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치의 총체적 보수화
진보 진영에 속하는 많은 이들이 이번 총선 결과에 환호하고 있다. 청와대의 현 정권과 새누리당이 민심의 반란으로 응징을 당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벌써부터 2017년 대망의 정권 교체 등을 이야기하면서 들뜨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하지만 내가 볼 때에는 88년 총선 이후 지금처럼 한국의 제도 정치 전체가 보수 일색이 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진보 세력은 거의 축출당하다시피 한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이번 총선의 결과는 한국 정치의 총체적 보수화이며, 진보 정치의 일대 위기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이번 총선을 보는 핵심적인 포인트는 ‘보수의 재구성’이라고 할만한 것이었다. 새누리당에서는 유승민 의원 등이 ‘따뜻한 보수’를 표방하고 나섰다. 더민주당에서는 김종인씨 등등이 당을 ‘친노 운동권’ 이미지에서 탈각시켜 ‘믿을 수 있는 합리적인 전문가들의 정당’으로 만들겠다고 소리 높여 외쳤다. 안철수씨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국민의 당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세 정당 모두에서 한국 정치의 기존 구도를 ‘합리적 보수’의 중심으로 재편하면서 스스로를 그 중심으로 자임하는 세력들이 나선 것이다. 그리고 이번 선거의 결과에서 보듯, ‘비합리적 보수’라고 몰리게 된 새누리 당 내부의 친정권 세력들은 여기에 크게 밀리게 되었다. 한국 정치는 이제 상당히 안정적인 3당 구도로 들어갈 가능성이 높아졌지만, 그 3당 모두가 ‘합리적 보수’라는 동일한 성격으로 통일될 가능성 또한 높아졌다. 결국 ‘보수의 재구성’과 그 성공은 한국 정치의 ‘총체적 보수화’로 귀결된 셈이다.
따라서 그 희생자는 친정권 보수만이 아니다. 제도 정치 안팎에 편재하던 이런저런 진보 세력들도 거의 설 자리를 잃을 지경이 되고 말았다. 여기에서 더민주당과 그 전신인 여러 이름의 당에서 ‘진보’ 인사들이 차지했던 어정쩡한 위치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시작은 평화민주당 시절의 김대중 총재부터일 것이다. 그는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깃발 아래에서 야당 정치인들 뿐만 아니라 이른바 ‘재야’의 세력과 인사들도 정기적으로 ‘수혈’하여 오늘날의 더민주당의 정체성을 형성한 바 있다. 즉 여기에서 진보적인 세계관과 정책 지향을 가진 이들이 전혀 그렇지 않은 보수적인 단지 독재에 대항할 뿐인 정치인들과 동상이몽으로 함께 하는 형국이 마련되었고, 이것이 최근까지도 계속되어 온 셈이다. 하지만 더민주당의 ‘합리적 보수’로의 전환은 이제 고 김대중 전 총재로부터 시작되어 온 근 30년의 관행이 이제 더 지속될 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렇게 되자 암묵적으로 더민주당과의 ‘범 야권 연대’를 주요한 근거로 삼았던 정의당의 위치가 애매해졌으며, 당장 이번 총선은 현상 유지 이상의 다른 의미를 찾을 수 없는 결과가 나오게 되었다. 여타의 진보 정당들은 의회 진입에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유의미한 정치 조직으로서의 위상 정립조차 심히 의심스럽게 되고 말았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스스로를 진보 진영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조차 그저 현 정권에 대한 심판이 내려졌다는 해석에 도취하여 즐겁게만 상황을 보고 있다. 당장 노동 관련의 개악 입법이 의회에서 저지될지 애매한 상황이다. 엊그제 있었던 더민주당의 한 비례 대표의 연설은 변함없이 성장이 분배와 복지보다 선행해야 할 것이라는 해묵은 보수 노선을 다시 힘주어 강조하고 있었다. 정권 교체에 목마른 심정은 이해할 수 있지만, 이렇게 정치권 전체가 ‘합리적 보수’ 일색이 된 상황에서는 정권이 바뀌어봐야 사회 전체가 진보적인 방향으로 나가게 되기는 힘들 것이다. 스스로를 진보라고 여기는 분들은 한 번 지금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할 시점인 것 같다. 나는 진보인가 아니면 퇴영적인 수구 세력이 싫어서 오로지 정권 교체만을 꿈꾸는 ‘합리적 보수’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