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생’이 무엇일까? 사전적으로는 일반 국민의 생활 및 생계를 뜻한다. 이런 평범한 단어가 정치권으로 가면 고무줄이 된다. 상위 0.01% 재벌의 숙원들이 종종 민생현안으로 둔갑한다.
“(서두 생략) 저는 국정의 최고 책임자로 위기 극복과 민생안전에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비상시국에 난무하는 비방과 확인되지 않은 폭로성 발언들은 우리 사회를 뒤흔들고 혼란을 가중시킬 것입니다. (중략) 더 많은 투자를 유치하고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한 규제혁파와 구조개혁이 유일한 돌파구이자 근본적인 해법입니다. (중략) 20대 국회가 하루 속히 규제프리존특별법과 노동개혁 입법을 마무리해서 민생을 최우선으로 하는 국회로 역사에 기억될 수 있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 9월 22일 박근혜 대통령 수석비서관회의 모두발언
민생은 ‘일타쌍피’가 가능한 도구이다. 위기국면에서도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며 정적을 비판할 수 있기에 누구나 민생을 외친다. 여기저기 말은 무성한데 평범한 시민들이 느끼는 삶의 질은 나아지지 않는 이상한 일이 계속되고 있다.
입만 뻥긋하는 ‘거짓 민생’에 대한 피로도가 커질 무렵, ‘진짜 민생’의 의미를 되짚어 줄 책을 발견했다. 이 책은 참여연대 민생희망본부가 올 초부터 장장 8개월간 ‘진짜민생’에 대해 물은 결과물이다. 다섯 사람의 인터뷰와 토막글들을 곁들여 놓았다. 답하는 이들의 면면은 화려하다.
성공회대 김동춘 교수·교육센터 마음의 씨앗 김찬호 부센터장·칼 폴라니 사회경제연구소 정태인 소장·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조국 교수·<소수의견>의 저자 손아람 작가까지! 내가 직접 대면한 건 9월 초 참여연대 창립기념식에서였다. 처음엔 기념식에 맞춰 활동을 정리한 ‘장식용 책’이겠거니 했다. 그런데 책을 넘겨보니 예상을 뛰어넘었다.
첫 장은 성공회대 김동춘 교수가 열었다. 그는 사회학자답게 큰 그림을 그렸다. 산업화와 민주화 그리고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신자유주의에 포섭된 현실을 거침없이 분석해나간다. 그는 우리 사회의 파시즘적 요소에도 주목했다. 정부가 재벌 대기업의 이익을 거침없이 대변하고, 그들의 민원을 최우선으로 정책에 반영하는 모습이 과거 파시즘의 한 단면이었다니 놀라웠다.
▲ <입에 풀칠도 못하게 하는 이들에게 고함> ⓒ 북콤마
그의 분석과 비판은 시민단체 운동의 방향성에까지 이어졌다. 당사자와 정치권 사이의 중간자로서 어떤 운동을 해야 하는가? 약자에게 귀 기울이고, 고발하고 기자회견 하는 건 좋은데, 전투는 이겨도 전쟁에서 지는 것 같다는 진단이다.
분주히 움직이지만 권리구제 수단이 미비한 제도의 벽에 부딪치고, 당사자 조직화도 어렵고, 근본적인 사회구조에 대한 담론투쟁까지 밀고 나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결국 자기 만족적인 운동에 그치고 있는 것 아니냐는 그의 물음은 참 아프게 다가왔다.
교육센터 마음의 씨앗 김찬호 부센터장은 주로 ‘관계’라는 측면에서 접근했다. 분량은 50페이지가 조금 넘는다. 인간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추구하는데, 타인의 비천함을 드러내며 자신의 존귀를 드러낼 때 문제가 발생한다고 한다. 마음이 부실하고 삶이 빈곤할수록 구별짓기에 매달리는데, 이런 이들이 권력을 잡았을 때 힘을 남용하여 많은 사람들을 무력하게 만들 수 있다는 대목이 참 인상적이었다. 그분이 떠올랐다.
“좋은 사회는 소속감만으로 구성원들에게 품격을 누리게 하는 곳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가 사회로부터 어떤 대우를 받는지 직감적으로 판단한다. 지금 이 사회는 사람을 존중하는 사회라는 느낌, 사회를 복원하는 것은 그런 자존감을 회복하는 수준을 말한다.”
