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조정과 “강남역 사건”
정태인(칼폴라니사회경제연구소 소장)
“안녕하세요”, 지나가는 인사조차 버거운 시절입니다. 지난 해 봄, 3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우리가 뻔히 보는 앞에서 죽어갔습니다. 그리고 올해엔 이른바 ‘가습기 세정제“ 때문에 사망한 것으로 밝혀진 사람이 266명에 달한다는 발표가 났습니다. 지난 6-7년간 몇 백만명이 이 세정제를 사용했습니다. 더구나 환자나 갓난 아이들, 노인들 방에 주로 틀었으니 세정제로 인한 사망자는 더욱 더 많아질 겁니다. 두 사건은 지난 20년 간의 규제완화가 가져온 참사입니다. ’전봇대를 뽑고‘ ’암세포를 도려내듯‘ 대통령이 앞장서 규제완화를 밀어붙인 결과는 앞으로도 계속 드러날 겁니다.
규제완화만 하면 경제가 활활 살아나리라던 두 대통령의 믿음은 현실에서 산산히 부서졌습니다. 최근 IMF와 같은 국제기구, 그리고 KDI가 한국의 금년 경제성장율 전망치를 2% 중후반대로 낮췄습니다만 실적치는, 제가 예측한대로 1% 중반대로 판명날 겁니다.
한국은행과 KDI가 발표한 1/4분기 경제지표는 우리의 전망이 훨씬 현실적이었다는 점을 증명합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1/4분기 우리 경제는 작년 말에 비해 0.4% 성장했습니다. 이 속도가 유지된다면 1.6% 정도 성장할 거라는 얘기죠. 작년 말 정부 전망치가 반토막 나는 겁니다.
이유도 확실합니다. KDI 통계에 따르면 수출은 금년 1/4분기에 작년 같은 기간에 비해 13.3% 감소했습니다(아래 통계는 모두 최근 발표된 “KDI 경제동향”에서 나온 겁니다). 우리나라 전체 생산액의 반에 이르는 수출이 감소하는 상황에서 기업들이 설비투자를 늘릴 리 없겠죠. KDI 통계로 1분기에 설비투자지수는 7.2% 줄어들었습니다. 작년에 우리 경제가 2.6%의 성장을 거둔 데는 연간 설비투자가 6.3% 증가한 것이 톡톡히 한 몫 했는데 그 요인이 오히려 큰 폭의 마이너스로 돌아선 겁니다.
지금 한국경제를 이끌어 나가는 건 오로지 건설입니다. 금년 1분기에 23.3나 증가했거든요. 주택건설이 무려 27.3%나 증가한 데 이어 정부가 주도하는 토목건설도 16% 늘어났습니다. 하지만 주택건설이 이렇게 빠른 속도로 계속 늘어날 수 있을까요? 가계부채가 소득보다 세배나 빨리 증가하고 있는데 도대체 그 집을 누가 산다는 말일까요? 현재 주택건설의 급증은 오히려 앞으로 다가올 부동산 침체의 골을 더욱 깊게 파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죠.
경제가 나쁘니 구조조정이 화제입니다. 제가 작년에 한 방송에서 “대대적 구조조정 100%”라고 호언했을 정도로 누구나 알고 있던 사실입니다. 지금은 세계경제 상황에 직접 영향을 받는 조선산업과 해운산업의 구조조정이 문제지만 국내 상황도 그리 만만치 않습니다. 지금 위기에 빠진 기업에 대출을 해 준 은행 자체가 유동성 부족에 빠지면 이제 금융과 실물부문이 상호작용하면서 위기의 기업은 급증하게 됩니다. 은행이 살기 위해서 추가 대출은커녕 기존 대출을 거둬들이면 금융경색이 오고, 그러면 꽤 괜찮은 기업도 유동성 위기를 맞을 수 있을 겁니다. 더 끔찍한 일은 부동산 가격이 하락하고 여기에 연동된 가계부채가 폭발하는 상황입니다.
