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호 업무 지시는 ‘일자리위원회’, 1호 민생 행보는 ‘비정규직과의 만남’
문재인 대통령의 경제·노동·복지 공약으로 살펴본 ‘제이노믹스’ 실체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뒤 첫 번째로 처리한 업무는 ‘일자리’였다. 지난 5월10일 문 대통령은 청와대 본관 집무실에서 대통령 직속 ‘일자리위원회 설치 및 운영방안’에 서명하는 것으로 공식 업무를 시작했다. 첫 민생 행보도 ‘일자리’였다. 문 대통령은 취임 사흘째인 5월12일 인천국제공항을 찾아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만났다.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zero) 시대를 열겠습니다’라는 제목의 간담회였다. 정일영 인천국제공항공사 사장은 인천공항 비정규직 1만 명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겠다고 약속했다.
‘경포대’ 맹공격의 교훈?
‘일자리 대통령’이 되겠다는 강한 의지는 5월11일 발표한 청와대 직제 개편에서도 재차 확인된다. 박근혜 정부 시절에 사라진 청와대 정책실장(장관급)을 복원하고 정책실장 산하에 일자리수석을 신설했다. 일자리수석은 일자리기획·고용노동·사회적경제 분야를 총괄하면서 문재인 정부 국정 과제 1순위인 일자리 정책을 책임진다. 문 대통령은 대선 공약에서 청와대에 ‘일자리 상황실’을 설치하고, 대통령 집무실에 ‘일자리 현황판’을 붙여놓겠다고 약속했다.
이러한 구상은 문 대통령이 청와대 민정수석, 비서실장으로 함께한 참여정부 시절의 교훈에서 비롯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3년 취임하자마자 ‘3대 거품’에 휩싸였다. 국제통화기금(IMF) 경제위기 극복 과정에서 누적된 신용카드 거품, 부동산 거품, 벤처 거품이 한꺼번에 터져나왔다. 보수언론은 연일 참여정부의 경제정책을 맹공격하면서 노 전 대통령을 향해 ‘경포대’(경제를 포기한 대통령)라며 비아냥댔다. 참여정부 후반기인 2005~2006년 사회적 일자리 창출 전략을 폈으나 ‘고용 없는 성장’ 추세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참여정부 경제정책을 둘러싼 5년간의 갈등과 대립은 결국 17대 대통령선거에서 ‘경제 대통령’을 자임한 이명박 전 대통령의 압도적 승리로 이어졌다.
문재인 대통령이 선거 때부터 줄곧 ‘사람 중심 경제성장’을 강조한 까닭이다. 정부가 적극적으로 사람에 투자해 일자리를 늘리면 가계소득이 늘어나고, 이것이 다시 소비와 생산 증가로 이어지는 경제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주장은 문재인 대통령의 이름에서 따온 ‘제이노믹스’(J-nomics·Jaein+Economics)로도 불린다. 무역수지를 개선하기 위해 환율 상승을 유도하면 초반에는 무역수지가 악화되다가 나중에는 개선되는 현상을 뜻하는 ‘제이커브(J-curve) 효과’처럼, 정권 초반에 경제구조 개혁이라는 진통을 겪고 나면 성장과 분배가 선순환되는 경제의 틀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바람이 담긴 작명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노무현 전 대통령이 원했던 ‘새 시대의 첫차’가 되려면 현재의 시장만능질서를 바로잡아야 한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전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가 확실히 파탄 났기 때문에 노 전 대통령 때보다 유리한 출발선에 서 있다. 수출 호조 등 전체적인 경제 펀더멘털(기초 체력)도 나쁘지 않은 편이다.” 참여정부 초기 청와대 국민경제비서관을 지낸 정태인 칼폴라니사회경제연구소 소장은 “결국 대통령의 의지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일자리는 ‘늘·줄·높’
“나라 안팎으로 경제가 어렵습니다. 민생도 어렵습니다. 선거 과정에서 약속했듯이 무엇보다 먼저 일자리를 챙기겠습니다. 동시에 재벌 개혁에도 앞장서겠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내세운 경제정책의 두 축은 일자리와 재벌 개혁이다.
