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의 외교안보 정책의 기원을 국제정치이론에서 찾는다면 공격형 현실주의(offensive realism, 국제협력을 비관적으로 보고 국가는 패권 획득을 목표로 힘을 최대화 한다는 이론)이 가장 가까울 것이다. 공격형 현실주의는 미국의 대외전략이 ‘역외 균형(off balance)’을 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유럽이나 아시아, 중동 등 각 지역은 스스로 균형을 이뤄야 하며 미국은 확실한 불균형이 우려될 때만 개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중동에서 그러했듯이 ‘나라 세우기’를 통해 미국의 가치를 전파하려 하면 안된다. 쓸데없이 돈만 쓰고 미국의 위상은 오히려 저하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장은 FTA와 군사동맹을 통해서 미국의 가치(민주주의와 자유무역)를 세계에 전파하자는 미국 주류의 주장(자유주의 헤게모니)과는 확연히 다르다. 트럼프는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12개국이 6년 이상 티격태격한 TPPTrans-Pacific Partnership,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 협상을 단숨에 중단시켰다. 여기에 잭슨적 전통의 ‘미국 예외주의미국은 독특한 기원과 역사 발전과정, 정치 제도 등을 가진 특별한 국가라는 생각’를 결합하면 반인종적, 반여성적, 반생태적 정책들도 해석할 수 있다. 잭슨 민족주의는 오로지 미국의 백인 남성만이 미국 예외주의를 실천할 수 있으며 ‘강함’, ‘백인성’, ‘남성성’을 강조하고 캘리포니아나 워싱턴의 경제적, 정치적 엘리트를 비웃는다. 즉 애시당초 미국의 가치를 실천할 수 없는 타인종이나 여성을 위해 군사 개입을 할 필요가 없으며 그들이 미국 내에 발을 붙여서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미·중 긴장 속 딜레마에 빠진 남북관계
미국의 헤게모니에 시달리는 나라의 처지에선 지난 30여 년간의 군사 충돌에 비해 트럼프의 정책기조가 더 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공격형 현실주의 이론에서도 동아시아는 예외다. 중국의 ‘굴기’가 동아시아의 역외균형을 심각하게 흐트러뜨릴 것이기 때문이다. 국무부장관이 정해지기도 전에 매티스 국방장관이 한국과 일본을 찾아 한미일 군사동맹을 확인하고 트럼프가 자신의 휴양지에서 아베와 화기애애하게 골프를 친 데서도 이런 기조를 확인할 수 있다. 즉 트럼프는 동아시아를 포기하지 못한다.
더 불행한 것은 북한의 김정은도 공격형 현실주의에 따라 행동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랑코프(Lankov,A) 국민대 교수는 <아시아 정책> 최근호에서 북한의 정책결정자들을 ‘초현실주의자(hyperrealists)’로 명명했다. 즉 생존을 위해 모든 것을 감수함으로써 공격형 현실주의의 논리를 극단까지 실천하고 있으며 그 생존의 유일한 최종 수단이 핵무기라는 것이다(현실주의자들은 각국의 핵 보유가 평화를 가져온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1960~1980년대까지 북한은 중소분쟁, 끝모를 경제침체, 소련의 붕괴, 1990년대의 대기근과 경제위기에서도 초현실주의 외교(벼랑 끝 전술)로 살아남았다. 핵 시대에는 약소국도 상대국가를 위협할 수 있는데, 2016년과 2017년 두 번의 핵실험과 일련의 미사일 발사는 북한이 제2차 공격 능력(상대의 핵공격을 받고 나서도 핵 보복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음을 증명했다.
김정은이 집권한 후 북중 관계는 역사상 최악으로 치달았다. 시진핑 취임 이래 양국의 정상회담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김정은은 핵과 미사일 실험을 타개책으로 삼았다. 그의 할아버지가 1958년 갑산파 숙청 사건 때문에 중국과 소련 양자로부터 외면당할 때 일련의 군사모험주의(청와대 습격, 푸에블로호 납치 등)를 통해 중국과의 관계를 회복했던 역사를 답습하려는 듯이.
