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공약 검증] 이재명 캠프도 오류 인정… “전문가 아닌 지지자 관점에서 봐야”
“결과적으로 마을에 들어온 돈은 없습니다. 그러나 돈이 한 바퀴 돌면서 마을 상권에도 활기가 돕니다. 이것이 바로 경제 활성화입니다.”이재명 성남시장이 지난 2월 자신의 페이스북에 공유한 ‘기본소득 그림’ 때문에 논쟁이 벌어졌다. 더불어민주당 대선예비후보인 이 시장 핵심 공약 가운데 하나인 기본소득과 지역상품권 지급이 경제에 미치는 긍정적 영향을 주는 사례를 그린 그림에 이론적 오류가 있다는 것이다.
호텔은 손해 봤는데 경제 활성화? 누리꾼-경제학자들 논쟁
“발길이 뜸한 마을에 호텔, 가구점, 치킨집, 문방구가 있었습니다. 한 외지인이 호텔방을 예약하며 10만 원을 지불했습니다. 호텔 주인은 가구점에 10만 원을 주고 새 침대를 들였습니다. 신난 가구점 주인은 치킨집에 10만 원어치 치킨을 주문했습니다. 현금이 생긴 치킨집 주인은 문방구에서 10만 원 어치 물품을 구입했네요. 문방구 주인은 호텔에서 빌린 외상값 10만 원을 바로 갚았습니다. 그때, 외지인이 호텔 예약을 취소하며 10만 원을 환불해갔습니다.”
언뜻 보면 일반적인 돈의 순환을 그린 것처럼 보인다. 결국 마을에 들어온 돈은 없지만 돈이 한 바퀴 돌면서 침체된 지역 상권에 활기가 돌아 경제가 활성화됐다는 게 이 시장 설명이다.
앞서 이재명 시장은 지난 1월 아동, 청년, 노인, 장애인, 농어민 등 국민 2800만 명에게 연 100만 원, 전 국민에게 연 30만 원씩 지역상품권으로 지급하는 기본소득 공약을 발표했다(관련기사: ‘이재명표 월급’은 공짜 밥? 무늬만 기본소득?).
이 시장은 당시 이 그림을 놓고 “지역상품권으로 지급되는 기본소득은 반드시 우리 동네 가게에서 ‘소비’할 때만 그 가치가 주어진다”면서 “기본소득은 우리에게 ‘소비’를 권장한다. 이처럼 국민의 가처분 소득이 늘면 경제는 반드시 되살아난다”는 밝혔다.
▲ 대선예비후보 이재명 성남시장이 20일 오전 경기도 성남 상대원재래시장을 방문해 성남시에 거주하는 청년들과 함께 청년배당(기본소득) 체험행사를 하고 상인들과 대화를 하고 있다. ⓒ 이희훈
그런데 한 달이 지난 14일 이 그림이 뒤늦게 SNS와 인터넷 커뮤니티에 회자되면서 한바탕 논쟁이 벌어졌다. 이날 오후 민주당 경선 3차 토론에서 이 시장의 기본소득 공약을 놓고 후보들간 논쟁이 벌어진 직후였다.
일부 누리꾼들은 외지인이 10만 원을 환불해 호텔이 그만큼 손해를 봤기 때문에 경제 활성화 사례로 보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또 이 그림으로 표현된 사례 자체에 이론적 오류가 있다고 지적하는 경제학자도 나왔다.
이재명 시장 쪽에 따르면, 이 그림은 이수연 전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새사연) 연구원이 지난 2014년 9월에 쓴 칼럼에 등장한 사례를 응용한 것이다. 당시 이 전 연구원은 지역화폐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이 시장 그림과 유사한 사례를 들었다.