일자리 공약의 핵심은 ‘늘·줄·높’이다. ‘일자리는 늘리고, 노동시간과 비정규직은 줄이고, 고용의 질은 높이겠다’는 뜻이다. 박근혜 정부의 ‘줄·푸·세’(세금 줄이고, 규제 풀고, 법질서 세우고)와 반대 방향으로, 내수 활성화로부터 경제성장을 끌어내는 소득 주도 성장 전략이다.
우선 정부가 앞장서 공공부문을 중심으로 일자리 81만 개를 창출할 계획이다. 소방관, 사회복지 전담 공무원, 교사, 경찰관, 근로감독관 등 공무원 일자리 17만4천 개, 사회복지·요양·공공의료 등 사회서비스 공공기관 일자리 34만 개, 공공부문에 간접고용된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등으로 30만 개 일자리를 늘린다는 게 복안이다. 문 대통령이 찾은 인천공항에도 특수경비원, 소방대원 등 하청업체에 간접고용된 비정규직만 6800여 명이다. 한국의 공공부문 일자리 비중은 전체 일자리의 7.6%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21.3%)의 3분의 1에 불과하다.
“정부가 일자리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공공부문에서 돌파구를 열자는 발상은 맞는 방향이다. 다만 재원을 어떻게 마련할지에 대해서는 준비가 좀 부실해 보인다. 단순히 일자리의 양을 늘리는 게 아니라 일자리의 질 개선, 노동시간 단축, 최저임금 인상까지 함께 논의해야 한다.”(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문재인 대통령은 청년 일자리 문제에 대해 청년고용의무할당제와 청년구직촉진수당 도입 등도 약속했다. 중소기업이 청년 2명을 정규직으로 신규 채용하면 세 번째 청년에 대해서는 정부가 3년간 임금을 지원(1인당 한도 2천만원)하는 ‘청년추가고용지원제’도 도입된다. 실노동시간 단축과 일자리 나누기로 일자리 50만 개를 만들겠다는 약속도 있다.
재벌 개혁·공공 복지 인프라 확충
김유선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참여정부 때는 사실 노동정책 준비가 거의 안 된 상태였는데, 이번 대선에서는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를 제외하고 여야 모두 ‘노동시장 유연화’라는 말이 한마디도 나오지 않을 정도로 전체적인 방향이 일치했다. 그만큼 일자리, 노동 밑바닥 상황이 좋지 않다는 점을 반영한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문 대통령의 공약은 “시민사회와 노동계가 오랫동안 주장해온 내용이 상당 부분 반영”(참여연대 19대 대선 공약 평가)돼 있다. 상시·지속적 업무는 정규직으로만 직접고용하는 ‘사용사유 제한 제도’ 도입이나 ‘비정규직 차별금지 특별법’ 제정, 2020년까지 최저임금 시급 1만원으로 인상 등의 공약이 대표적이다. 공약을 지키려면 내년부터 최저임금은 매년 15% 이상 인상되어야 한다.
재벌 개혁 공약도 그동안의 요구를 총망라했다. 우선 공익법인, 자사주, 우회출자 등 법의 사각지대를 악용해 재벌 총수들이 그룹 지배력을 강화하는 불법·편법 경영 승계를 막는다. 일감 몰아주기, 부당 내부거래 등 재벌의 갑질 횡포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고, 횡령·배임 등 경제범죄 사면권 제한도 추진된다.
2012년 대선에서 가장 큰 화두였던 ‘경제민주화’와 관련해 문 대통령은 범정부 차원의 컨트롤타워 격인 ‘을지로위원회’(가칭)를 만들어 가맹점, 대리점 등의 각종 불공정행위를 근절하겠다고 약속했다. 소상공인·자영업자의 생계형 업종에 대한 적합업종 지정도 확대하고, 대기업과 하청업체가 이익을 공유하는 ‘협력이익배분제’도 도입할 계획이다.
복지 공약에서 제이노믹스의 구상이 가장 두드러지는 공약은 ‘생애맞춤형 소득지원제도’다. 일을 하지 않거나 할 수 없어 빈곤해지기 쉬운 계층에 정부가 최소한의 소득을 보장해주는 것이 핵심이다. 노동시장 밖에 있는 계층에 현금을 지원하는 ‘사회수당’으로, 아동수당과 청년구직촉진수당이 신설된다. 만 0~5살 아동에게 월 10만원씩, 만 18~34살 미취업 청년에게 월 30만원씩(최대 9개월) 지급한다. 기존 장애인연금(기본급여)과 기초연금은 손질된다. 만 18살 이상 중증장애인과 65살 이상 노인에게 지급되던 연금액이 20만원에서 30만원으로 각각 인상된다. 다만 두 연금 모두 ‘소득 하위 70% 대상’이라는 기준은 그대로 유지된다.