미국은 북한의 도발을 핑계삼아 동아시아의 대중국 포위망을 펼치고 있다. 한반도의 사드배치는 ‘최신형 아시아 MD(Missile Defence, 미사일 방어)’의 그 일환이다. 박근혜가 상상 이상으로 공들였던 한중관계는 사드배치 결정 하나로 파탄났고, 중국은 각종 비관세장벽, 회색조치를 통해 경제보복을 하고 있다. 북한의 ‘초현실주의’는 맞아 떨어져서 중국과 미국, 중국과 한국은 서로 각을 세우고 있다. 북한의 핵을 없애야 하지만 동시에 북한이 붕괴해서도 안 된다는 딜레마 속에서 중국은 대북 경제제재를 강화하면서(최근의 대북 석탄 수입 금지는 최강의 조치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대화를 강조할 수밖에 없다.
중국을 겨냥한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
트럼프의 대외 경제정책도 우리에게 골칫거리긴 마찬가지다. 잭슨형 민족주의는 그의 대외 경제정책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과거 제조업 중심지였던 ‘녹슨 지대rust belt’, 백인 노동자들의 지지로 당선된 트럼프는 당선 뒤에도 제조업의 부활을 외쳤고 GM, 포드, 도요타, 다임러, 현대, 삼성, LG 등 세계의 대기업들이 줄줄이 미국 투자를 약속했다.
기업뿐 아니라 다른 나라 정부에 대해서도 ‘미국 우선’은 관철되어야 한다. 기실 그 정책이란 동아시아 국가들에겐 그리 새로울 것도 없다. 수입규제와 수출진흥이 핵심이기 때문이다. 덤핑 판정과 상계관세 부과, 국내산 부품과 수입 부품을 차별하는 국경보조세가 그것이다. 문제는 세계 제1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동시에 가진 나라가 중상주의 정책을 실천하는 데 있다. 다른 나라들은 꿈도 못 꾸는 ‘통화 전쟁’이 그것이다.
1조 달러 이상의 인프라 건설 정책, 법인세의 대폭 감면, 국경보조세는 미국 정부의 재정적자를 대폭 확대시킬 것이고, 트럼프 스스로가 뿜어내는 불확실성은 미국의 채권으로 돈이 몰리게 한다. 그리고 이 둘은 금리상승과 달러화의 강세를 초래한다. 트럼프의 첫 번째 약속인 제조업의 부활 및 수출증대와 바로 모순된다. 타개할 방법은 오직 한 가지, 다른 나라의 통화가치를 끌어 올리면 된다.
경제원리를 거스르는 이 ‘통화 전쟁’에서 미국은 이미 대승을 거둔 바 있다. 플라자합의1985년 미국의 달러화 강세를 완화하려는 목적으로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일본의 재무장관들이 맺은 합의는 가히 ‘플라자 대첩’이라고 부를 만하다. 하지만 당시는 세계가 호황이었고 일본 제조업은 100% 이상의 엔화 절상에도 버틸 여력을 지니고 있었다. 중국은 자국 통화의 절하를 막기 위해 1조 달러 이상의 외환보유액을 사용했으며 미국의 환율조작국 기준(대미무역흑자가 300억 달러를 넘는 나라, 경상수지흑자가 GDP의 3%를 넘는 나라, 외화 구매가 GDP의 2%를 넘는 나라) 중 첫 번째에만 해당한다. 독일은 앞의 두 기준을 충족하지만 유로를 쓰는 나라여서 홀로 유로를 절상할 방법이 없다. 그동안 거론된 나라 중 대만만 세 조건을 모두 충족하지만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 상 건드리기 어렵다.
명백히 트럼프의 목표는 중국이다. 하지만 자존심으로 충만한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은 곧바로 보복을 할 것이다. 경제의존도가 더 높은 중국의 타격이 더 클 것이라고 누구나 예측하지만 이 전쟁을 버텨낼 내구력은 중국 쪽이 훨씬 더 크다고 스티글리츠(Joseph E. Stiglitz)는 단언한다. 이제 어느 나라가 남았을까?
