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다보스포럼 덕분에 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은 일약 도처에서 회자되는 뜨거운 열쇳말로 떠올랐다. 클라우스 슈밥 박사는 현재의 기술 변화가 단순히 정보화와 자동화에만 의존했던 3차 산업혁명과 구별되는 새로운 단계로 들어섰음을 역설하면서, 이러한 기술 변화가 가져올 사회적 충격, 특히 일자리의 부족과 부의 불평등 심화 등을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인 대응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는 분명히 시의적절하고 반가운 일이지만, 현재 시기는 4차가 아닌 여전히 3차 산업혁명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점에서 이견이 있다.
기술 변화와 사회 변화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거나 밀접하다거나 하는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둘은 ‘동일한’ 과정이다. 사회 변화를 수반하지 않는 기술 변화는 존재하지 않으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이는 특히 몇 가지 자잘한 기술이 아니라 아예 기술 패러다임과 같은 거시적이고 큰 차원에서의 기술 변화에 더욱 절실하게 해당되는 이야기다. 따라서 우리는 산업혁명의 역사를 생각할 때 어느 한쪽, 특히 기술과 생산 방식의 변화만을 볼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떤 사회 변화를 가져왔는지를 함께 보아야만 그 의미를 충분히 음미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19세기와 20세기의 1차 및 2차 산업혁명이 각각의 기술 패러다임에 맞는 형태로 산업사회의 모습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는 것이 확연해진다. 대략 100년의 시간을 두고 전반기 50년에 축적된 기술 변화가 후반기 50년 동안 사회를 송두리째 바꾸어 놓는 패턴이었던 것이다. 1770년쯤을 전후로 시작된 1차 산업혁명은 1832년에 영국 개혁 의회를 가져왔고 이윽고 1848년 혁명을 통해 전 유럽을 부르주아 사회로 바꾸어 놓았다. 1880년대에 시작된 2차 산업혁명은 1930년대를 기점으로 산업사회를 국가 중심의 집산화 체제로 또다시 바꾸어 놓았다.
1970년대쯤부터 디지털 혁명이 기술 패러다임을 바꾸어 놓기 시작한 지 50년 정도가 되어간다. 하지만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중후반에 맞먹는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정당민주주의, 자본시장, 주식회사 등 2차 산업혁명의 결과로 지배적 위치를 갖게 된 사회 제도들이 여전히 그 위치를 점하고 있다. 19세기의 자유주의와 20세기의 사회민주주의 등의 이념은 인간과 사회를 바라보는 그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관과 가치관을 대표하는 것들이지만, 현재의 세계는 인간과 사회와 자연을 여전히 더 많은 수익을 내기 위한 비용과 투입물이라고 보는 관점에서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했다. 세상이 크게 바뀌지 않았으므로, 기술적 혁신이 실제의 큰 사업으로 구체화돼 세상을 바꾸어 놓는 데에도 뻔한 한계가 주어진다. 19세기 중반과 20세기 초에는 좌절에 지친 나머지 전혀 새로운 인간관과 사회 변화가 필요하다고 외치며 행동에 나서는 사업가, 투자자들이 속출했다.
일자리의 소멸과 소득 불평등의 심화와 같은 것은 현재의 기술 변화의 산물임이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들이 좁은 의미에서의 노동정책이나 사회 재분배 정책 차원에서 해법을 찾을 수 있는 ‘기능적인’ 것들이 아님은 분명하다. 인공 지능과 로봇이 엄청난 풍요와 엄청난 박탈을 동시에 가져오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인간에게 노동이란 무엇이며, 인생에서 소득이란 무엇이며, 개인의 노동 및 소득과 사회 전체는 또 무슨 관계가 있는가에 대해 근본적이고도 전면적인 재검토와 숙고에 들어가지 않으면 안된다. 앞의 두 번의 산업혁명 물결은 이러한 일들이 실제로 벌어졌음을 역사적으로 보여준 바 있다. 아직 4차가 아니라 3차 산업혁명 중임을 역설하고 싶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지난 50년간 기술과 산업의 패러다임은 상전벽해로 변해 버렸다. 이제는 그에 걸맞은 새로운 사회의 질서를 상상하고 토론해갈 때이다. 다보스포럼의 문제제기가 단순한 기능적 차원의 해법에 머물지 않고 이렇게 완전히 새로운 21세기 산업사회의 가치와 인간 및 사회관에 대한 논의의 출발점이 되기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