문재인표 복지 공약의 또 다른 핵심은 공공복지 인프라 확충이다. 민간 영역에서 담당하던 보육·의료·간병·요양 등의 사회서비스를 공공 영역으로 끌어들여 공공성을 강화하겠다는 취지다. 국공립 어린이집·유치원 이용률 40%로 확대, 치매안심병원 설립, 공공병원·공공 요양시설·어린이재활병원 확대 등이 대표적이다.
제주대 의학전문대학원 교수인 이상이 복지국가소사이어티 공동대표는 “복지는 크게 ‘소득’과 ‘사회서비스’를 보장해줘야 하는데 그런 면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은 빠진 것 없이 잘 짜인 편”이라고 말했다. 시민단체들도 “누구에게 어떤 복지를 제공하려는지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긍정적인 편”(참여연대)이라고 평가했다. 선진국과 달리 아동수당 지급 대상을 만 0~5살로 제한한 점, 기초연금 인상을 노인 빈곤 문제 해결의 최선책으로 인식하는 점은 ‘한계’로 지목됐다.
공약에선 부동산 정책이 사라졌다. 빚내서 집을 사게 했던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부동산 시장 활성화 정책은, 문재인 정부에서 전·월세 세입자의 불안을 줄여주는 ‘주거 안정’ 정책으로 대체됐다. 정부가 임대료와 임대 기간을 직간접적으로 관리하는 공적임대주택을 매년 17만 호씩 공급하고, 저소득 가구에 지급되는 주거급여의 대상과 지원액을 늘리는 것이 뼈대다. 5년간 50조원을 들여 전국 500곳에 이르는 노후 주거지의 환경을 개선하는 ‘도시재생 뉴딜사업’도 문재인 정부 주거 공약의 야심작이다. 뉴타운·재개발 사업처럼 개발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기존 주거지를 완전히 밀어버리는 방식 대신, 낡은 주택은 고치고 생활편의 시설은 확충해서 구도심에 활력을 불어넣겠다는 계획이다.
기재부 10조원 안팎 추경 편성 채비
선대인 선대인경제연구소 소장은 투기 수요를 자극해 부동산 시장을 왜곡하는 현행 주택분양제도를 개선할 수 있는 방안인 ‘후분양제’ 공약 누락을 아쉬워했다. “주택시장에서 건설업체들이 소비자에 대해 절대적 힘의 우위를 갖게 하는 게 선분양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후분양제를 공약했으나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문재인 대통령도 부동산 시장 정상화를 위한 필수 과제에 뚜렷한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 2012년 대선에서 약속했던 전·월세 상한제, 계약갱신청구권 도입을 ‘단계적 제도화’라고만 모호하게 밝힌 대목도 한계로 꼽힌다.
당장 문재인 정부 발등에 떨어진 불은 재원 마련이다. 대선 공약을 모두 지키려면 연간 35조원의 재원이 필요하다(아래 그림 참조). 이 가운데 공공부문 일자리 예산을 4조2천억원, 복지 관련 예산을 18조7천억원으로 추산한다. 정부는 방산 비리 예산·최순실 예산 등 재정지출 절감, 탈루 세금 과세 강화 등을 통해 재원을 마련하겠다고 밝혔지만 소득세·법인세·보유세 인상을 포함한 근본적인 해법 도입은 뒤로 미루고 있다. 이 때문에 개별 공약의 실현 가능성을 놓고 일부에선 고개를 갸웃거린다. 복지 공약을 주도한 김연명 중앙대 교수(사회복지학)는 “정부가 보육·육아 시설을 짓기 위해 국공채를 발행할 때 국민연금의 적극적인 공공투자를 유도할 수도 있다. 공약 집행은 관련 법안만 통과되면 충분히 한번에 추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기획재정부는 10조원 안팎의 추가경정예산안(추경)이 편성될 것으로 내다보고 채비를 서두르고 있다. 문재인 캠프에서 정책특보를 맡은 김기식 전 의원은 “일자리 문제가 청년들에겐 재난 수준이라 일자리 추경을 편성하는 데 국민적 공감대가 있다고 본다. 추가 세수 등으로 세법 개정 없이도 재원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비정규직 설움 없애줄 대통령
“지금 아주 극심한 경제적 불평등과 양극화가 우리 사회의 통합을 방해하고 경제성장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 비정규직 문제부터 반드시 제대로 해결하겠다.” 문재인 대통령은 5월12일 인천공항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약속했다.