경제·외교 압력, 동아시아 공동대응으로 풀어야
지금 한국은 중국과 미국 양 쪽에서 경제적 압력과 외교안보적 압력을 받고 있다. 불행히도 황교안 대행체제는 마치 기업인 양 미리 납작 엎드리는 방향을 택했다. 미국의 셰일가스를 수입하고 항공기 수입에 보조금을 주는 정책, 사드배치를 앞당기는 선택이 그러하다. 하지만 트럼프는 장사꾼이고 최고의 협상가다. 얼마를 미리 주면 일단 챙기고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하자고 할 것이다.
우선 중요한 것은 공동의 대응이다. 환율 압력은 동아시아 국가 모두에게 가해지고 있다. 우리만 먼저 벗어나려 한다면 결국 모두가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죄수의 딜레마를 연출하게 될 것이다. 사드 배치, 나아가서 동아시아 MD가 이 지역의 안보 딜레마를 촉발해서 결국 미국에게도 손해라는 것을 설득해야 한다. 당장 중국은 미사일의 속도를 높여서 현재의 사드 기술로는 격추할 수 없는 ‘극초음속 미사일(HGV)’과 하나의 미사일이 여러 탄두로 쪼개져서 목표로 향하는 ‘다탄투 각개목표 재돌입 미사일(MIRV)’ 개발을 서두르고 있다. 미국은 또 다시 더 성능이 좋은 레이더와 미사일을 배치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물론 돈은 우리와 일본이 내야 한다.
동북아 안보 딜레마의 진원은 북한의 핵무기다. 이미 핵무기를 가진 상태에서 군사적 방어는 불가능하다. 일각에서 주장하는 대로 우리도 핵무기를 보유하자는 주장은 미국의 핵비확산 원칙에도 어긋나려니와(트럼프가 현실주의 논리를 철두철미를 따른다면 이 원칙은 폐기될 수도 있지만) 공포의 균형 속에서 어느 쪽이 더 미친 나라인가, 즉 결의(resolution)가 주도권을 결정한다.
북한의 목표는 체제유지, 더 좁히면 김정은 정권의 생존이다. 현실주의 논리에선 제도나 규범이 아무런 영향력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북한도 평화협정이나 북미수교에는 백퍼센트 동의할 것이다. 중국 주도의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을 통해 북한의 인프라를 재건하는 방법도 있으며, 나아가서 국제금융기구에 가입함으로써 거의 공짜인 양허성 자금을 얻을 수도 있다. 북한이 꿈꾸는 경제특구들을 국제적으로 지원할 수도 있다. 당장 한미 군사훈련의 회수와 강도를 줄이는 것만으로도 북한이 느끼는 압력은 훨씬 줄어들 것이다. 이런 일련의 조치들과 핵무기 해체를 단계적으로 교환하고 나아가서 동아시아 안보공동체 속에서 북한이 생존의 위협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것이 유일한 길이 아닐까?
트럼프는 돈을 쓰지 않고 중국을 견제할 방법이 있다면 역외균형이 이뤄지는 셈이므로 대환영일 것이다. 만일 비미(非美), 비중(非中)의 제3지대 나라들이 연합할 수 있다면 중국도 북한 외의 완충지대를 지닐 수 있으므로 반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중국과 미국이 부분적으로 참가하는 ‘평화와 번영의 동아시아 공동체’는 단순한 꿈이 아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주도적으로 동아시아 국가들과 함께 이 위기를 헤쳐 나가야 한다. 물론 이건 나의 의견일 뿐이다. 그러나 현재의 위기 속에서 나라를 맡겠다고 결심한 대선 후보라면 이런 수준의 구상을 내놓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촛불이 요구해야 한다. 한반도와 우리 아이들의 안전을 보장할 복안이 있는지 물어야 한다. 대통령이 실천해야 할 최소한의 위기 대응책을 우리가 만들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