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핵, 어찌할 것인가
CNN의 헤드라인을 Korea가 장식하다
추석 연휴가 언제였던가 싶으시죠? 저는 캐나다 몬트리올에 일주일 머무른 뒤, 귀국해서 추석연휴를 맞았습니다. 이번이 세 번째인 “글로벌 사회적경제 포럼(GSEF)”에 몬트리올시에서 열렸기 때문입니다. 각국에서 온 33명의 시장이 나란히 앉아서 사회적경제야말로 불평등과 생태문제를 해결할 첩경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몬트리올이 불어권이라 그런지 아프리카 쪽 참석이 확 늘어난 것도 인상적이었습니다.
하루 종일 행사 쫓아 다니느라,영어에 신경 쓰느라 파김치가 됐는데도 시차 때문인지 잠이 통 오질 않았습니다. 하여 밤새 텔리비전을 볼 수 밖에 없었는데, 저한테는 CNN이 제일 만만했습니다. 대부분의 채널은 불어 방송을 했으니까요. CNN은 하루 종일 미국의 대선 여론조사 분석과 후보들의 말을 추적했습니다. 자체 여론조사에서 힐러리가 트럼프에게 2%포인트 뒤지는 결과가 나왔는데, 그 이유를 찾느라 분주했죠. 예컨대 민주당도 공화당도 아닌 무당파의 70%와, 기혼 여성의 압도 다수가 트럼프를 지지했답니다. 논리정연하고 퍼스트 레이디와 국무장관을 한 힐러리에 대한 반감이 역력합니다. 모든 기존 질서가 싫다는 거겠죠. 몇 달 전에 여러분께 전해 드렸던 브렉시트 분위기가 여기서도 물씬 풍겨납니다. 브렉시트 찬성파나 마찬가지로 막무가내인 트럼프 지지가 점점 늘어가는 게 못내 불안합니다.
혹시 한중 정상회담에 관한 뉴스가 있을까, 귀를 기울였지만 한 컷도 나오지 않습니다. 필리핀 대통령이 오바마에게 막말을 해서 양국 정상회담이 취소됐다는 얘기만 반복됩니다. 동아시아의 안정을 뒤흔들 수 있는 사드배치를 둘러싼 논란도 미국에선 뉴스가 아닌 모양입니다. 하지만 마지막 날 Korea가 모든 뉴스의 톱을 차지했습니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중년의 북한 여성 아나운서가 자못 과장된 억양으로 제5차 핵실험의 성공을 알리고 있습니다.
그 동안 북핵에 대한 미국의 태도는 “전략적 인내(strategic patiance)”였습니다. 북한의 핵실험은 “나 좀 봐 달라”는 것이고 노이즈 마케팅이기 때문에 ‘우아한 무시’가 올바른 대응이라는 거죠. 전 세계의 외교안보나 군사 전문가들도 북한이 자신의 핵 능력을 과장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잠수함에서 탄도미사일을 발사하고(SLBM) 이번의 핵실험이 히로시마 원자탄 정도의 위력이 있다고 평가되면서 이런 태도는 확연히 바뀌었습니다. 일본이나 괌의 미군기지는 물론, 장차 미국 본토도 핵공격을 받을 수 있다면 얘기는 상전벽해가 되는 거죠.
북한의 핵 전략
우선 다음 표를 살펴 볼까요?
이 표는 핵을 보유한 나라들의 유형을 보여 줍니다. 첫째는 우리도 조만간 핵무기를 보유할 수 있다고 떠벌리는 겁니다. 일정한 기술을 확보하고 있다는 것만 증명해도 핵 확산을 막으려는 주변 국가들은 모종의 이익을 약속할 겁니다. 90년대 중반 한반도의 상황입니다. 1994년 북한이 핵확산방지조약(NPT)을 탈퇴하고 핵무기 개발을 선언하면서 한반도에는 전쟁의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죠. 미국은 북한 폭격을 검토했고 우역곡절을 거쳐 제네바회담에서 ‘경수로 중유제공’과 ‘미사일 핵개발 동결’, 그리고 NPT 복귀로 귀결됐습니다.
