양한 형태의 권위주의 체제로 나타나게 되기도 한다. 여기에서 국가는 다시 새로운 역할을 맡게 된다. 산업의 논리와 사회의 논리를 서로 조응하도록 만들어서 하나로 통합시키는 것으로서, 19세기의 그것과는 정반대의 방향이 된다. 갤브레이스가 1950년대의 미국을 묘사했던 “새로운 산업 국가(new industrial state)”가 그러한 모습이다.
5. 3차 산업 혁명?
앞의 두 번의 산업 혁명의 물결은 역사학과 사회과학에서 많은 연구가 축적되어 있으며 따라서 어느 정도 분명하게 일반화할 수 있는 언명들도 많이 있다. 하지만 현재 진행 중인 산업 혁명의 물결에 대해 그 일반적 성격에 대해서는 앞에서와 같이 분명하게 언명할 수 있는 명제가 많지 않다. 나는 여기에서 비록 본질적인 중요성을 갖고 있다고 보이지만 그래도 일부에 불과한 디지털이라는 현상에 착목하여 그 한 측면만을 지적하고자 한다.
디지털이라는 것은 좁은 의미의 기술적 도구라기보다는 인간 사회를 조직하고 질서를 부여하는 “존재와 표상”의 차원과 닿아있는 좀 더 근원적인 문제임이 오늘날에는 분명해졌다. 푀겔린(Eric Voegelin)이 지적했듯이, 인간 사회의 질서란 인간을 포함한 여러 사회적 존재들에 어떠한 의미에 근거하여 어떠한 상징을 부여하고 그 상징들 사이에 어떠한 질서를 상상할 것인가의 문제가 된다. 그리고 인간 사회의 만사만물은 그 각각의 특성과 성질에 따라 서로 상이한 “상상계”로 편입되어 다양하고 이질적인 방식으로 표상되었다. 하지만 디지털은 그러한 무수히 다양하고 이질적인 상상계들을 모조리 뛰어넘어 그야말로 만사만물을 동일한 방식으로 표상하여 동일한 가상공간 안에 배열할 수 있는 혁신이었다. 멈포드(Lewis Mumford)는 일찍이 인류의 진화에서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도구의 발명이 아니라 상징 작용을 가능케 한 언어의 발전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디지털은 인간 세상의 존재들은 물론, 그 존재들을 표상하며 나타난 다양한 재현 형태들 – 언어, 이미지, 음향, 감각 등 – 을 모두 담아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도 가장 조작하기 쉽고 편한 방식으로 재현해낸다.
지난 40년간 진행되어 온 디지털 혁명은 금융자본주의, 탈산업화, 지구화와 긴밀히 결합된 것이었다. 2차 산업 혁명 이후 산업 활동의 조직은 사회의 총체적인 동조화를 반드시 필요로 하는 것이었지만, 그러한 사회는 여러 다양한 사회 조직의 논리를 존중하고 수용할 때에만 산업의 조직과 결합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집산화된” 산업 국가는 가지가지의 규제와 사회적 합의 그리고 민주주의와 정치 논리 등이 작동하는 국민국가를 틀로 삼고 있었다. 요컨대, 사회의 작동은 여러 상징과 의미를 통하여 사회적 존재와 사건들이 표상된 바를 조작함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며, 산업의 필요로 인하여 사회와의 전면적 결합을 꾀하던 20세기의 산업 사회는 이러한 여러 사회적 관계를 어느 정도 인정하고 존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디지털의 등장은 모든 사회적 존재 및 사건의 표상에 있어서 기존의 사회적 관계를 우회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산업의 전 과정에 등장하는 모든 인적 물적 자원의 동태와 상태 그리고 그것이 복무하도록 되어 있는 소비의 욕구 등은 가족, 노동조합, 지역 공동체, … 등등의 기존 사회적 관계들에 의존하지 않고도 실시간으로 포착될 뿐만 아니라 어디로든 전달된다. 요컨대 사회 전체의 사물과 사건이 “정보”로 환원되어 유통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정보”의 연속으로 환원된 만사만물은 그러한 여러 다양한 사회적 관계와 조직의 고유한 논리에 종속됨 없이 오로지 자본 계산의 합리성에 따라 즉 수익흐름 현재 가치의 극대화라는 원칙에 따라 배치되는 일이 가능해진다. 여기에서 앞에서 설명했던 20세기의 산업 사회는 무너지면서 탈산업화, 지구화, 금융자본주의의 부활 등의 현상을 동시에 수반하게 되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논리적 모순도 존재한다. 