조합원 여러분께 구조조정의 세세한 쟁점을 일일이 설명드릴 필요는 없을 겁니다. 다만 원칙에 관한 부분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불확실한 미래를 앞두고 대수술을 해야 하는 구조조정은 지극히 어렵습니다. 누구나 흔쾌하게 동의하는 답이 있을 리 없죠. 하지만 누군가 책임을 지고 구조조정을 끌어가야 한다는 건 분명합니다. 2년 째, 채권단이 자신의 손실을 최소화하는 방안에 초점을 맞춘 채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건 어쩌면 당연합니다. 더구나 이번의 위기는 조선산업 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다른 산업도 계속 문제가 될텐데 그 때마다 은행들이 모여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번엔 “자율협약” 방식으로 돈을 모아서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 은행이 그 은행인데 이들이 앞으로 쏟아져 나올 위기마다 돈을 댈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즉 공적 자금이 들어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총선 때 여당에서 나온 “양적 완화”는 그냥 잊어버리시는 게 좋습니다. 구조조정, 즉 부채를 처리하고 기업을 회생시키려면 돈이 필요하고 은행이 그 돈을 대려면 자본 확충이 필요합니다. 민간이 알아서 돈을 조달할 수 있으면 그만이지만 이렇게 줄줄이 대기업이 위기에 빠지면 공적 자금, 즉 국민의 세금이 들어가야 합니다. 정부가 재정으로 대거나 그게 불가능하면 국채를 발행해서 그 돈을 은행에 집어 넣어야 하는데 모두 국회가 결정할 일입니다. 즉 지금 필요한 건 얼마의 돈을 어떻게 조달할 것인지를 국회에서 결정하는 일입니다.
조선산업 하나 만으로도 경남의 경제가 휘청거리고 있는데, 이 사태가 철강이나 석유화학, 급기야 금융권까지 번져가면 전국적으로 대규모 실업사태와 임금 하락이 발생하게 됩니다. 케인즈의 기본 문제였던 “시설도 남아 돌고, 노동자도 노는데 왜?”라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케인즈의 답은 총수요 부족이었고, 불황 상황에선 지금 한국에서 보듯이 기업도 투자하려 하지 않고 시민들도 소비를 줄일 것이기에 정부가 나서야 한다는 겁니다. 채권단으로 집약되는 민간은 거시 상황에 신경을 돌릴 여유도, 능력도 없습니다.
정부는 각 산업의 미래에 대해 청사진을 제시해서 이해관계자들의 합의를 얻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세계경제의 침체가 계속될 테니 조선산업을 대폭 축소할 것인지, 아니면 예컨대 고부가가치 선박으로 특화할 것인지, 나아가서 노르웨이와 같은 해양산업 클러스터로 발전시킬 것인지 미래의 밑그림을 제시해야 합니다. 단기적으로는 실업자의 구제와 재교육이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나아가서 화물선부터 어선까지 한국의 노후 선박을 교체하는 데 보조금을 댄다든지 하는 단기 정책도 제시할 수 있겠죠.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현재의 구조조정 논란은 조선이나 해운산업에서 끝나지 않을 겁니다. 지금 두 자릿 수 단위로 수출이 감소하고 있는 산업들, 나아가서 내수 산업도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전 부처가 관련 산업의 미래를 그려내고 다시 조합해서 생태경제로의 전환이라든가 동아시아 공동체를 향한 국제분업이라든가 하는 더 큰 그림으로 모아내야 합니다.
예기치 못한 불확실성 앞에서 시장은 마비됩니다. 그런 상황에서 자율이라는 이름으로 시장이 문제를 해결할 거라고 주장하는 건 말 그대로 직무유기입니다. 대통령은 아예 아프리카로 떠났군요. 현실에서 눈을 돌리고 싶은 겁니다. 장두노미(타조가 위험에 닥치면 머리를 땅에 박아서 꼬리가 훤하게 드러난다는 말)라는 말이 이처럼 잘 어울리는 경우도 참 드물 겁니다.
“강남역 사건”이 이런 경제상황과 무슨 관계일까요? 아직 사건의 실체가 드러나지 않았고, 현재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여성혐오의 주체가 어떤 사람들인지 명확하지 않습니다만,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한국에선 지금 경제침체가 지속되는 것과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불평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역사는, 불행하게도 이런 상황에서 희망을 잃은 하위 계층이 가상의 적을 만들어 공격을 가하곤 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1930년대의 파시즘, 중세와 근대의 마녀사냥, 최근 유럽의 이민자 공격, 트럼프에 대한 미국 시민들의 열광은 그런 현상 중 일부입니다. “강남역 사건”은 더 큰 규모의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공격, 더 심각한 지역 갈등의 전조일지도 모릅니다. 여성 뿐 아니라 외국인, 타지민이 모두 공격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거죠.
분배와 재분배에 의한 경제의 회복, 그리고 공동체의 정신으로 위기를 극복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평등은 현재 우리가 맞닥뜨린 상황을 뚫을 열쇠입니다. 재앙, 혐오와 마녀사냥 등의 집단범죄는 평등한 사회에서 훨씬 순조롭게 해결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