“3년마다 업체가 바뀌어 고용불안에 시달렸다.” “2차 하청인데 1차 하청과 비슷한 일을 하는데도 돈을 수십만원 적게 받는다. 이런 설움을 없애달라.” 대통령 앞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눈물을 글썽이며 설움을 쏟아냈다. ‘일자리 대통령’의 참모습이란, 숫자로 대표되는 무미건조한 경제 대통령보다 “서러운 눈물을 닦아드리는 대통령”(취임사)의 따뜻한 모습에 더 가까울지 모르겠다.
문재인 대통령은 선거 공약에서 “청년의 짐을 함께 지겠다” “300만 소상공인과 600만 자영업자가 안심하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당사자인 청년, 중소자영업자들은 문재인 대통령에게 어떤 경제정책을 바라고 있을까? 청년·주거·경제민주화 공약에 적극 발언해온 이들의 목소리를 전한다. 방기홍 전국문구점살리기연합회 회장 “29년째 충남 천안에서 문구 도매상을 운영하고 있다. 대형마트에서 크레파스, 스케치북 등을 팔면서 2000년 2만5천 개에 달하던 문구점이 지금은 1만 개 안팎으로 줄었다. 문구 소매업이 ‘중소기업 적합업종’으로 지정돼 지난해부터 대형마트가 일부 품목을 ‘묶음 판매’하고 있지만 실효성이 없다. 규제만이 아니라 자영업자를 살리는 정책을 같이 펴야 한다. 기본소득을 지역상품권으로 지급하는 것 등이 대안이 될 수 있다. 680만 자영업자를 경제주체로 바라보는 대통령이 돼달라. ‘내 삶’이 바뀌는 경제정책을 우선시하기 바란다.”
임경지 민달팽이유니온 위원장 “문재인 정부는 청년 임대주택을 30만 실 공급하겠다고 했다. 개수로 보면 (대선 후보 중) 가장 많지만 오로지 ‘공급’만 있다. 다른 정책 수단인 주거복지나 시장 안정 정책은 없다. 관성적인 선거 공약이다. 청년에겐 두 가지의 주거 수당이 필요하다. 보증금이 없는 열악한 고시원, 반지하로 내몰리지 않도록 보증금 대출을 해주고 이자도 함께 지원해야 한다. 또 시급한 일이 월세 보조다. 높은 주거비를 혼자 감당하는 청년이 너무 많다. 만약 정부가 사회보장 수당을 지급하면 임대료가 오를 수 있으니 정부가 시장에 개입해야 한다. 전·월세 상한제로 과도한 임대료 상승을 막고 계약갱신청구권제로 청년이 원하는 기간 만큼 거주할 수 있어야 한다.”
우지수 이화여대 총학생회장 “이번 대선에선 지난해 총선 때보다 오히려 청년 의제가 적었던 것 같다. 일자리 문제만 해도 81만 개, 100만 개 ‘베팅’하는 느낌이 들었다. 숫자도 중요하지만 고용의 질을 높여달라. 청년들이 중소기업에 굳이 가지 않는 이유는 적절한 생활임금을 받기 어렵기 때문이다. 대학 등록금을 명목상 반값으로 낮추겠다고 약속했는데, 박근혜 정부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바란다. 국가장학금으로 보완하는 지금의 소득연계형 반값 등록금 정책으로는 실질적 학비 부담이 줄어들지 않는다. 최저임금 1만원 인상, 청년을 위한 공공주택 확충, 통신비 인하 등으로 청년들의 삶을 해결하는 대통령이 돼달라.”
황예랑 기자·서보미 기자 |
제1162호
2017.05.16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
서보미 기자 spr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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