“한 여행자가 황폐해진 시골 마을을 지나고 있었다. 경기 침체로 마을의 상황은 무척 안 좋았다. 마을사람 대부분이 빚더미 위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여행자는 하룻밤 묵을 호텔을 찾아 들어갔다. 그리고 호텔 주인에게 100달러를 주면서, 묵을만한 방이 있는지 살펴보고 싶다고 말했다. 호텔 주인은 한번 둘러보라고 하며 여행자를 2층으로 안내했다.
여행자가 호텔 복도를 지나며 방들을 살펴보는 동안, 호텔 주인은 부리나케 계단을 내려가 호텔을 나가더니 이웃의 정육점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여행자가 준 100달러로 정육점 주인에게 밀린 외상값을 갚았다. 그러자 정육점 주인 역시 100달러를 들고 부리나케 뛰어나가 이웃의 돼지 농가로 가더니 밀린 외상값을 갚았다. 돼지 농가의 농부 역시 100달러를 들고 부리나케 뛰어나가…
이런 식의 뜀박질이 몇 번 계속되고 나서 결국 또 다른 마을사람이 100달러를 들고 호텔직원에게 찾아와 그에게 밀린 외상값을 갚았다. 마침 그 때 호텔 2층에서 방을 둘러보던 여행자가 1층으로 내려와서는, 마음에 드는 방이 없다면서 자신이 냈던 100달러를 돌려달라고 했다. 호텔 직원은 마을을 한 바퀴 돌고 온 100달러를 여행자에게 내어주었다. 여행자는 떠났고, 마을 사람들은 빚을 청산했다.”
10만 원이 100달러로, 침대나 치킨, 문구가 모두 ‘밀린 외상값’으로 바뀐 걸 빼면 이 시장 그림이 제시한 사례와 큰 차이가 없다. 이수연 전 연구원은 마지막 ‘100달러 환불’이란 설정을 통해, 교환 수단인 돈 자체가 목적이 돼 자꾸 쌓아두기만 하는 상황에서 이자가 붙지 않는 ‘지역화폐’가 오히려 경제 순환을 촉진시킬 수 있다고 봤다.
“0에서 무한대를 창조하는 무한동력 창조경제?” 경제학자들도 비판
하지만 이 시장 그림은 원 사례의 ‘외상값’을 침대, 치킨, 문구 같은 실물 소비로 바꾸면서 논란을 더 키웠다. 애초 투입한 10만 원과 동일한 금액의 소비가 거듭되는 건 경제학 기본 이론 가운데 하나인 케인즈의 ‘승수효과’ 이론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승수효과란 투입량보다 산출량이 더 늘어나는 현상으로, 기본소득과 같은 정부 재정지출이 늘면 민간 소비와 투자가 활발해져 총수요(국민소득)는 몇 배 수준으로 늘어난다. 하지만 소비자들이 번 돈을 모두 소비하지 않고 일부는 저축하기 때문에 총수요가 10만 원→20만 원→30만 원식으로 늘지 않고, 10만 원→18만 원→24만 원식으로 증가폭이 조금씩 줄게 된다. 즉, 소득 1단위 지출에 따른 소비량 증가분을 뜻하는 ‘한계소비성향’이 1보다 작을 수밖에 없는데, 이 그림에선 한계소비성향을 1로 보고 있다.
호텔 예약금 10만 원 환불로 인해 투입된 돈이 0원이어도 경제 활성화 효과가 있다는 설정도 논란의 여지는 있다. 자칫 추가 재정지출 없이도 소비 증가 효과를 무한대로 발생시킬 수 있다고 해석할 여지가 있어서다.