둘째 유형은 2010년대에 들어서서 북한이 핵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한 배경이 됩니다. 중국이 등소평 시대의 ‘도광양회'(가만히 엎드려 힘을 키우면서 기회를 엿본다)를 넘어서 ‘평화굴기’, 나아가서 ‘대국굴기’의 행태를 보인 때입니다. 다이오유 또는 센카쿠 열도나 남중국해의 섬들을 둘러싸고 일본, 필리핀, 베트남과 분쟁을 일으켰죠.
한편 오바마 정부의 힐러리 국무장관은 “아시아로의 회귀” 또는 “아시아 재균형” 전략을 선언했습니다. 유럽과 중동에 온 힘을 기울이던 미국의 외교군사력을 아시아로 돌리겠다는 거죠. 이제 북한은 촉매 전략을 구사할 수 있게 됩니다. 북한의 핵실험이나 미사일 발사 역시 중미 간의 패권 다툼이라는 큰 구도 안에서 해석될 수 밖에 없게 된 거죠. 미국은 이를 계기로 동아시아 상황에 더욱 개입하고 중국은 이를 견제할 수 밖에 없으니, 북한을 어떻게든 보호해야 합니다. 중국으로선 이런 상황이 달가울리 없으니까 유엔 제재에도 동참하고 때때로 북한에 경고장을 날리지만 북한이 붕괴하는 걸 보고 있을 수는 없겠죠. 중국과 미국, 그리고 한국은 어떻게든 북한을 달래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여기까지가 김정은시대 이전의 상황입니다. 이명박정부와 박근혜정부는 허황한 ‘북한 붕괴론’에 기대서 미국은 북한의 핵실험을 애써 무시하고(전략적 인내), 한국 정부는 모든 남북교류를 끊어 버리는 쪽으로 나아갑니다. 여기에는 북한의 능력이 세번째 단계까지 가지 못하리라는 가정이 깔려 있었죠. 하지만 이렇게 압력을 가하면 가할수록 북한은 핵개발에 국력을 총동원할 수밖에 없습니다. 유일한 활로니까요. 김정은정권의 짧은 기간 동안 북한은 무려 세번의 핵실험을 감행합니다. 특히 잠수함에서 미사일을 발사하고 5차 핵실험을 하면서 제3유형인 확신전략보복, 또는 상호확증파괴의 문턱에 이르렀습니다. 미국과 남한의 선제공격이 있다 해도 북한의 핵무기가 살아 남는다면 당연히 보복을 할 수 있겠죠. 한국은 물론 일본과 괌기지가 보복 반경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잠수함에서 핵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다면 가능한 시나리오죠. 북한의 기술 수준이 정밀 타격을 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더라도 핵은 어디에 떨어지건 엄청난 피해를 줄 수 밖에 없습니다.
나아가서 북한은 제4유형, 즉 선제 핵공격까지 입에 올리고 있습니다. 북한이 1차 공격을 하고 미국과 한국의 대규모 보복을 당한 뒤에도 핵무기가 살아 있을 거라는 얘기죠. 물론 아직 그런 기술수준이나 군사체계를 달성하지 확실하고 북한이 이런 파국을 원하지 않는 것도 분명이지만 이쯤 되면 지금까지의 대북한 핵 전략은 근본적으로 수정되어야 하는 겁니다.
무엇을 할 것인가?
어쩌다 이런 지경에 이르게 된 걸까요? 94년 1차 위기를 겪은 뒤, 민주정부 10년 동안 남북관계는 호전을 거듭했습니다. 부시정권의 압력 속에서도 한국 정부는 동아시아 정세 속에서 상당한 목소리를 냈습니다. 노무현 정부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동북아 균형자”가 되겠다고 선언한 건 다소 과장이었지만 올바른 방향이었죠.
