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태의 심각성만 아니면 코미디 영화의 소재이다. 하필이면 땅을 골라도 활성단층이 묻혀 있는 지대를 주욱 따라서 원자력발전소 밀집 지대를 조성하였는가. 정밀 조사 끝에 규모 8.3의 지진이 발생할 위험도 있다는 경고가 나왔지만, 조사를 발주한 정부 스스로가 ‘논란’이 두려워 덮어 버렸다.
막상 지진이 나자 국민안전처 누리집은 두 번이나 먹통이 되어 스스로 ‘재난 지대’가 되어 버렸고, 국영 방송이 두 개씩이나 있건만, 난데없이 종편의 TV 방송 뉴스가 보도본부가 되어 버렸고, 원자력발전 관련 기관들은 원전 위험성을 지적하는 소리에 대해 ‘포퓰리즘’이라는 공세를 퍼붓고 있다. 그 와중에 사람들은 스스로 일본 지진 매뉴얼을 습득하고 개인용 피신 가방을 꾸리고 있다. 코미디 영화로 제작하려 해도 시나리오 단계에서 현실성 없는 억지스러운 허구라고 묻혀 버렸을 이야기이다.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 가장 낙후되어 사회 혁신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제도가 있다면, 18세기에 설계되어 지금까지 큰 틀의 변화가 없는 대의제 민주주의일 것이다. 못 배우고 귀가 얇아 선동에 휩쓸리기 쉬운 데에다가 탐욕스럽기까지 한 민중들에게 직접 권력을 부여한다면 무책임한 결정과 혼란으로 파국으로 가게 되어 있다고 한다.
따라서 정치적 심사숙고의 훈련이 된 사람들을 대표로 뽑고 여기에 각계의 전문가들이 결합하는 ‘엘리트 민주주의’만이 발달된 산업사회에서 유일하게 효율성과 정의를 모두 달성할 수 있는 민주주의 형태라는 것이다.
지난 몇십년간 대한민국의 대의제 민주주의가 원자력발전소의 안전성을 두고 어떻게 작동했는지를 생각해 본다면, 정확히 그 반대가 아니냐는 게 많은 사람들의 의심이다. 무지하고 무관심한 관료들, 탐욕에 가득 찬 이해관계 세력들, 나약하고 교활한 정치가들이 한 무리로 얽혀서 굴러가는 것이 대한민국의 국가가 아니냐는 것이다.
그리고 이번 지진들을 계기로 드러난 실로 경악할 만한 원전의 위험상은 그 한 예에 불과한 게 아니냐는 것이다.
이러한 국가 기구의 낙후성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직접 민주주의의 강화이다. 200년 전의 엘리트와 ‘선량’들은 일반인에 비해 지식과 지혜가 월등했는지 모르지만, 지식 정보 혁명이 한창 진행된 오늘날 그 격차는 크게 줄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총량적으로 볼 때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보통 사람들의 집단적 지혜’가 소수 엘리트의 그것에 못하다고 볼 수가 없다.
게다가 문제는 지진과 원자력발전소다. 대의제 민주주의의 허울 속에서 엘리트들이 저질러 온 숱한 비효율과 부정부패는 어찌어찌 참는다고 해도, 이 문제는 그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저번 메르스 위기 때 우리는 정부의 비공개 방침을 넘어서서 사람들이 스스로 힘을 합쳐 병원 지도를 작성하는 모습을 본 바가 있다. 특히 지진 및 원자력 위험에 더욱 가까이 노출된 지역의 시민들은 이러한 행동의 필요와 욕구가 더욱 절실할 것이다.
더 이상 민주주의와 국가 통치 체제가 냉소와 절망의 대상이 되지 않으려면, 직접 민주주의 정신에 입각한 국민 대토론이 필요하다. 힘 빠진 요식 행위와 같은 국회에서의 질의·응답으로 해소될 수 있는 불안과 공포가 아니다. 정당이든 시민단체든 좋다. 먼저 일반 사람들이 불안해하고 의문스러워 하는 질문들과 내놓고자 하는 제안들 그리고 이에 대해 관계자들과 전문가들이 내놓는 견해와 조언 등을 걸러낼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들어야 한다.
이를 통해 문제의 핵심을 정확히 건드리는 의제들을 선정하고 구체적인 쟁점과 질문들을 선별해야 한다. 그 후에 국회의 권위를 이용하여 책임 있는 엘리트들을 소환하여 모두가 보는 앞에서 토론을 시행할 때에 비로소 타성과 비효율에 젖어있는 국가 기구를 조금씩 바꾸어 갈 수 있을 것이다.
직접 민주주의적 통치 체제의 제도화가 아직 먼 미래의 이야기라고 하면, 이런 방식으로 현재의 대의제 민주주의를 보완하는 형태로 우선 시작할 수도 있다. 인프라도 갖추어지고 있다. “와글”과 같은 시민단체들의 사이트를 방문해 보라. 직접 민주주의의 효율적인 토론을 가능케 하기 위한 장치들을 마련하기 위한 각종 노력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길은 멀더라도 방향은 정해져 있다. 지진과 원자력 사태는 직접 민주주의의 미래를 가리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