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책] 정태인 칼럼 _ 국민분통시대

국민분통시대

#1
“아바이는 징용, 징병 끌려가서 피맺힌 목숨 바친 돈으로 새마을 사업 하더니만, 그 딸 아니라고 할까 봐. 할매들 몸 팔아서 재단을 만든다나? 그게 옳은 일이냐.” 8월의 폭염을 뚫고 터진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할머니의 목소리입니다.
2015년 11월 박근혜 대통령은 세계 각국 주요 통신사의 서면 인터뷰에서 일본 정부가 “과거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강하게 말했습니다. 한 달여 뒤인 12월 28일, 정부는 일본과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합의를 했습니다. 앞으로 한국 정부는 ‘위안부’의 ‘위’ 자도 꺼내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 대가로 일본 정부가 한 “결단”은 김 할머니가 언급한 10억 엔짜리 재단입니다. 이 합의에는 돈을 마음대로 쓸 수 없을 뿐 아니라 “소녀상”의 철거도 포함됐다는 게 외교가와 언론가의 정설입니다.
북한의 핵실험을 응징하려고 미국의 뜻에 따라 한미일 동맹을 강화하기 위해서 이런 합의도, 사드 배치 결정도 이뤄진 겁니다. 하지만 중국의 반발로 대북 제재에는 큰 구멍이 뚫렸고 그예 한국경제마저 위험해졌습니다.

#2
지난 8월 8일, 여전히 34도를 넘나드는 폭염 속에서 416기억저장소 봉사자들은 ‘세월호 기억교실’ 이전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세월호 아이들이 자신들의 교실을 떠납니다.
“내 딸 예은이를 못 본 지 844일째. 이제 너와 친구들이 공부하고 뛰어놀고 웃고 또 웃으며 꿈을 키워나가던 이곳, 이 자리 비워 줘야만 하는구나. 미안해, 예은아. 정말 미안해.” 유경근 416가족협의회 집행위원장의 한탄입니다.
“(세월호 참사) 최종 책임은 대통령인 저에게 있습니다. (…) 여야와 민간이 참여하는 진상조사위원회를 포함한 특별법을 만들 것도 제안합니다.” 침몰 후 한 달 이상 침묵을 지키던 박근혜 대통령이 2014년 5월 19일에 한 말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의 이석태 위원장은 7월 27일부터 광화문 광장에서 무기한 농성 중입니다. 2016년 6월 30일부로 특조위의 조사 활동 시한이 끝났다며 기획재정부가 예산 배정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시작부터 문제였습니다. 위원회 구성과 조사 권한을 놓고 길고 긴 논쟁을 벌이다 2015년 1월 1일 특조위가 구성됐지만 예산을 배정받은 것은 8월이었습니다. 159억 원을 요청했지만 정부는 44퍼센트를 깎아 버렸습니다. 올해 상반기 예산으로 62억 원을 더 받았지만 시한이 끝났으니 하반기 예산은 없다는 겁니다. 진상규명의 핵심인 선체 인양도 아직 못 했습니다.

▶사진출처:유경근 님 페이스북
▶사진출처:유경근 님 페이스북

 

#3
박근혜 대통령이 대선에서 당선된 이후인 2013년, 전국시도지사 간담회에서 “보육사업 같은 전국 단위의 사업은 중앙 정부가 책임지는 게 맞다”고 말했습니다. 즉 누리과정 예산을 책임지겠다는 얘깁니다.
2015년 12월 2일 국회와 정부는 누리과정 지원을 위해 국고 목적예비비 3000억 원을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누리과정 예산은 4조 원이고 이 중 어린이집(보건복지부 관할입니다.) 누리과정에 들어가는 예산만 2조 1000억 원입니다. 나머지는 시도교육감들이 책임지라는 겁니다.
우려했던 “보육대란”은 다행히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각 시도가 지방교육재정교부금을 전용하거나 채권을 발행해서 구멍을 메웠기 때문이죠. 하지만 교육부 예산을 복지부 예산으로 사용하는 것은 사실상 불법이고 빚은 언젠가 갚아야 하니 그때는 교육청 예산이 줄어들 수 밖에 없겠죠.

#4
성남시와 서울시의 청년 지원 정책도 문제가 됐습니다. 청년들에게 ‘공돈’을 주면 “도덕적 해이”가 발생한다는 겁니다. 서울시에서 미취업 청년의 구직 활동을 돕기 위해 월 50만 원씩 6개월을 지급하면, 이들이 오히려 취직을 미루는 등 놀고먹을 거란 얘깁니다. 물론 사람이, 경제학에서 상정하는 대로 자신의 물질적 이익만 추구한다면 예상할 수 있는 현상입니다만, 사람들은 실제로 그렇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제가 연전에 <작은책>에 연재했던 ‘협동의 경제학’이 바로 그 얘깁니다. 사람들은 남을 의식하고 자신과 사회의 도덕규범에 비춰서 행동합니다. 더구나 서울시는 이런 비판을 의식해서인지 몇몇 주요 지출 항목에 대해서는 영수증까지 첨부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보건복지부는 지난 6월, 서울시의 정책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통보를 했고, 결국 직권취소처분까지 내렸습니다. 지자체가 스스로 돈을 쪼개서 청년들의 취업을 지원하겠다는데 기어코 막은 겁니다. 그리고 지난 8월 12일 고용노동부는 “취업성공패키지” 정책에 참여하는 청년들에게 60만 원을 현금 지원한다고 발표했습니다.

#5
국민행복시대를 열겠다던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3년 6개월 동안 한 일입니다. 가히 국민불행시대를 넘어 국민불통시대입니다. 청년들이 “헬조선”,“흙수저”를 외칠 만합니다.
박 대통령은 8월 15일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언제부터인지 우리 내부에서는 대한민국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잘못된 풍조가 퍼져 가고 있다. 우리의 위대한 현대사를 부정하고 세계사를 부러워하는 우리나라를 살기 힘든 곳으로 비하하는 신조어들이 확산되고 있다.”
1년여만 지나면 이런 헛소리를 안 들어도 됩니다. 물론 1번부터 4번까지 지금 우리가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할 때만 가능한 일입니다. 선거에서 지면 더한 사람이 나타날지도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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