디지털 혁명을 통하여 사회가 산업 영역으로 효과적으로 흡수 및 재구성되고 여기에서 생산 능력의 폭과 깊이가 분명히 신장되었지만, 그러한 생산 능력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즉 복무해야 할 새로운 가치와 욕구가 무엇인가에서 문제가 생겨나고 있다고 보인다. 두 번의 산업 혁명의 물결이 지나가면서, 거칠게 말해 개인적 차원에서의 물질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산업 활동은 거의 포화 상태에 도달하였고 거기에서 추가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가치도 거의 소진되었다고 보인다. 이는 1980년대 이후 전 세계적으로 폭발적으로 성장한 사치품 시장의 규모에서 확인되는 바이다. 그리고 이 두 차원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의식주와 같은 물질적 차원에서의 욕구와 개인적 차원에서의 욕구를 넘어서는 새로운 욕구와 가치의 창출은 모두 “사회”라는 차원에서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원시 시대로부터 오늘날까지 크게 변하지 않았을 물질적 욕구와 가치 이외의 것들은 생활 방식의 변화를 통해서 새로 창출되고 또 발견되기 마련이며, 이러한 생활 방식의 변화는 절대로 “개인”이라고 하는 전통적인 경제학과 시장 경제에서의 존재론적 단위로는 가늠할 수도 기획할 수도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페이스북이라고 하는 실로 어이없는 “혁신”의 기적적인 성공에서 보듯, 디지털 시대의 경제에서 큰 규모의 부가가치 생산은 이러한 기존에 없었던 새로운 욕구와 가치의 창출과 발견에서 이루어질 때가 많으며, 이는 거의 항상 사회적 차원에서의 생활 방식의 변화와 연결되게 되어 있다.
그런데 디지털 시대의 “사회”란 앞에서 말한 대로 보다 효율적이고 만족스런 생산 활동의 요소로서만 여겨질 뿐, 이렇게 스스로의 새로운 욕구와 가치를 발견하고 창출하는 적극적인 주체로서의 위치는 인정되지 않는다. 개인의 인생 주기와 마찬가지로, 사회 또한 새로운 생산 방식과 산업 기술의 발달 그리고 여러 환경의 변화와 함께 새로운 욕구와 가치를 발견하면서 발전 development 의 과정을 거쳐나가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21세기의 금융자본주의에서는 그렇게 새로이 발견되는 욕구와 가치를 인정할 수 있는 권력은 오로지 구매자, 사실상 투자자에게만 독점되어 있다. 인간 세상에 필요한 것, 소중한 것의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것에 대해서는 수없이 많은 이야기와 생각들이 오고가지만, 그것이 막상 수익의 흐름을 창출하여 자본화 가치로 계산되고 이에 투자가 이루어지는 일련의 과정이 없다면 이는 사회적인 가치로 인정되지 않는다.
여기에서 현재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3차 산업 혁명의 한 모순을 볼 수 있다. 자동화를 넘어서서 인공지능, 로봇과 사물 인터넷 등으로 생산 능력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신장을 거듭하고 있는 한편, 그것을 통해 확장해나갈 새로운 욕구와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주체로서의 사회의 존재는 부인당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새로운 욕구와 가치를 스스로 발견하고 그것을 추구하기 위해 스스로를 능동적으로 재구성하는 사회의 존재가 없다면, 드론도 또 그 밖의 어떤 기술 혁신도 아이들의 장난감을 크게 넘어서기 힘들다. 하지만 이렇게 스스로의 욕구와 가치를 새로이 발견하고 긍정하는 여러 다양한 또 집단적인 사회 주체(들)의 능동성은 계속 부인 당한다. 노동자도, 주부도, 노인들도, 예술가들과 작가들도 모두 자신과 사회에 무엇이 중요하고 소중한 것들이며 어떤 가능성들이 기다리고 있는지를 발견하고 구현하는 데에 참여할 수 있어야만 하건만, 이것이 실현되지 못한다. 요컨대 “사회 혁신”의 병목이 풀려주지 않으면 기술 혁신 또한 일정한 한계 내에 멈출 수밖에 없게 된다.