민생은 단순한 ‘먹고사니즘’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신뢰를 회복하고 구성원들의 존엄을 키워나가는 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대다수가 노동자이자 소비자인 만큼, 권리의 주장 뿐 아니라 서로에 대한 배려도 이어져야 한다는 대목도 와 닿았다.
정태인 소장은 본격적으로 사회경제적 측면을 파고들었다. 분량은 60페이지 조금 넘는다. 시장만능주의·사회전반의 고비용 구조와 부채문제·재벌체제의 폐해 그리고 불평등까지 우리 사회가 당면한 이슈들을 콕콕 집어주었다. ‘도덕적 해이’라는 주홍글씨를 보통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남용하는 세태에 대한 비판이 특히 시원했다.
생각해보면 금융사들과 재벌들의 도덕적 해이야말로 심각하다. 외환위기 이후 작년 9월까지 금융사에 지원한 공적자금이 총 168조7000억이지만 회수율은 65.9%에 그쳤다. 이들은 기업부실이 위기로 이어진 과거를 교훈 삼아, 덜 위험하고 쉬운 돈벌이 수단인 개인 대출에 안주했다. 과도한 대출 경쟁은 카드대란 같은 재앙을 불러왔고, 현재 가계부채라는 또 하나의 시한폭탄이 째깍째깍 돌아가고 있다.
국민들이 사회경제적인 자원을 몰아줘서 키운 대기업을, 재벌들은 세습의 도구로 쓰고 있다. 벌써 3대째다. 가진 것을 지키려고만 안주하다보니, 중소기업들을 착취하며 산업생태계를 파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유통업과 동네 자영업자들의 상권도 예외가 아니라서 지역 사회가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망하는 길을 자초하고 있는 셈이다.
한국은 유례없는 압축 성장을 달성했지만 1996년 이후 20년 만에 세계에서 가장 불평등한 나라가 되어버렸다. 노령화와 세계경기침체, 산별노동조합의 및 강력한 진보정당의 부재라는 악재를 극복하고 정태인 소장의 말 대로 평등연합을 만들어갈 수 있을까? 문득 한숨이 나왔다.
조국 교수는 법과 정치 그리고 사회를 넘나들며 견해를 들려주었다. 분량은 60페이지 정도다. 참여정부의 공과를 회상하면서는 보통사람들의 피부에 와 닿는 민생문제 해결에 주력했어야 했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중도층’이라는 허상을 좇는 야당에 대한 쓴 소리도 이어졌다. 대중들의 분노를 직시하고 변화를 선도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는 좌우가 아닌 ‘저파’가 되기를 주문했다. 즉 낮은 곳, 사회적 약자들의 목소리를 가까이 할수록 우리 사회가 당면한 문제 해결에 한 걸음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이다. 청년들에 대한 시각도 인상적이었다. 그는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먹고사니즘’에 빠진 청년들을 비난하지 않았다. 치열한 경쟁에 시달리고 지속적인 불안에 노출된, 청년들의 절망에 공감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손아람 작가도 다양한 영역을 넘나든다. 주거권 문제와 문화산업의 불공정문제 청년문제까지 50페이지를 조금 넘는 분량이 술술 넘어갔다. 망국 선언문으로 이 책은 마침표를 찍는다.
“중산층이라는 단어는 사어처럼 더는 쓰임새가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공허한 정치 구호처럼 오로지 ‘중간 시민’으로 이 세계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중간이라는 장소가 남아 있기 때문이 아니라, 중간을 향한 환상을 포기하지 못해서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덧없는 치유의 주술을 그만 거두십시오. 지금 즉시 변화에 동참해주십시오. 우리는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 아니라, 사정이 나쁜 사람들입니다.”
아직 끝이 아니다. 번외로 민생희망본부 본부장을 역임한 김남근 변호사(민변 부회장)의 글도 있다. 민생운동을 8가지 키워드로 깔끔하게 정리해 놓았으니, 질문하는 사람들이 궁금하거나 민생운동에 대해 알고 싶다면 먼저 읽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첫 번째 인터뷰가 사회 전반적인 큰 얘기를 다루고 분량도 상대적으로 좀 많다. 2~5장을 마음 가는 대로 읽고, 마지막에 보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일 것 같다. 금권정치가 판치고 민주주의가 질식하는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책이라 생각한다.
<입에 풀칠도 못하게 하는 이들에게 고함> 기획 참여연대 민생희망본부·북콤마·1만3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