하지만 미국이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면서 북한은 제2, 제3유형의 핵전략을 택하게 됩니다. 북한은 몇 백만명이 아사를 하고, 몇 십만이 국경을 넘어 탈주를 해도 안정을 유지하는 체제입니다. 제 생각에 이젠 북한의 경제사회적 발전에 절대적 질곡이 된 ‘주체 사상'(지금은 ‘김일성-김정일 주의’라고 부릅니다)의 힘은 북한 사회에서 여전히 막강합니다. 여느 사회의 기준을 북한에 들이 대 북한의 내부 붕괴를 기대하면서 대북 제재를 강화하면 할 수록, 북한 정권은 생존을 위한 핵무기 개발에 모든 힘을 쏟아 부을 수 밖에 없겠죠.
물론 북한의 이런 전략은 궁여지책입니다. 경제전문가로서의 제 판단에 북한이 경제와 핵의 병진전략으로 인민의 생활을 향상시킬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북한정권의 언어가 아무리 ‘미친 놈’ 같더라도 핵과 관련한 그들의 행동은 정확히 게임이론을 따르고 있습니다. ‘미친 놈’이 이기는 치킨게임, 또는 벼랑 끝 전술을 하고 있으니까요(게임이론에 관한 해설은 옛날 작은책을 뒤져보면 다 나옵니다^^).
이명박 정부가 ‘햇볕정책’을 ‘퍼주기’로 매도하면서 내세운 ‘상호주의 원칙’은 게임이론에서 족보가 있는 전략입니다. 반복 죄수의 딜레마 게임에서 가장 우수한 전략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Tit for Tat, TFT)” 전략입니다. 맨 처음엔 협동하고 다음부터는 상대의 이전 행동을 따라 하면 되는 거죠. 즉 협동에는 협동으로, 배반에는 배반으로 대응하는 겁니다.
하지만 상호주의 전략은 현재의 핵위기에 통하지 않습니다. 이 전략의 핵심은 보복의 두려움 때문에 협동을 하게 된다는 건데, 첫째 북한 핵전략의 상대는 미국이고 둘째, 남한의 독자적인 보복수단이 마땅치 않다는 겁니다.
더구나 이 전략의 기본적인 맹점은 둘 다 배반을 택한 뒤에는 무한의 상호보복으로 귀결된다는 데 있습니다. 지난 9년 동안 일어난 일이죠. 해서 누군가는 협동으로 돌아서야 합니다. 하지만 북한이 핵과 미사일 실험을 계속하는데 먼저 양보를 하는 건 한국의 정치 상황에서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렇다고 북한이 네 번째 모델까지 계속 나아가고 이에 맞서 우리도 핵무장을 하는 게 과연 옳은 방향일까요?
이련 류의 사회적 딜레마의 해법은 양 쪽 모두 이익을 얻는 방안을 찾는 데 있습니다. 북한이 지금 간절히 원하는 이익은 뭘까요? 바로 정권의 생존이요, 인민생활의 향상입니다. 평화협정을 위한 협상을 시작하면서 북핵을 동결하고 나아가서 한반도의 비핵화로 나아가는 것이 유일한 길입니다. 동시에 남북 경제교류를 통해 북한의 경제가 제 궤도에 오를 수 있도록 해야겠죠. 이 길이 미국과 중국에도 꽤 괜찮은 이익을 얻을 수 있는 방도라는 걸 설득해야 합니다. 나아가서 양 대국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는 중간 국가들의 협력도 꾀해야 합니다(일종의 ‘낭만적 삼각관계”를 만드는 건데 이 구상에 관해선 앞으로 쓰도록 하겠습니다). 차기 정부가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누가 그런 대통령이 될 수 있을까요? 우리들의 운명을 결정할 선택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 칼럼은 작은책 10월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