6. 나가며: “사회 혁신”의 중요성과 사회의 재구성
서두에서 말한 바 있지만, 현재는 4차 산업 혁명은커녕 3차 산업 혁명조차 제대로 시작되지 않았다는 생각을 반복해서 말해두고자 한다. 기술과 사회는 서로 독립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특히 산업 혁명의 시대에 이 둘은 서로 연속된 인류 사회의 진화 과정의 두 축일 뿐이다. 기술 혁신만으로 산업 혁명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에 조응하는 사회의 총체적인 변화가 함께 따라줄 때에 비로소 인간 공동체가 스스로의 욕구와 필요를 만족스럽게 조달하는 과정으로서의 산업 과정 전체가 완결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1970년대 이후의 기술 혁신에 조응하는 새로운 사회의 형태가 아직 출현했다고 말하기 힘들다. 이 새로운 사회의 형태란 일찍이 생-시몽이 갈파했듯이 국가, 산업, 사회라는 세 영역이 서로와 어떻게 결합되어 유기적인 전체를 만들어 낼 것인가의 문제를 풀어낼 때에 비로소 출현하게 된다. 이렇게 서로와 유기적으로 결합된 산업, 사회, 국가는 아직 출현하지 않았다. 산업은 자본 계산의 합리성이라는 금융자본주의의 논리 하나에만 지배당하여 사회와 국가를 그 아래로 종속시키고 있는 상황이며, 사회는 새로운 욕구와 가치의 발견과 창출을 통한 지속적인 발전의 가능성을 차단당한 상황이며, 국가는 이러한 사회의 발전이라는 새로운 목표는 고사하고 복지 정책을 통한 사회의 보호라는 전통적인 기능조차 위기를 면치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상황이다. 이 가운데에서 대의제 민주주의라는 기존의 사회 통합 및 운영 방식은 근본적인 회의에 직면하고 있다.
3차 산업 혁명에 걸맞은 새로운 사회 – 국가, 산업, 사회의 유기체 – 의 형태는 그렇다면 어떻게 창출해낼 수 있을 것인가? 이는 여러 사회적 힘이 엮이는 복잡한 과정이며 그 요소 또한 무수히 많겠으나, “사회 혁신(social innovation)”이 그 중 필수불가결의 요소임을 기억해야 한다. 앞에서 설명한 대로, 3차 산업 혁명은 양적 질적인 생산 능력의 신장에 발맞추어 거기에 일정한 목표와 방향성을 부여할 수 있는 새로운 욕구와 가치의 창출 그리고 이를 통한 사회의 지속적 발전을 필요로 한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 자체가 스스로의 집단적 욕구와 가능성과 가치를 발견해내고 또 이를 적극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능동적으로 스스로를 재구성해낼 수 있는 역동적인 존재로 거듭날 필요가 있다. 2차 산업 혁명의 경우 이것이 국가 – 파시즘, 공산주의, 사회민주주의를 막론하고 – 의 위로부터의 명령과 동원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면, 이제는 사회가 스스로의 필요와 가치에 입각하여 스스로를 능동적으로 재구성해나갈 수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사회 혁신”의 중요성을 여기에서 강조해야 한다. 디지털이라는 기술이 표상과 그 조직의 방식에 있어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한다면, 이것이 반드시 자본 계산의 합리성과만 결합되어야만 한다는 필연성은 없다. 디지털 기술은 사회적 존재들이 스스로를 새롭게 조직하고 구성해나가는 작업에도 똑같이 소중하게 쓰일 수 있음은 물론이다. 슘페터의 이론에 이미 암시되어 있듯이, 혁신이란 결코 좁은 의미의 영리 기업 활동이나 기술적 과정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 집단이 스스로의 욕구와 가치를 발견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과 방법을 찾아내고, 그 방법에 입각하여 새로운 집단적 활동을 조직해내는 일련의 과정 전체를 말하는 것이다. 사회가 이렇게 능동적인 존재로 거듭나는 과정에서 산업 및 국가 영역을 어떻게 재구성해나갈 것인가의 방법과 비전도 밝혀지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