한국SG(소시에테제네랄)증권 이코노미스트인 오석태 박사는 14일 페이스북에 “제가 볼 때 그(새사연) 글은 기본소득이나 지역화폐를 설명하는 것도, 케인즈주의적 재정 정책을 설명하는 것도 아니며, 금융기관에 대한 구제금융, 즉 금융위기 시 유동성 지원 대출을 설명하는 쪽에 가깝다”면서 “지나가던 여행자가 호텔에 잠깐 맡겼다가 되돌려 받은 돈이 바로 구제금융이 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오 박사는 “이재명 시장이 제시한 그림은 ‘원글’에 나와 있는 외상값 정리(부채 상환)의 대부분을 일반적인 상품 매매로 바꾸었기 때문에 혼란을 가져온 것”이라면서 “2, 3, 4번을 모두 ‘빌린 돈 갚음’으로 바꾸면 이해가 훨씬 쉬워진다. 물론 ‘상권 활기’ 내지 ‘경제 활성화’는 없던 얘기가 되지만…”이라고 지적했다.
페이스북 필명 ‘경박’도 “저 그림엔 기본소득론, 지역상품권, 금융무용론 혹은 금융위기에서의 구제금융 상황, 정부재정균형 무시 등이 마구 섞여 있다”면서 “틀린 것도 있고 한 가지만 강조해서 설명하기도 어려운데 그걸 몽땅 섞었으니 0에서 무한대를 창조하는 ‘무한동력 창조경제’라는 결론이 나와 버렸다”고 꼬집었다.
오석태 박사는 “내가 알지 못하는 무슨 ‘첨단’ 경제학 이론으로 저 그림을 설명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면서 “직관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주장은 ‘고등 수학’이나 ‘첨단 계량경제 스킬’을 동원해서 입증했다 한들 큰 의미가 없다고 배웠다”고 지적했다.
이재명 캠프도 그림 오류는 인정… “기본소득-지역화폐 화두 던져”
▲ 청년배당에 사용되는 성남사랑상품권 대선예비후보 이재명 성남시장이 20일 오전 경기도 성남 상대원재래시장을 방문해 성남시에 거주하는 청년들과 함께 청년배당(기본소득) 체험행사를 하며 사용한 성남사랑상품권 1만원 권. ⓒ 이희훈
다만 전 교수는 “그림 내용에 이론적 오류는 있지만 지역화폐가 경제 활성화에 도움이 된다는 의미 자체는 맞다”면서 “경제학자가 그렸다면 문제겠지만 (비전공자인) 지지자가 그린 걸 감안해서 봐 달라”고 말했다.
전 교수는 이 그림이 이 시장 지지자가 손으로 직접 그린 그림을 토대로 자원봉사자가 만들었고, 기본소득위원회에선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이재명 캠프 대변인인 제윤경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그림 비약이 심하다는 지적이 있는데 돈을 순환시키자는 의미를 지나치게 정색해서 보는 것 같다”면서 “캠프에서 공식적으로 만든 것도 아니고 지지자가 가볍게 그린 것까지 이론적으로 따지는 건 지나치다”고 말했다.
이수연 전 새사연 연구원도 이날 “예시로 든 일화는 영국 경제학자인 데이비드 보일을 비롯한 경제학자들이 돈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많이 거론하는 것으로, 관점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다”면서 “의미 전달에 논란이 없게끔 그림을 세심하게 다듬었으면 하는 아쉬움은 있지만, 우리 사회에 기본소득과 지역화폐를 화두로 던진 건 의미있는 일”이라고 밝혔다.
당시 새사연 원장으로 최근 이재명 시장 지지를 선언한 정태인 칼폴라니사회경제연구소 소장은 지난 14일 페이스북에 “많은 사람들이 이 그림을 비웃는다는데, 난 뭐가 문젠지 전혀 모르겠다. 그것도 경제학을 전공한 사람들이 그러는데, 정말 내가 잘못 이해한 건지도 모르겠다. 호텔만 빼면 그냥 케인즈 얘긴데, 케인즈가 그리도 만만한가?”라고 반박했다.
정태인 소장은 “이자가 붙지 않는 돈, 심지어 시간이 가면 오히려 가치가 줄어드는 돈을 도입하면 훨씬 빨리 채무 관계가 청산될 것”이고 “빚이 없는 사람은 소비를 하든 투자를 할 것”이라면서 이 시장의 기본소득 공약에 의미를 부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