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생이라는 말을 전혀 다르게 이해하는 양쪽이 있다”
신간 ‘입에 풀칠도 못하게 하는 이들에게 고함’
인터뷰에서는 시장은 사회나 국가 없이 작동하지 않는다, 노동은 존엄해질 수 있는가, 기업이 노동자를 먹어치우는 나라가 될 것인가에 관한 얘기가 펼쳐진다.
민생이라는 말을 전혀 다르게 이해하는 양쪽이 있다. 민생이라고 하면 한쪽에서는 노동자가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받고, ‘을’이 되어 겪는 고통을 해결하고, 임차인들이 부당한 계약에 내쫓기지 않도록 주거 문제를 해결하며, 대기업의 ‘갑질’과 불공정 거래에 맞서 싸우는 경제적 약자들을 지원하는 일을 떠올린다. 반면 다른 쪽에서는 재벌이 골목 상권에 진출하도록 해 대형 복합 쇼핑몰을 세우는 것, ‘노동 개혁’을 통해 쉬운 해고를 가능하게 하는 것, 비정규직 규제를 풀어 단기 계약직을 늘리는 것 등을 민생 살리기라고 한다. 이는 민생이라는 이름으로 재벌들의 민원 들어주기를 실천하는 게 아닐까.
어쨌든 정부가 말하는 민생은 국민들에게 ‘입에 풀칠은 하게 해주겠다’는 정도의 의미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노동의 정당한 대가를 받는 것, 특권 없는 상태에서 공정하게 경쟁하는 것은 기대하지 말라는 것이다.”(조국)
민생의 어려움은 단순히 먹을거리의 부족에 그치지 않았다. 먹을거리의 충족만을 강조했을 때 나오는 결과가 인간적 자존감 상실이다. 자존감 상실과 사회적 시민권의 부재. “직장이 없고, 매일 먹을거리를 고민해야 하는 불안한 상태에 처한 사람을 시민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정치적 투표권이 있다고 다 시민이 되는 것이 아니다. 집주인에게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시민이 되겠는가.”(김동춘)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을 살릴 수 있는 기회를 주는 민생이어야 했다. 누구나 지금은 삶의 기회가 줄어들고 있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세상살이가 힘든 것은 그러한 기회가 줄어드는 데서 오는 불안과 위축 때문이기도 했다. “힘들어도 자기에게 아직 기회가 남아 있다고 느껴지면 세상이 견딜 만하다. 하지만 더 이상 기회가 없음을 확인하는 순간 주체하기 어려운 절망과 분노가 자라난다.”(김찬호)
김찬호 교수는 예전 한국 사회(고도성장기)와 지금을 계속 비교했다. 비교는 상황의 변화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단순하면서도 적확한 방법이었지만, 현재의 초라함을 살아야 하는 우리로서는 아픈 구석이 있었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살아갈 힘이 있었다. 삶의 공간이 꾸준히 넓어지고 기회가 열리는 시대를 스스로 개척한다는 자신감이 있었다”(김찬호)라는 말은 마치 지금 사람들은 ‘살아갈 힘이 없다’는 것처럼 들렸다. 지금 가파른 격차와 불평등을 겪게 된 것도 그동안 한국 사회가 지나치게 좁은 가치 체계에 머물러 있었던 것과 관련 있었다. 그는 우리 사회가 해방 이후 누린 부의 홍수, 기회의 홍수를 중독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우리는 삶의 보람, 역동성, 동기, 열정 같은 강렬한 가치를 너무 짧은 순간 한꺼번에 들이마신 것은 아니었을까. 어떻게 보면 강력한 약효를 지닌 마약을 투약하고 나자 그것보다 약한 것은 통하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IMF 외환 위기를 겪으면서 한국 사회는 돈의 위력 앞에 사회적 자존감이 확 무너지는 시기를 지나왔다. 이제 민생에서는 어떻게 사회를 다시 만들지가 화두가 되었다. 김찬호 교수는 사회 복원의 수준을 이렇게 설명했다. “개인은 사회가 자신을 어떻게 대우하는지 매 순간 직감한다. 어떤 사회적 공간에 가면 사람들은 자신이 존중받는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를테면 우리가 성당이나 고찰 같은 유서 깊은 건축물을 찾아갔을 때 그곳에 와 있다는 사실만으로 위안을 받는 경험이 그렇다. 좋은 사회는 소속감만으로 구성원들에게 품격을 누리게 하는 곳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가 사회로부터 어떤 대우를 받는지 직감적으로 판단한다. 지금 이 사회는 사람을 존중하는 사회라는 느낌, 사회를 복원한다는 것은 그런 자존감을 회복하는 수준을 말한다.”
지금 우리는 비정규직은 일시적인 것이고, 정규직은 일반적이라는 생각을 더 이상 않는다. 산업 전반에서 비정규직 위주로, 일시적으로, 저임금으로 잠깐 쓰고 말겠다는 심산이 퍼져 있다. 한번 비정규직의 늪에 빠지면 계속 비정규직으로 살아야 하고, 한번 낮은 지위에서 시작하면 그 자리에 계속 머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다들 알고 있다. 이때 가장 큰 희생을 보는 이들이 청년들이다. 청년들은 빈곤층이나 저소득층으로 분류되지 않아 주거 정책의 지원 대상도 되지 못하고 있다.
손아람 작가는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다고 하는데 대체 그 ‘대’는 누구인가요?”라고 물었다. 그 ‘대’는 조국 교수의 표현을 빌면 ‘기업이 살아야 노동자가 산다’라는 이데올로기에 취한 ‘기업이 노동자를 먹어치우는 나라’였다. 대기업의 하청 단가 후려치기가 계속되는 한 ‘중소기업 금융 보조금의 3분의 2가 대기업으로 넘어가는 나라’였다. 그렇게 보면 정태인 칼폴라니사회경제연구소장이 말하는 사회적 경제라는 것은 윤리와 재결합한 경제를 뜻하는 것 같았다. “경제학에서 도덕을 빼버린 것이 가장 치명적인 한계이다. 경제학은 윤리학과 결합되어야 한다. 윤리학을 빼버린 순간 경제학이 망가졌다. 그다음에는 인간이 해서는 안 될 일을 당연한 것처럼, 오히려 그게 합리적인 행위인 것처럼 하게 되었다.”
작가 손아람은 문화 산업이 하청 산업화되어 있다고 거듭 지적했다. 작품을 만드는 창작자의 권리를 제작과 유통 쪽 업체가 부당하게 차지하는 현실 등 문화 산업계의 착취 구조를 설명했다. 특히 자신 스스로 힙합 그룹의 멤버로 활동하면서 겪은 한 음반회사와의 소송 경험을 예로 들며 문화 산업계의 불공정 계약을 문제 삼았다. “지금 성공한 예술가 중에 순수하게 자신의 재능만으로 여기까지 왔다고 자신하는 이가 몇이나 될까요”라고 묻듯이 이제 문화 예술계에도 남아 있는 청년들은 입에 풀칠은 할 수 있게 도와주는 부모를 둔 은수저들이라고 했다. 예술 부문마저도 이러한 경향이 강화되고 있었다.
김동춘 , 김찬호, 정태인, 조국, 손아람 지음 | 북콤마 |348쪽 | 15,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