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은 안개 속으로 김광석의 저음이 깔린다. 영국 뉴몰든의 리치몬드 파크. 음울한 마음으로 침울한 노래를 듣는다. 초등학교 4학년과 유치원생이었던 아이들이 “장송곡 좀 그만 틀어!”라고 항의하는 바람에 언제나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 준 뒤, 나 홀로 넓은 공원의 한귀퉁이에 차를 세우고 김광석의 노래를 들었다. 1996년, 나는 안개 낀 뉴몰든에서 담배연기와 함께 매일같이 김광석의 노래를 들었다. 20년이 지난 지금은 그때 그 카세트 테이프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른다. 설령 찾을 수 있다 해도 또 그걸 어디에서 틀 수 있으랴.
나에게 1990년대는 온통 회색이었다. 1980년대 말 수배에서 풀려났지만, 1992년 대선에서 패배했다. 1994년에는 내 평생의 스승, 박현채 선생이 돌아가셨다. 말 그대로 술과 눈물 속에서 30대 초반을 탕진하다가 도망치다시피 미국으로 건너갔다. 당시는 김영삼 대통령이 ‘세계화’를 외치던 때였다. 서울대학교 지역연구소는 대통령의 뜻을 좇아, 한국에서 외국에 관한 논문을 쓰는 사람들에게 장학금을 주겠노라고 했다. 당시 나의 전공은 실리콘밸리였고, 나는 그렇게 이 프로그램의 제1호 장학생이 됐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 영락없는 폐인의 모습을 한 나를 보며 걱정에 걱정을 거듭하던 한 소설가가 이별 선물로 세 개의 테이프를 주었다. 김광석, 정태춘, 유재하, 양희은, 그리고 조안 바에즈의 목소리가 녹음돼 있었다. 어쩌면 하나같이 착 가라앉는 노래들이었는지, 아마도 내 마음 상태를 감안한 것이리라.
나는 미국에서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들었다.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 ‘사랑했지만’ ‘거리에서’ ‘그 날들’… 정태춘의 ‘북한강에서’와 유재하의 ‘가리워진 길’… 양희은의 ‘내 곁에 와요’를 들을 때마다 왜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는지…. 그때 들었던 조안 바에즈의 ‘슬픔의 샘’ ‘솔밭 사이로 강물은 흐르고’는 내가 아는 몇 안 되는 영어 노래들이다.
그렇게 6개월을 새뮤얼 애덤스(내가 제일 좋아하는 맥주 이름)와 김광석 등의 목소리로 지샌 후 나는 미국에서 돌아왔다. 그런데 돌아오자마자 이번에는 다시 영국으로 떠나야 했다. 결혼 전부터 ‘돈을 그려서’ 나를 먹여 살렸던 아내 ‘차 여사’가 “공부 좀 해야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불감청 고소원!, 여전히 침울의 늪에 빠져 있었던 나는 이국의 주부 역할에 선뜻 동의했다. 매일 매일이 화창한 봄날이었던 버클리와 날마다 안개와 가랑비가 내려앉는 뉴몰든에서, 아름답지만 또한 우울한 노래들이 구겨진 내 30대의 갈피마다 스며들었다.
나는 음치다. 어렸을 때 나는 못 하는 게 없는 줄 알았다. 노래 실기도 몇 주를 반복 연습해서 ‘수’를 맞았으니까(난 노력파다!). 환상은 중2 때 깨졌다. 어느 날 음악 선생님은 예고도 없이 괴상한 시험을 냈다. 피아노 건반을 하나 치고 계이름을 적으라 하더니, 두세 개를 한꺼번에 누르고는 화성을 맞히라고 했다. 시험 결과는? 전무후무한 아름다울 ‘미’였다.
잘할 수 없는 건 하지 않는 게 상책이다. 그런데도 술에 만취하면 나는 노래를 하고 싶다. 지금은 술을 마시고 1년에 한두어 번쯤 노래방에 가지만 40대 때는 꼭 노래방에 가서 하루의 술 여행을 마쳤다. 음치는 노래방에서 무슨 노래를 부를까? 음치가 소화하긴 어렵지만, 그때를 떠올리며 그때 그 시절 나를 위로했던 그들의 노래들을 부른다. 시작은 정태춘의 ‘서해에서’, 끝은 김광석의 ‘광야에서’다. “해뜨는 동해에서 해지는 서해까지/뜨거운 남도에서 광활한 만주벌판/…/다시 서는 저 들판에서 움켜쥔 뜨거운 흙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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